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은인
그리고 이틀이 흘렀다. 연나가 법결을 시전하여 비주를 한 작은 행성에 멈추었다.
석목은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눈앞에 보이는 행성은 마기와 영기가 매우 희박하여 남해성보다 척박해 보였다. 이런 행성에 수련을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석목은 신식을 보내 순식간에 수백 리에 드리웠다.
신식이 드리운 곳에는 수련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오라 부족의 마존이 이곳에 있겠나?
“전무, 너는 여길 지키고 있어.”
연나가 말했다.
“네!”
전무가 대답했다.
연나가 칠보묘수를 꺼내 들고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칠보묘수가 손에서 빠져나가 연나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며 칠색 빛을 줄줄이 뿜어냈다.
잠시 후에 칠보묘수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연나는 그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석목을 비롯한 세 사람은 평범한 성에 도착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석목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흑마 성역에서도 마기가 짙은 행성에선 걸출한 실력자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그런 행성들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눈앞에 놓인 마기가 매우 희박한 행성은 수련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록 수명이 짧았지만 일평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걱정 없이 살아갈 터였다.
세상은 규칙을 따라 돌아가며 아주 번성한다면 몰락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진리인 것 같았다.
연나는 성 밖의 한 궁전 앞에 내려섰다.
건물 밖에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돼지나 양처럼 공봉을 하는 제물들을 들고서 한 줄로 선 채 순서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내려오는 속도는 너무 빨랐기 때문에 아무도 세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연나는 궁전 밖의 상황을 바라보며 유감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석목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돼지나 양은 전부 익힌 고기였는데 정성스러운 요리 과정을 거친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어떤 신을 모시며 내년이 풍년이길 기원하는 것 같았다.
석목이 멈칫하더니 신식을 보내 눈앞에 서 있는 건물에 드리웠다.
하지만 석목의 신식이 궁전에 닿자 곧바로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튕겨나며 되돌아왔다.
석목은 안색이 변했다.
연나가 가장 앞에서 궁전으로 걸어갔고, 석목과 구십라가 연나를 뒤따랐다.
“어이, 거기 세 명은 누군가. 여긴 명라(冥罗) 어르신의 성전이다.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된다!”
체형이 거대한 사내들이 몇 명 걸어오며 호통을 쳤다.
석목이 멈칫하며 파란빛을 쏘자 사내들은 표정이 멍하니 바뀌었다.
세 사람은 사내들 옆을 지나쳐 궁전 안쪽으로 다가갔다.
밖은 시끌벅적했지만 궁전 안은 단 한 사람도 없어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여의빈철곤을 매만졌다. 궁전 안엔 형태가 없는 살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세 사람이 밟고 있던 땅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커다란 입 속에 온통 흉악한 이빨을 드리운 짐승이 세 사람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크기가 몇 장 정도 되는 검은 악어였는데 방대한 기운을 풍기는 모습을 보니 성계 요수였다.
“짐승 녀석!”
석목이 소리를 지르며 여의빈철곤을 꺼내 들었다.
금색 곤봉 그림자가 날아가 악어의 입을 내리쳤다.
석목의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고, 검은 악어도 튕겨져 날아갔다.
악어가 사납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검은색 빛기둥이 입 속에서 튀어나와 세 갈래로 갈라져서 빠른 속도로 세 사람에게 향했다.
석목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이때, 연나가 손을 흔들자 칠색 빛이 나타나 검은빛을 막아냈다.
검은빛이 칠색 빛에 닿자 불 속에 들어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멈춰!”
검은 악어가 계속 공격을 하려고 할 때 맑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키가 왜소한 여자 아이가 나타났다.
여자 아이는 열두세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눈썹은 정교했으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고 있었다. 또한 보라색 꽃무늬 피풍의를 입고 있었으며 연근 같은 두 다리를 내놓고 있는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여자 아이는 누렇게 구운 양다리를 들고 있었는데 이미 반 정도는 먹은 것 같았다. 기름이 번지르르한 양다리에서 맛있는 고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악어의 커다란 머리통이 어린 아이에게 향하더니 악어는 곧바로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 아이 옆으로 다가가 머리를 아이에게 비벼댔다. 애교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석목은 왜소한 아이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여자 아이는 기운이 불안정했는데 석목의 신식으로는 여자 아이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또 다른 신경 강자였다.
“혹시 또 마존인가?”
석목은 믿기지 않았다.
연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동그란 눈에서 물안개가 이글거렸다.
“보화 언니!”
소녀는 들고 있던 양다리를 던져 버리고는 연나의 품으로 달려왔다.
“명라, 오래 기다렸지.”
연나의 차갑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소녀를 품에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목은 조금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안이 벙벙했다.
보라색 피풍의를 입은 소녀가 정말로 흑마족의 칠대 마존 중 한 명이었다.
“언니, 그동안 어디에 계셨어요? 천정 녀석들이 들이닥쳤어요. 이 명라는 상대가 되지 않아서 이런 곳에 숨어 있었죠…… 언니를 찾아서 떠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고만족의 본부에 잠입을 해서 고만족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는데 언니가 이미 죽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얼마나 슬퍼했는지 몰라요……”
소녀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래, 나 돌아왔어. 다 괜찮아질 거야.”
연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보라색 피풍의를 입은 소녀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한참 뒤에야 연나의 품에서 일어섰다.
“식탐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구나.”
연나는 명라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헤헤, 이건 언니가 저에게 지키라고 한 마원이에요. 절대로 바꿀 수 없지요!”
명라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명라가 하는 말을 들은 연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화 언니, 지금 흑마 성역은 전부 천정이 점령하고 있어요. 하지만 언니가 돌아왔으니 우리가 이제 천정을 쫓아버립시다!”
명라는 웃음을 거두어들이고는 작은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흑마 성역에 오게 된 이유가 바로 그거야.”
연나는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런데, 언니의 실력이……”
명라가 망설이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음, 우선 실력부터 되찾아야 해. 그래서 명라, 네 마원의 힘이 필요해.”
연나는 손을 흔들어 칠보묘수를 꺼내 들었다.
“칠보묘수! 언니, 이 법보를 다시 찾아냈군요. 너무 잘되었어요.”
명라가 좋아하며 손을 흔들었다. 명라의 미간에서 검은빛이 튀어나와 칠보묘수에 달린 또 다른 가지로 스며들었다.
연나의 몸에서 칠색 빛이 크게 번지면서 기운이 한 층 더 강력해지며 성계 정상에 도달했다.
“아직 조금 부족해.”
연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니, 이미 마원의 힘을 네 갈래나 수집했네요. 정말 잘된 일이에요.”
명라는 칠보묘수를 바라보며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나찰 부족이 머무는 유궤성으로 갈 거야. 명라, 나랑 같이 가자.”
연나가 말했다.
“그럼요. 언니가 실력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니 제가 지켜야죠. 이 두 시종은 실력이 너무 약해 보여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거예요!”
명라는 석목과 구십라를 흘겨보며 말했다.
“명라, 잘 기억해. 이 사람의 이름은 석목이야. 시종이 아니라 내 은인이야.”
연나는 석목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화 언니의 은인이군요. 그럼 제 은인이기도 하죠! 석목 오라버니,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명라는 연나의 말을 듣더니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석목은 코를 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신경 강자가 자신에게 오라버니라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지만 실제 나이는 석목보다 몇 배나 많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몇몇 신경 강자들과 비교하자니 천위 정상이란 수련 경지는 너무 보잘 것이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꼭 빠른 시일 안에 성배를 응결시켜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천정이 아니라 신선 아무개가 와도 석목은 상대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됐다. 가자!”
연나는 명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하얀 비주를 불렀다.
잠시 후에 하얀빛 한 줄기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 * *
며칠 후.
끝없이 펼쳐진 사막 속, 거센 바람이 불어 모래가 하늘에서 흩날렸다.
석목은 사막에서 튀어나온 바위 위에 서 있었고, 그는 두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 옆에서 연나가 막연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고 명라와 전무가 각각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구십라는 뒤쪽 더 멀리에 서 있었다.
“여기가 정말 유궤성이이에요?”
명라는 믿기지 않은 듯이 말했다.
“저기를 보세요!”
석목의 눈에 금빛이 맴돌았다. 석목이 손을 들어 수백 장 멀리 사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명라를 비롯한 일행들은 석목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둥그런 백옥 돌기둥이 모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어떤 유적 같았다.
일행들은 곧바로 유적으로 향했다. 근처에는 백옥 돌기둥의 잔해가 여기저기 적잖게 널브러져 있었다.
“오래 전에 유궤성은 흑마 성역에서 가장 번화한 행성 중 하나였습니다. 천 년 사이에 폐성으로 몰락했군요.”
전무가 허무한 투로 말했다.
“천정이 이렇게 도처에서 자원을 갈취해 가는 건 숨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겠죠.”
석목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저와 고만족이 협의를 이루었을 때, 천 년 동안 흑염성을 떠나지 않으면 저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전무가 스스로를 조롱하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언니, 봉희(封姫) 언니는 아직도 살아있을까요?”
명라가 적막한 표정을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봉희는 늘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정이 많은 아이란다. 절대 나를 배신할 리 없어. 아마 가장 격하게 반항을 했을 거야. 운리는 봉희가 운명했다고 하지만 아직 신혼이 남아있단다. 바로 이 유궤성에 있어.”
연나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어디에 있어요?”
명라는 작은 얼굴에 기쁜 기색이 어렸다. 명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연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손을 흔들자 칠보묘수가 반짝이며 나타나 하늘로 날아갔다.
연나는 두 손을 위아래로 겹쳐 끊임없이 현묘한 법결을 시전하여 칠보묘수에 날렸다.
화려한 빛이 나뭇가지에 스며들자 칠보묘수에서 순식간에 빛이 크게 번지며 수십 배나 자라났고, 칠보묘수 위에서 타오르는 빛은 밝아졌으며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쿵!
큰소리와 함께 하얀빛이 굵기가 한 장 정도 되는 빛기둥으로 변하여 사막에 떨어졌다.
휙!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얀빛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광풍이 휘몰아치며 몇 리 안을 뒤덮은 모래들을 전부 날려버렸다. 빛이 떨어진 자리에서 깊이가 십 장 정도 되는 커다란 웅덩이가 나타났다.
연나가 손을 흔들어 칠보묘수를 거두어들이고는 앞으로 몸을 날려 깊은 웅덩이 속에 뛰어 들어갔다. 그 뒤로 명라도 함께 들어갔다.
이어서 석목을 비롯한 세 사람도 모두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