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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584화 (584/916)

584화. 창을 거꾸로 들다

“이곳이 익숙한 걸 보니 전방에서 복역을 했었던 모양이구나.”

서문설이 말했다.

“음, 십 년이 넘게 이곳에 있었어.”

석목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 말을 따라서 하자.”

서문설은 석목이 내놓은 의견을 따랐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 영우비차를 불렀다.

두 사람은 비차를 타고서 멀리 날아갔다.

석목은 기억을 더듬으며 부공성 요새 방향으로 향했다.

석목 뒤에 서 있던 서문설은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문설은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서 두 눈을 감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 며칠이 지났다.

석목이 모는 영우비차는 성역에서 오랫동안 비행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떠다니는 행성의 파편들 위에서 잠깐 머무르며 혼돈의 힘을 피할 수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서문설이 물었다.

“거의 다 왔어. 반나절 정도면 충분할 거야.”

석목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을 마친 석목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금빛이 흐르는 두 눈으로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서문설이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섰다.

먼 곳에서 금빛이 한 줄기 나타났는데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왜? 혹시 흑마족이야? 우리를 발견한 걸까?”

서문설은 그 빛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흑마족 전함은 검은빛이야.”

석목이 고개를 저으며 영우비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공법을 천천히 시전하여 경계하기 시작했다.

빛이 날아오는 방향을 확인해보니 분명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틀림없었다. 날아오는 속도도 석목이 모는 비차보다 훨씬 빨랐기에, 애당초 도망갈 생각은 버린 채로 다가오는 빛을 지켜보며 상황을 살폈다.

잠깐 사이에 금빛은 뚜렷해졌다. 빛은 용 모양 비주였는데 그 위에 보라색 피풍의를 두른 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을 본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팽악이었다.

비주에서 내뿜는 빛이 어두워지더니 석목과 서문설 앞에 멈춰 섰다. 비주 위에 서 있는 팽악이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팽악의 시선은 먼저 서문설에게 향했다가 이내 석목의 몸을 훑어보았다.

“누구시기에 우리가 가는 길을 막습니까?”

석목은 애써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눈알을 한 번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묻고 있었지만 석목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이제 막 곤륜에서 나왔는데 이놈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석목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팽악에게 드러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영해 속에 걸렸던 금제도 이미 사라졌으니 잘 둘러대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작작 해! 고작 백 년 만에 네놈 따위가 천위 초기에서 후기까지 올라가다니. 금제까지 거의 다 풀었더구나. 그런데 네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지. 그 금제는 평범한 금제가 아니야. 조금만 남아있어도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지.”

팽악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팽악이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해에 너와 그 여인이 곤륜성허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죽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을 했다. 그래서 내 기꺼이 부공성 요새까지 찾아와서 백 년 가까이 기다렸지 뭔가. 후후, 역시 하늘도 내 끈질김에 감동한 모양이구나. 네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기다린 보람이 있는 거지! 하하하!”

팽악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보아하니 쉽게 넘어가기는 글렀다.

한쪽에 서 있던 서문설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팽 관주님, 그때 말씀하신 물건을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곤륜에서 백 년 가까이 갇혀있었는데 이제 막 나왔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뭐! 찾지 못했다고! 곤륜에서 백 년이나 처박혀 있었으면서 지금 내게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가!”

석목이 하는 말을 듣던 팽악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팽악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서문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문설, 너도 곤륜에서 백 년이나 머물렀나? 혹시 일곱 빛이 나는 나뭇가지 모양 보물을 보지 못했는가?”

서문설을 석목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사람과 함께 궁전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속은 천지 영기가 유난히 짙었기 때문에 백 년 만에 천위 후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힘을 합쳐 궁전 주변에 드리운 금제를 뚫어 곤륜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관주님이 말씀하시는 칠색 보물은 정말 보지 못했습니다.”

“헛소리! 헛소리! 막린회가 안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다 말해주었다. 칠보묘수가 곤륜에 나타났다고 하던데 너희들이 지금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게냐!”

팽악이 화를 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곤륜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보지도 못하고 묶여버렸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목이 하던 말을 들은 팽악은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석목을 보며 말했다.

“정말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상관없다. 너를 죽이고 네 혼을 뒤져보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석목은 표정을 구기며 파란빛으로 몸을 감았다. 파란빛이 주변 십 장 범위까지 드리웠다.

이때, 팽악이 차갑게 웃으며 서문설을 바라보았다.

“서문설, 저놈은 우리 이진종의 제자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서 온 첩자다. 너는 우리 내관의 제자인데 저런 놈을 도울 건가?”

팽악이 하는 말을 듣던 서문설은 망설이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우비차에서 날아 내려와 팽악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석목은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죽어!”

팽악이 차갑게 웃으며 석목을 바라보았고, 그가 손을 흔들자 얇은 번개 네 갈래가 석목을 향해 날아갔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빛들이 얼마나 강한 위력을 품고 있는지 석목은 이미 겪어보았다.

석목은 곧바로 낮게 소리를 지르며 금빛을 내뿜었고, 그는 빠르게 토템 변신술을 시전하여 금색 비늘을 몸에 덮었다.

석목이 풍기는 방대한 기운은 팽악보다 많이 뒤처지지 않았다.

동시에 석목은 여의빈철곤을 꺼내 들었다. 여의빈철곤에서 금빛이 반짝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천지 영기가 짙은 보월궁에서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석목은 밤낮없이 곤초로 여의빈철곤에 힘을 불어넣었다. 힘을 백 년간 쌓자, 여의빈철곤이 지닌 위력은 칠보묘수만큼 강력했다.

석목이 팔을 흔들자 여의빈철곤에서 곤봉 그림자가 네 갈래 날아 나와 휘몰아쳐 오는 하얀빛들과 부딪쳤다.

쾅!

곤봉 그림자가 사라지며 하얀빛들도 흩어졌다.

팽악은 눈에서 짙은 빛이 이글거렸다. 석목의 여의빈철곤을 바라보는 팽악의 눈빛은 탐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네 이놈, 그동안 곤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영기를 이 정도로 제련시켰다니! 이런 보물은 네놈이 사용하기엔 너무 아깝다. 내가 대신 써주마,”

팽악이 큰소리로 웃으며 다시 팔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하얀빛이 수십 갈래나 날아왔다. 날아오던 빛들이 허공에서 묶이며 하얀색 번개망을 이루어 석목을 덮으려고 했다.

이어 팽악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청동고정(青銅古鼎)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파란빛이 더 크게 번졌다.

그리고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쓱 쓱 쓱!

파란 수강신뢰가 천둥소리를 내며 날아 나와 하얀 번개망으로 향했다.

쾅! 쾅!

수강신뢰가 전부 터져버렸고, 마치 파도가 암석에 부딪치듯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그러나 하얀 번개망은 속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빠르게 석목에게 날아와 드리웠다.

팽악은 갇혀버린 석목을 바라보며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가!”

팽악이 팔로 허공을 찌르며 석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팽악의 머리위에 떠있던 청동고정이 휙 소리를 내며 석목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때앵.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청동빛이 번졌고, 빛들이 다시 종 허영으로 변하여 석목에게 드리웠다.

팽악은 눈에서 사나운 빛을 반짝이며 또 다시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굵은 번개 한 줄기가 날아 나와 하얀 번개 칼날로 변해서 종에 갇혀버린 석목의 목을 휘갈겼다.

칼날이 일으킨 바람 소리와 함께 석목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어서 석목의 머리와 몸통이 파란색 액체 한 덩이가 되어 녹아내렸다.

“뭐야!”

팽악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옆에서 빛이 번쩍이며 석목이 나타났다. 물과 불의 날개를 펼친 석목의 손에 든 여의빈철곤에서 빛이 크게 번지며 팽악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곤봉 그림자가 줄줄이 나타나 허공을 한 장, 한 장 찢으며 부서져버렸고, 마치 은하수가 바닥에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팽악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번개를 내뿜어 번개 방패를 만들어냈고, 방패가 팽악의 머리를 보호했다.

쿵!

여의빈철곤이 번개 방패와 부딪치며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이 완전히 찢어지고 부서져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번개 방패는 곤봉을 막아내는 듯했으나 이내 터져버렸다. 그러나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뱉어낼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팽악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팽악이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면서 한 손을 흔들어 다시 청동고정을 거두어들였고, 그 청동고정은 다시 팽악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팽악은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그야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팽악이 조금이라도 지체했더라면 지금쯤 이미 죽어버렸을 터였다.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큰 부상은 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자식, 백 년 동안 못 본 사이 꽤 많이 컸구나!”

팽악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흥!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한 번 해보자!”

석목이 콧방귀를 뀌며 왼팔에 하얀 화염을 시전하여 여의빈철곤에 감았다.

금빛과 하얀 화염이 뒤엉키며 더욱 더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서문설, 네가 날 도와서 저놈을 죽인다면 내 필히 큰 상을 내리마.”

팽악은 옆에 서 있던 서문설을 한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네!”

서문설은 눈에 빛이 흘렀다. 서문설의 손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칼인지 검인지 모를 법보가 하나 나타났다.

신비로운 금색 날에서 방대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그 위력은 석목이 들고 있는 여의빈철곤과 비슷할 정도였다.

팽악의 얼굴에서 탐욕스러운 빛이 스쳤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팽악이 큰소리를 지르며 한 손을 흔들어 또 다시 석목에게 수많은 번개를 날렸다.

번개가 모여 커다란 손바닥 모양으로 변하했고, 손바닥은 하얀 번개를 감싼 채 석목에게 날아갔다.

서문설도 무기를 휘두르며 앞으로 내질렀다. 다만 무기가 향한 곳은 석목이 아니라 팽악의 등이었다.

팽악은 얼굴이 굳어버렸고, 몸에서 번개가 번졌다. 팽악의 몸통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팽악의 몸에서 핏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팽악이 번쩍이더니 몇 장 밖에서 나타났다. 팽악은 복부에 커다란 상처가 하나 생겨났고, 상처에서 붉은 피가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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