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일곤멸신 (2)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석목을 보자 불안해진 지철이 이제 막 치별에게 조심하라고 일침을 놓으려 할 때였다. 석목은 몸에서 금빛을 뿜으며 금색 갑옷을 드러냈고, 석목 주변에 금색 비늘이 자라나며 기운이 몇 배나 더 커졌다.
“이건…… 금룡쇄금갑! 저 자식 백원왕과 무슨 사이야?”
지철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 치별도 석목이 입은 금색 갑옷에 시선이 향했다. 심지어 석목의 달라지는 기운까지 뚜렷이 전해졌지만 치별은 피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화를 푸는 게 시급했다.
치별이 두 팔을 앞으로 겹쳐 들자 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치별이 만들어낸 쇠발 끝에서는 검은색 소용돌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뭉치며 점점 단단해지고 깊어졌다.
순간, 소용돌이 깊숙한 곳에서 붉은빛이 나타나더니 화려한 꽃처럼 피어나 소용돌이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네 이놈, 죽어라!”
치별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몸에서는 마문이 번쩍였으며 몸 앞으로 끌어온 두 팔을 활짝 폈다가 다시 앞으로 휘둘렀다.
핏빛 소용돌이가 폭발하듯 날아가 허공에서 점점 더 불어나며 크기가 백 장이나 되는 핏빛 해골로 변했고, 해골은 짙은 기운을 풍기며 입을 크게 벌리면서 석목을 삼키려 들었다.
석목이 금빛이 흐르는 두 눈으로 해골을 바라보니 핏빛 해골의 입안에 붉은 소용돌이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용돌이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흘러나와서 주변 공기를 검은색 균열을 만들며 줄줄이 찢어버렸다.
석목은 두 날개를 빠르게 펄럭였지만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몸통이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휙!’하고 해골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명라는 얼굴을 찌푸렸고, 초조한 표정으로 허공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망설이기 시작했다.
“꽤나 대단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철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지철이 말을 끝내는 사이, 핏빛 해골에서 금빛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와 점점 커지며 석목이 빛 속에 나타났다.
석목은 한 손에 여의빈철곤을 들었으며 다른 한 손에는 금색 곤초를 잡고 있었다. 순간, ‘탱!’하는 소리와 함께 빈철곤이 곤초에서 뽑혀 나왔다.
그러자 금빛이 순식간에 수만 갈래 튀어나와 하늘에 떠있던 먹구름까지 금빛으로 물들였다. 방대한 기운이 석목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감겨나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철과 치별, 그리고 명라마저 깜짝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펑!
핏빛 해골이 터져버리며 석목이 빠르게 날아오더니 여의빈철곤에서 금빛을 번쩍였고, 곤봉이 백 배나 자라나서 하늘을 찌르는 커다란 기둥으로 변한 채 치별을 짓누르려고 했다.
치별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경 강자인 치별이 이렇게 쉽게 포기를 할 리 없었다. 치별은 입에서 혼까지 빠져나올 것만 같은 소리를 터뜨렸다. 이어 쇠발 두 쪽에서 붉은빛이 더욱 강력하게 뿜어나왔고, 두 다리를 맹렬하게 휘둘렀다. 쇠발에서 핏빛 기둥 두 개가 뿜어져 나와 치별을 짓누르려는 빈철곤을 받아쳤다.
쾅, 쾅!
하지만 결국 핏빛 기둥은 금빛 기둥에 짓눌린 채 부러져 버렸고, 핏빛 기둥이 다시 여러 토막으로 갈라졌다.
이어서 여의빈철곤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단번에 치별의 몸을 짓누르며 뭉개버리자 치별의 몸이 마혼과 함께 찢어졌다!
여의빈철곤은 그 자체로 등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기곤초가 오랜 세월 동안 모은 힘을 불어넣은 덕분에 힘을 조금만 써도 최상급 법보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치별의 수련 경지가 더 이상 신경 초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경이었더라면 석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을 터였다. 연나가 강제로 치별에게서 마원을 뽑아버려 수련 경지가 크게 떨어졌다. 거기다가 석목이라는 천위 무인을 너무 가볍게 여긴 탓에 단 한 방에 무너져 버렸다.
금빛이 사라지며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도마령을 들고서 가볍게 흔들며 치별의 찢어진 마혼을 전부 도마령 속에 담았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지철은 바다 위에 서서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먼 곳에 서 있던 명라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명라는 작은 얼굴에 어렸던 놀라움이 기쁨으로 바뀌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될 것 같았어. 보화 언니의 은인이면서 언니가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절대 평범할 리 없잖아?”
처음에는 석목이 연나에게 은인이라 하여서 명라는 석목을 공손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이제는 석목이 갖춘 용기와 뛰어난 전략을 보고서는 석목을 향한 존경심이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났다.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석목과 가까이 있던 마각도 가운데 허공에서 빛이 백여 갈래나 밝아졌다. 빛들은 전부 해안가로 날아와서 지철 옆에 멈추더니 빛을 거두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들은 키가 열 장이나 되는 고만족 사나이들 수십 명이었다. 고만족 뒤에는 흑마족 수십 명이 기세등등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의 동공이 줄어들더니 심각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려운 기색은 조금도 읽어낼 수 없었고, 그는 다시 여의빈철곤을 천기곤초에 끼워 넣었다.
“비부는 왜 안 왔어?”
지철은 고만족의 신경 강자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비부 어르신은 중요한 일이 생겨 올 수가 없었다.”
얼굴에 짐승 무늬를 가득 그린 고만족 우두머리가 지철을 한 번 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기랄!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보화 성조라고! 곤륜의 지존이야!”
지철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성조? 내 눈에는 왜 안 보이지? 어이구, 꼴에 신경 마존이면서 고작 계집애한테 얻어터져서는 경지까지 떨어졌나? 이제 우리 고만족 용사들에게 맡기지. 아, 무서우면 너희 흑마족은 저기 한쪽에 가서 숨어있고.”
고만족 사나이가 지철을 한 번 흘겨보며 내키지 않은 듯이 말했다.
“곽파(霍巴) 수령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 고만족이 알아서 해보게!”
지철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잠시 후에 저 여자를 끌어내릴 테니 너희는 옆에서 돕기나 해라!”
곽파는 지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등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네!”
곽파의 등 뒤에는 고만족이 칠팔십 명이나 서 있었다. 고만족의 우두머리인 곽파가 명령을 내리자 고만족들은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고, 고만족들은 토템을 전부 밝혔으며 흉악한 맹수들의 허영이 줄줄이 나타났다가 한 번씩 번쩍이면서 다시 고만족들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만족들이 풍기는 기운이 점점 하늘로 치솟았다.
고만족들 중에는 성계 강자가 스무 명이 넘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천위 후기에서 정상 수준이었는데 고만족에서도 나름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곽파는 몸에서 빛을 한참 번쩍였다가 푸른색 갑옷을 불러냈다. 그리고 각진 머리를 앞쪽으로 쭉 뻗었고, 코끝에선 날카로운 흰 뼈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풍기는 기운도 성계 후기에 달했다.
“지철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아, 치별 어르신은요?”
흑마족 성계 강자 한 명이 지철에게 날아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치별은 기습을 당하여 운명했다. 나도 상처를 입었고.”
지철이 말했다.
“네? 치…… 치별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니요? 혹시 보화 성주 어르신께서 공격을 하신 겁니까? 그럼…… 우리는 정말로 도와주지 않고서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을 겁니까?”
“우선 이 미련한 놈들 하는 짓을 보자. 우리는 기회를 봐서 움직이면 된다.”
지철은 실눈을 뜬 채 허공에 떠있는 고만족들을 쳐다봤다가 다시 먼 곳을 보며 말했다.
곽파를 비롯한 고만족들은 토템 변신을 끝내자마자 명라를 덮치려고 했다. 이때, 허공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고만족 도우 여러분, 다급하게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고만족 무리는 전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다름 아닌 석목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석목은 고만족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기운을 숨겨버렸고, 지철도 일부러 치별이 단 한 수만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만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석목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성계 강자 고만족들의 눈에 천위 정상인 인족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자식이! 혼자서 우리 고만족 용사들을 막으시겠다?”
곽파는 눈앞에 선 ‘꼬마’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곽파 어르신, 이놈이랑 시간을 끄실 필요 따윈 없습니다. 빨리 해치웁시다!”
곽파의 뒤에 서 있던 고만족 사나이가 말했다.
“후후, 나는 혼자가 아닌데?”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이어서 석목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검은 돌처럼 생긴 각진 무언가가 손에서 빠져나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취선대였다!
취선대는 빛을 반짝이며 검은 기운이 맴돌았고, 취선대에서 어두운 금빛 무늬가 줄줄이 밝아졌다.
검은색 안개가 취선대에서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지름이 십 장이나 되는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가 완벽히 드리우자 가장 먼저 흘러나온 건 죽음의 기운이었다. 그 다음으로 검은 수정처럼 맑은 해골 무사가 튀어나왔다.
해골 무사 뒤에서 키가 훤칠한 고만족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저…… 찰고? 소환술이다!”
곽파는 찰고의 시체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찰고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찰고의 텅텅 비어있는 두 눈에서 금색 혼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며 온몸에선 짙은 사령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찰고는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단 한 걸음도 저곳에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석목은 차가운 눈빛을 내비치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이 자식, 혼사였군. 이건 천정에서 정한 금기야! 죽여 버려라!”
곽파는 깨져버릴 것 같은 동공을 드러내며 손에 길이가 십여 장인 검은 낭아봉을 힘껏 쥔 채 휘두르며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곽파 뒤에 서 있던 고만족 강자들 열 몇 명도 전부 무기를 꺼내 들며 석목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이때, 검은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번쩍이며 사람 또는 요족인 천위 경지 강시들이 백 구가 넘게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너덜너덜해진 보라색 도포를 입은 시체도 몇 구나 있었다.
강시들 뒤로는 썩은 짐승들의 백골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성계에 가까운 방대한 기운을 내뿜는 시체들도 적잖이 있었다.
곽파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검은 낭아봉을 허공에 치켜들고서 한참 동안 휘둘렀다. 십 장이 넘는 검은빛이 낭아봉에서 뿜어져 나와 빠른 속도로 검은색 소용돌이를 후려쳤다.
검은빛은 파죽지세로 몰려와 이제 막 소용돌이를 비집고 나온 천위 경지 백골 짐승들을 열 몇 마리나 부숴버렸다. 백골 짐승들은 하나 같이 몸집이 거대했지만, 날아온 빛은 속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소용돌이가 마구 흔들리며 검은빛이 터져버렸고, 소용돌이가 한참 동안 흔들렸지만 기운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이어서 소용돌이는 끊임없는 해골들을 토해냈다. 족히 숫자가 수천, 수만은 되는 해골들이 촘촘하게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이 사령들 중에 수련 경지가 가장 낮은 해골들은 고작 선천이었지만 방대한 해골 대군이 몰려오자 고만족의 강자마저 발걸음을 멈춰버렸다.
“안 돼! 저놈은 시간을 끌려는 계획이야. 다 같이 덤벼!”
지철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뒤에 서 있는 흑마족 수십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지철이 내린 지시를 따라 흑마족들도 전부 몸을 날려 고만족 대열에 합류했고, 그중에는 성계 강자가 열 몇 명이나 있었다.
“보잘것없는 찌꺼기들이니 전부 죽여 버려!”
곽파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