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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10화 (610/916)

610화. 잠깐만요

석목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빛이 갑자기 크게 번지며 시선을 가로막았다.

시야가 다시 돌아오면서 눈앞의 광경이 점점 뚜렷해졌다. 석목은 이미 망망한 성해에 도착하였다.

석목은 눈에 금빛을 흘리며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미 미양 성역에 돌아왔다. 여긴 흑마족이 머무는 거점인 부공성의 허공이었다.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며 마기가 용솟음쳤는데 거긴 공간통로였다.

하지만 원래 그 주변에서 순찰을 돌던 흑마족 문지기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통로를 감싸고 있던 둥그런 광막도 사라지고 없었다.

석목은 신식을 보내서 훑어보았다. 부공성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아무도 없는 빈 성으로 변해버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석무애와 운리가 이끌던 두 부대는 고만족이 침입하는 걸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공간통로를 통해 미양 성역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일이 해결되었으니 미양 성역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삼대 성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오랫동안 삼대 성지를 괴롭혔던 흑마족이 철수했다.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깔끔하게 철수했으니 삼대 성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나?

석목은 공간통로를 한참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영우비차를 불러 부공성에서 떠났다.

* * *

사흘 뒤.

부석 성해 속에서 주둔을 하던 삼대 성지 사람들은 흑마족이 어떤 꿍꿍이를 숨긴 게 아니라 정말로 미양 성역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흑마족이 침범했던 행성들뿐만 아니라 흑마족이 주둔했던 거점들과 부공성에서도 흑마족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마령을 받고 이제 막 전방으로 와서 흑마족을 죽여 공훈을 따내려던 제자들은 오히려 매우 실망했다.

물론 삼대 성지에 속한 높은 사람들도 이 상황이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기분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부공성 보루에 자리한 한 대전, 삼대 성지의 성계 강자 열 몇 명은 그곳에 모여 있었다.

삼대 성지의 성계 장로들은 각각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싸늘하고도 긴장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참이 흘렀는데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여러분, 이번에 흑마족이 갑작스레 철수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란성지의 한 성계 후기 노인이 마른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청수(青須) 도우님께서 견식이 가장 뛰어나지 않습니까? 먼저 의견을 말해보십시오.”

축운검파의 얼굴이 검은 사나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나이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자 청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얼굴에 서리가 앉은 것 같았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흑마족에 관한 일을 논의하러 왔습니다. 다른 감정들은 잠시 접어두십시오. 흑마족은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사이에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꼭 신중해야 합니다.”

이진종의 얼굴이 붉은 남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수련을 한 경지는 성계 정상으로 대전에서 가장 실력이 강했다.

얼굴이 붉은 남자가 말을 하자 축운검파의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콧방귀를 뀌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葛) 도우님께서 한 말씀이 옳습니다. 흑마족이 갑자기 철수한 걸 보면 또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종문에서 파견을 보내 여기 온 것이니 전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다들 사사로운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서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축운검파의 하얀 피풍의를 입은 여인이 말했다.

“운 도우님, 혹시 좋은 견해라도 있습니까?”

이진종에서 온 중년이 그녀에게 물었다.

하얀 피풍의를 두른 여인은 잠깐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흑마족은 부석 성해를 떠났습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부공성을 되찾아 거기 있는 공간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계속 사람들을 주둔시켜서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시시각각 지켜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운 도우라는 여인이 말하자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운 도우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둔을 할 사람들을 계속 지금처럼 삼대 성지가 힘을 합쳐 있을 건지 아니면……”

얼굴이 붉은 중년이 말했다.

장로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콜록! 제 생각에는 삼대 성지가 돌아가며 사람을 주둔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청란성지에서 온 청수가 기침을 한번 하며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공간 통로만 제대로 막고서 항상 사람들이 지키고 있기만 한다면 그만이니 삼대 성지가 모두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얼굴이 붉은 중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삼대 성지는 관계가 악화되면서 각 성지의 고위층들이 마음을 맞추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흑마족이 압박을 주어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쳤지만 이제 흑마족이 물러났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서로 얼굴을 붉히며 부공성에 같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축운검파에서 가장 먼저 부공성을 지키겠습니다. 십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주둔하도록 정하지요.”

하얀 피풍의를 입은 여인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청수와 얼굴이 붉은 중년도 동의했다.

* * *

며칠 뒤, 청란성지의 만법각 광장.

드넓은 광장에는 십 장 정도 되는 청석대가 하나 있었는데 청석대 뒤로 커다란 옥벽이 하나 서 있었다. 옥벽에는 금빛을 반짝이는 작은 글씨가 줄줄이 새겨져 있었다.

옥벽 가장 높은 곳에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도마방(屠魔榜)’

조극의 이름이 가장 위에 자리한 첫 번째 줄에 새겨져 있었다. 이름 뒤에 쓰인 글씨는 이러했다.

“흑마족 성계 네 명, 천위 백구십칠 명을 살해하여 현령점 총 십오만 육천삼백 점 포상.”

조극 뒤에는 두 번째로 많은 현령점을 받은 제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사만삼천육백 점으로 조극과 많은 차이가 났다.

이 시각, 청석대 아래에는 사람들 천여 명이 고개를 들어 청석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석대 위에는 용 그림이 새겨져 있는 자단 나무로 만든 의자가 세 개 있었는데 그 위에 성계 강자 세 명이 기운을 풍기며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중 한 명은 장검을 등에 꽂고서 파란 옷을 입었으며 반듯하고도 위엄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었는데 그는 청란성지 계율당의 악 호법이었다.

악 호법의 왼쪽에는 용모가 뛰어나며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얇은 궁장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물에 핀 연꽃처럼 수려했다. ‘연꽃 선자’라는 이름과 너무 맞물리는 외모였다.

악 호법의 오른쪽에는 금색 피풍의를 두른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화려한 피풍의에 용무늬가 수놓아져 있었으며 얼굴은 핼쑥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 노인은 바로 부석 성해에게서 청란성지의 제자를 이끌며 흑마족들을 물리치는 일을 도맡았던 관산해 장로였다.

세 사람은 조용히 앉아있을 뿐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물처럼 잔잔한 눈으로 앞쪽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만 년 제자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세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청석대 앞으로 다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족이 패배를 인정하고 완전히 철수했다. 도마령 임무도 이제 집계를 마칠 예정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혹시 임무에 참여했는데 아직 영패를 반납하지 않은 제자가 있는가?”

청석대 아래는 다시 시끌벅적해졌지만 아무도 청석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일등은 또 조극이겠구나.”

석대의 아래에서 이마에 뾰족한 뿔이 자라난 요족 남자가 옆에 서 있던 하얀 털이 수북한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하얀 옥벽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임무의 승자는 별도로 삼십만 현령점을 포상으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주께서 직접 지도를 해주신대. 무려 미양 성역의 삼대 신경 강자 중에 한 명인 성주께서 친히. 너무 부럽다!”

“그런데 조극은 애당초 성주님의 직전제자잖아. 그럴 기회가 많았을 텐데 직접 지도를 받을 기회를 조극에게 주는 건 그 기회를 그냥 버리는 셈이나 다름이 없는 거야. 그냥 이 등에게 주지.”

요족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요족 남자의 옆에 있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작년에 내가 장로님을 따라 밖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갔을 때 장로님께 들은 말이 있어. 속승 성주님은 오랫동안 폐관수련을 하시느라 바쁘다 하시더라고. 간혹 밖으로 나가는 일도 있긴 하지만, 조극을 가르치는 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어. 조극은 그동안 성주의 직전제자라는 명분만 챙겼지 실속은 전혀 없었다니까.”

두 사람이 말을 떨어뜨리자, 청석대에 서 있던 만 년 제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오시(午時)가 곧 다가온다. 보아하니 도마령을 전부 바친 것 같구나. 그럼 이번 임무의 일 등은 조극이다.”

청석대에 있던 사람들은 만 년 제자가 하는 말을 듣더니 전부 부러운 표정으로 감탄하며 조극을 바라보았다.

물론 질투를 품은 잡담도 섞여 있었다.

조극은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담담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청석대 왼쪽에 있는 돌계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극이 막 계단을 밟으려고 할 때, 왼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만요. 저의 도마령은 아직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매우 차분했다.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 광장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조극은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조극은 움직이길 멈추고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석목이 몸에 빛을 반짝이며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석목이 나타나자 석대 아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석목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저 사람은 누구지?”

사람들이 의문스럽다는 말을 내뱉었다.

조극과 달리 석목은 매우 낮은 자세를 취하며 행동했기 때문에 적잖은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석목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저 사람을 기억하는데, 누구였지…… 석목?”

한 요족 청년이 확실하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때 환마도를 뚫고서 천 년 제자가 된 석목?”

누군가 물었다.

“맞아, 실력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

“그럼 뭐해. 조극도 앞서서 천 년 제자가 되었잖아. 저놈이 이제 나타나는 꼴을 보니 혹시 조극을 이길 자신이 있어서 저러는 건가?”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

“후후, 하여튼 재미있겠군!”

청석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석목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에는 온통 비웃음이 어렸다.

하지만 석목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서 석대 가운데로 걸어갔다.

만 년 제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뒤에 앉아있던 관산해가 ‘턱!’하고 팔걸이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집법 제자는 어디에 있는가? 빨리 저 지시를 따르지 않은 채 모반을 꾸민 제자를 쫓아내라.”

관산해는 엄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관산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관 장로님, 제가 언제 모반을 꾸몄습니까? 그때 장로님께서 저에게 홀로 작전을 수행해도 좋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도마 임무를 수행했던 제자들이 모두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흥, 홀로 작전을 치러? 참전했던 제자들에게 물어봐라. 전방에서 네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는지? 내가 봤을 때, 너는 이미 전장에서 떠나 전혀 다투지 않았다!”

관산해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 관 장로님은 이런 방법으로 제가 참전하지 않았다 판단을 내리시는군요. 그렇다면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전방에서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오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는데 제 도마령을 반납해도 되겠습니까?”

석목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반납할 필요도 없다. 혹시 조극 사질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 따위 녀석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관산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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