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모두가 놀라다
관산해가 말을 떨어뜨리자 사람들은 또다시 의논을 나누기 시작했다. 관산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쪽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악 호법이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관 장로님, 석목은 도마령 임무에 참석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영패를 올리는 게 도리에 맞습니다. 우선 영패를 받아보고서 다시 말합시다.”
연꽃 선자도 일어서서는 아름다운 눈빛으로 석목을 한번 훑어보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관 사형, 사매도 저 제자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던 관산해는 더 이상 말할 명분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만 년 제자는 곧바로 앞으로 다가와 석목의 도마령을 받아서 다시 옥벽 앞으로 다가갔다.
만년 제자가 손가락으로 도마령을 짚자 검은빛 한 줄기가 영패에서 튀어나와 옥벽에 스며들었다.
옥벽에 비치던 빛이 희미해지더니 조극의 이름 위에 순식간에 금색이 한 줄 나타났다.
“석목, 흑마족 신경 두 명, 성계 일곱 명, 천위 이백십삼 명을 살해하여 현령점 총 삼십팔만 구천사백 점 포상.”
“신경?”
작은 글씨가 나타나자 광장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가 곧바로 끓는 물처럼 들끓었다. 그리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놀라움, 감탄, 의심, 심지어 욕설까지 광장에서 울려 퍼졌다.
조극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두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을 바라보는 조극은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석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조극과 눈을 마주쳤다. 석목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조극을 농락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
관산해는 얼굴이 어두워져 큰소리를 질렀다. 강력한 영압이 광장에서 흘러나와 석대 밑에 있던 제자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어 관산해는 다시 석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관산해는 화를 내지 않고서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후후, 석목, 네가 지금 우리를 바보로 알고서 장난을 치는 건가?”
“석목, 어떻게 된 일인가?”
악 호법이 엄숙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악 호법님, 더 이상 물어볼 게 있겠습니까? 이놈이 도마령에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는 말도 안 됩니다.”
관산해가 화를 내며 말했다.
“관 장로님, 고작 제자가 갖춘 실력으로 성지의 장로님이 특별히 제작한 도마령에 수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번 임무에서 아무나 다 자기 영패에 수작을 부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석목은 일부러 조극을 한 번 쳐다보며 마치 빗대어 말을 하는 듯이 물었다.
석목이 하는 말을 듣던 관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얼굴만 붉혔다.
악 호법은 손을 흔들어 만 년 제자가 손에 들고 있던 영패를 가져와서는 눈을 감고서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석목을 한번 쳐다보며 물었다.
“영패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안에 설치한 금제를 강제로 건드리면 곧바로 사라질 테지. 석목, 사실대로 말하거라. 너는 어떻게 흑마족 신경 강자들을 죽일 수 있었지?”
“장로님께 보고합니다. 제자가 홀몸으로 부석 성해의 변두리에서 적들을 순찰하려고 했으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석 성해에서도 깊은 곳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흑마족 신경 강자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강자는 사흘 밤낮을 싸우더니 둘 다 처참하게 상처를 입어서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게도 이런 기회를 만났습니다.”
석목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엄하도다! 어디서 거짓말을 지껄이는 게냐.”
관산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비록 이해를 하실 수 없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 같은 천위 제자가 어떻게 신경 강자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악 호법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제 도마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기록이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악 호법이 미간을 찌푸리며 석목을 바라보더니 마치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물었다.
“흑마족이 갑자기 미양 성역에서 물러난 이유가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이제 막 성지에 돌아왔습니다.”
석목은 멈칫하며 대답했다.
“이 일은 큰일이니 성주님께 보고를 해야합니다.”
악 호법이 한참 동안 침묵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관산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놈이 지어낸 거짓말일 뿐인데 지금 믿고 계신 겁니까? 이런 일을 성주님께 보고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석목이 말한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성주님께서 알아서 잘 판단하실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일을 보고하지 않아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악 호법이 말했다.
관산해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광장 하늘에서 하얀빛이 번쩍이며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악 호법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우르르 일어서서 인사를 올렸다.
“성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어, 광장에 있던 제자 수천 명도 전부 인사를 올렸다.
하얀빛 속에 있던 허영이 입을 열었다.
“석목의 도마령엔 문제가 없다.”
이어서 허영은 곧바로 옷자락을 날려 석목을 감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광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광장에 있던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전부 자리에서 일어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청석대 위에 있는 성계 강자 세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혼자 서 있는 조극을 바라봤다.
조극은 청란성지 성주의 허영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눈에 사나운 빛을 드러냈다. 그리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먼 곳으로 가버렸다.
* * *
석목은 속승 진인에게 붙들려가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았다. 석목이 다시 제대로 섰을 때는 이미 푸르고도 깊은 연못 옆에 떨어져 있었다.
연못은 산과 가까이에 있었으며 높이가 백 장이나 되는 폭포가 쏟아져 연못으로 떨어졌다.
암벽에서 튀어나온 돌들과 물이 부딪치며 반짝이는 은방울을 주변에 흩날렸다.
연못에는 물안개가 자욱했는데 햇살이 쏟아지자 눈부신 무지개로 변하였다. 무지개는 마치 산들을 이어놓은 것만 같았다.
폭포 아래 깊은 연못에는 커다란 청석이 하나 있었다. 청석 옆에 선 비스듬히 구부러진 소나무가 때마침 그림자를 청석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석목은 청석 위에 서서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소나무 아래엔 눈썹이 하얀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그 눈썹을 허리까지 드리웠다. 노인은 차분한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눈은 마치 석목의 옆에 있는 연못처럼 깊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던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은 바로 꿈속에서 백원왕에게 공법을 전수하며 백원왕에게 수행 방법을 가르치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다시 살펴보니 석목의 꿈에 나타났던 노인과 또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석목이 앞으로 다가가 노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제자 석목, 속승 성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속승 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석목을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바로 그 약간 흔들리는 모습 때문에 석목은 마음을 졸였다. 마치 청란성지의 성주가 석목이 감춘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에 속승 진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구전현공 다섯 번째 단계가 대성에 이르렀구나. 수련을 하며 어려운 점은 없느냐?”
석목은 어안이 벙벙했다. 속승 진인이 가장 먼저 흑마족 신경 강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하여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민을 하던 참인데 흑마족 신경 강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성주님께 보고합니다. 저는 몸에 천수 혈맥이 없어서 소 구전현공만 수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홉 번째 단계까지 수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홉 번째 단계가 대성에 이르면 똑같이 현공을 수련한 자들이 천 년, 만 년 수련을 하며 쌓은 것들이 전부 사라진 후에 대성을 이룬 자를 위해 힘을 보탤 게다. 헌데 만약 천수 혈맥이 없다면 아홉 번째 단계를 대성했을 때 몰려드는 힘을 절대 감당할 수 없단다.”
속승 진인이 답했다.
“성주님께 여쭙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천수 혈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석목은 깜짝 놀라더니 또 물었다.
“천수 혈맥은 상고시대부터 직계 혈족을 통한 혈맥 비술로 대물림이 되는 일을 빼면 다른 방법들은 이미 점점 사라지고 있다. 후천적으로 각성을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
속승 진인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긴 있다는 말씀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석목이 속승 진인이 하는 말을 듣더니 눈을 반짝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천수 혈맥을 가진 자가 대물림으로 이어줄 수 있다. 하지만 혈맥을 물려준다고 해서 전부 그리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것 또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야. 이건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맞물려야만 가능할 일이니 억지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속승 진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자, 알겠습니다.”
속승이 하던 말을 들은 석목은 멈칫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후에 말했다.
“구전현공의 아홉 번째 단계는 수많은 변수와 끝없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는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는 편이 더 좋을 게다.”
속승 진인이 이어서 말했다.
속승 진인이 하는 말엔 마치 깊은 뜻이 담긴 듯했는데 석목은 그 말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되뇌어 보면 또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속승 진인은 석목이 쓰는 명수결과 토템 비술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주었다. 주옥같은 말들은 때마침 석목이 간지럽게 느끼던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주듯이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속승 진인이 계속해서 물었다.
“또 물어볼 게 있는 게냐?”
석목이 멈칫하며 입을 살짝 벌리더니 무엇인가를 물어보려다 결국 삼켜버렸다.
백원왕과 얽힌 일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속승 진인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말하지 않은데다가 처음부터 석목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석목은 질문을 삼켜버렸다.
그리하여 고민을 한 끝에 석목은 더 이상 깊게 물어보지 않기로 결심하며 포권을 쥐고서 대답했다.
“성주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제자, 더는 의문이 없습니다.”
속승 진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살짝 위로 뜨더니 옷자락으로 석목을 감았다. 석목은 주변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다시 만법각 앞에 나타났다.
* * *
이 시각,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해졌으며 광장에 모였던 제자들은 흩어졌다. 몇몇 제자들만 자리에 남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다시 제자들을 바라보니 남아있는 제자들은 낮에 만법각에 있던 제자들이 아니었다.
석목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만법각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석목이 만법각에서 나왔다.
석목이 지닌 현령점은 이미 오십만 점을 넘었다.
석목은 광장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서 먼 곳으로 날아갔다.
속승 진인에게 지도를 받은 후, 수련을 하며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문제들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 석목은 곧바로 수련을 하며 성계로 들어설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석목의 분신도 깊은 수련 과정을 거치며 실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필살기로 쓸 수 있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