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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01화 (601/916)

601화. 폭풍마각

웅덩이에 내려와 보니 바닥엔 모래가 아니라 백옥이 깔려있었다.

백옥 위에는 정교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을 한 참 들여다보던 석목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백옥 위에 새겨진 그림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춘궁도권(春宮圖卷)이었다. 그림들은 매우 생생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으며 얼굴과 귀까지 붉히게 만들었다.

석목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는 뛰어내린 자리가 족히 십 장 정도 되는 조각상의 머리꼭대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속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석목은 한참 동안 조각상을 훑어보았다. 조각상으로 새겨진 건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얼굴은 영롱하고 수려했으며 몸매는 매우 요염했다. 예쁜 선 사이사이로 성숙한 여인의 정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천조각을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온몸으로 마음을 울리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석목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고작 석상일 뿐인데 이 정도로 매력이 있을 줄 몰랐다. 만약 진짜 사람이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들을 쓰러지게 할 게 분명했다.

석목은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던 구십라를 바라보았다. 구십라는 무엇에 취한 눈빛으로 석상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빠진 게 분명했다.

석목이 구십라를 깨우려고 할 때, 전무가 이미 구십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깨우고 있었다.

전무가 장난을 치는 투로 말했다.

“이 자식이, 봉희는 ‘색욕’의 마념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녀보다 용모가 뛰어난 이는 이 세상에 없었지. 네놈이 생긴 걸로 봐선 최소한 성계에 도달해야 봉희가 한번 쳐다볼까말까 하겠구나.”

“전무, 이 뚱보야. 봉희 언니를 두고 뒷말은 그만해. 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야. 보화 언니와도 조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명라는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색욕?

석목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연나가 손에 칠보묘수를 들고서 쭈그려 앉았다.

연나는 칠보묘수에 달린 한 가지로 백옥에 새겨진 춘궁도권을 하나하나 찍었다.

연나가 일곱 번째 백옥을 짚었을 때, 춘궁도권에 새겨진 여자 그림이 한참동안 흔들리더니 살아나며 백옥 위에 서 있었다.

연나는 다급하게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칠색 빛이 날아가며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를 감쌌다.

작은 그림자가 빠르게 자라나더니 평범한 사람만큼 커졌다.

“봉희 언니……”

명라는 감정이 격해져서 봉희를 불렀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다. 이 여인은 그림과 똑같이 생겼고, 다만 기색이 많이 어두워져 허약해 보였다.

“명라, 이 먹보야…… 보화 성주님, 드디어 오셨군요……”

그림자가 내는 목소리는 매우 낮고도 약했다.

“봉희, 내가 늦었구나.”

연나가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저를 봉인시켜 버린 이유는 꼭 돌아오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제 기다림이 끝을 맺는군요.”

봉희가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봉희가 한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봉희의 두개골에서 보랏빛이 날아 나와 순식간에 칠보묘수의 또 다른 가지로 스며들었다. 가지가 밝아졌다.

“그렇게 다급하게 마념을 시전할 필요는 없다…… 양혼로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면 내가 곧 네 육신을 다시 빚어주마.”

연나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허허, 그럼 꼭 예전보다 예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씀을 따르기 어렵겠습니다.”

그림자가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그래. 그렇게 해주마!”

연나가 가볍게 답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보라색 동로가 나타나 그림자를 거두어들였다.

“봉희 언니는 괜찮은 건가요?”

명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연나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봉희는 자신의 신혼을 완전히 봉인시켜서 계속 의식이 없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신혼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근본은 다치지 않았지.”

연나가 하는 말을 들은 명라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보화 성주님, 이제 구려와 구망, 두 부족을 찾으러 갈 것인가요?”

전무가 망설이며 물었다.

“맞다. 혹시 두 부족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느냐?”

연나가 물었다.

“얼마 전에 사람을 보냈는데 지금 막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두 부족의 성계 강자와 뛰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주요 행성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마 지철(地哲)과 치별(蚩別)을 따라서 고만족의 신경 강자 두 명과 함께 폭풍마각으로 간 것 같습니다.”

전무가 말했다.

“폭풍마각, 거긴 명옥성이 아닌가? 그들이 왜 그곳으로 가는 걸까?”

명라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너, 명옥성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연나가 물었다.

“네. 언니, 예전에 갔었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명라가 웃으며 말했다.

“보화 성주님, 걱정스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구려와 구망 두 부족은 우리 상웅 부족과 다릅니다. 저는 반항을 하는 게 귀찮아서 고만족 놈들에게 복종을 한 것이지만 지철과 치별 이 두 놈은 일부러 천정에 다가간 녀석들입니다.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전무가 잠깐 망설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연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전해들은 소식에 의하면 폭풍마각이라는 곳에 구려와 구망, 이 두 부족의 마존을 포함해서 신경 강자가 모두 네 명이나 있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석무애와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지원을 요청을 하는 게 어때?”

석목이 제안을 했다.

“석목 오라버니가 한 말이 일리가 있어요. 그 두 자식을 불러들이죠.”

명라가 말했다.

“그래, 전무, 구십라와 미양 성역에 한번 다녀와. 가서 석무애와 운리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편이 좋겠어.”

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일은 저에게 맡기시죠.”

전무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전 뚱보, 제발 꾸물거리지 좀 말고서 빨리 갔다가 빨리 와!”

명라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잔소리는!”

전무는 명라를 한번 째려보고는 구십라를 데리고서 자리를 떠났다.

“지원군이 오면 다시 폭풍마각으로 갈 거야?”

석목이 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나에게 물었다.

“아니, 시간이 많지 않아. 우리가 먼저 가야해.”

연나가 말했다.

* * *

이틀 뒤의 명옥성의 북우해(北隅海).

망망대해에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으며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았고, 주변 수십 리는 마기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마기 안개 밖 바다 위에는 커다란 악어가 파도를 가르며 빠르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연나는 혼자서 악어의 등 가장 앞쪽에 서서 눈에 빛을 번쩍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석목과 명라는 나란히 연나의 뒤에 앉아있었다. 명라는 손에 하얀색 주머니를 하나 들고서 계속 고기 덩어리를 주섬주섬 꺼내 입으로 집어넣었다.

“명라, 여기가 폭풍마각이라고?”

석목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마기 안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외곽이에요. 진정한 폭풍마각은 마기 안개 가운데에 있지요.”

명라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한 번 빨고는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목은 눈에서 금빛이 번지며 명라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기 안개 밖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기가 점점 짙어졌다. 또한 안에서 은은한 빛이 번지는 것 같았다.

“안쪽 마기가 매우 짙어. 암류가 들끓는 것처럼 유난히 강렬해.”

석목이 시선을 거두어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석목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쓰시는 영목신통은 꽤 괜찮군요! 이 바다는 명옥성에 있는 세 대륙 가운데에 끼어있다고 해요. 성역에 있는 모든 마기들 중에 십분의 일이 여기에 모여 있어서 폭풍마각이라고 하더군요. 마기가 워낙 격하게 용솟음쳐서 커다란 폭풍을 하나 만들었다죠.”

명라가 웃으면서 씹고 있던 육포를 삼키며 말했다.

“그렇군.”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과 명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검은 악어는 이미 빠르게 마기 안개가 둘러싸인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들어가자, 석목의 가슴 앞에 새겨진 검은색 문양이 한 줄기 빛을 반짝이며 마기에 침습되지 않도록 석목을 보호했다.

연나는 여전히 가장 앞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며 명라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기 안개 사이에서 대략 반시진 정도 날자 바다 위에서 용솟음을 치던 마기가 점점 격렬해졌다. 석목은 귓가에 부는 바람 소리가 점점 커지며 속에 묵직한 번개 소리가 섞여있는 걸 느꼈다.

“곧 중심 구역이에요.”

명라는 언제인지 모르게 하얀 주머니를 거두어들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우우……”

세 사람이 밟고 있던 검은 악어가 견디지 못하는 듯이 낮게 울부짖었다.

명라는 마지막 육포를 삼키고는 작은 손을 뻗어서 악어 등을 가볍게 몇 번 두드려주며 안정을 시켰다.

“악어야, 악어야, 무서워하지 마. 언니가 지켜줄게.”

석목은 모습이 어린 신경 강자가 흉악한 짐승을 향해 이런 말을 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악어는 정말로 울부짖는걸 멈추며 다시 차분해졌다.

이어서 명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몸에 검은빛을 드리우며 두 손으로 법결을 줄줄이 시전하였다. 그러자 검은색 거대한 광막이 나타나서 세 사람과 악어를 감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은 멈칫하더니 가만히 있었다.

이때, 앞쪽 바다에서 ‘우르릉!’ 소리와 함께 하늘이 흔들릴 만큼 큰소리가 울려 퍼졌고, 뚜렷한 번개가 마기 안개 속에서 터졌다.

석목은 깜짝 놀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쪽에 드리운 마기가 미친 듯이 용솟음치며 커다란 마기 소용돌이를 하나 만들어냈고, 굵은 용이 몸을 꿈틀거리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소용돌이 주변에는 마기의 힘으로 인하여 하얀 물회오리가 수백 갈래 꿈틀거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뾰족한 창 수백 갈래처럼 하늘을 찔렀다.

“석 오라버니. 똑바로 앉으세요!”

명라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명라가 말을 마치자, 검은 악어가 꼬리를 흔들며 잽싸게 물회오리 사이를 뚫고서 단번에 마기 안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악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거센 힘에 이끌려 위로 날아갔다.

검은 악어는 세 사람을 태우고서 마기 소용돌이를 따라 단단한 마기 속을 뚫으며 빠르게 허공으로 올라갔다.

‘퍽!’

하얀 번개가 단번에 검은색 광막을 뚫었고, 검은 악어는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다행히 두르고 있던 광막이 매우 단단했던 덕분에 번개가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았다.

“아울……”

검은색 악어가 포효를 하며 굵고 튼실한 네 발을 미친 듯이 흔들자 몸이 마기 소용돌이에서 더욱 바르게 솟아올랐다.

커다란 악어가 백 장 정도 올라가서 단번에 허공에 드리운 먹구름을 뚫더니 ‘훅!’ 소리를 내며 고공에서 떨어졌다.

풍덩!

석목 일행을 태운 검은 악어는 바다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 * *

악어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마기 소용돌이를 벗어나 마기가 하나도 없는 폭풍마각 가운데에 도착했다.

밖에서 휘몰아치던 광풍, 폭우와 달리 가운데는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놈들은 아마 이 마각도에 있을 거예요.”

명라가 천리 밖에 뜬 작은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그럼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자.”

연나가 말했다.

그리고 연나가 칠보묘수를 휙 흔들자 허공에 칠색 빛이 나타났다. 석목과 연나가 단번에 칠색 빛 속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사라져버렸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명라는 대범하게 앉아서 다시 큰 육포를 하나 꺼내 들고는 입안에 넣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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