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천련지
물론 뚱보 제풍이 동부에서 할 일들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어서 석목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석목은 다시 뒷산에 자리한 비밀 석실로 들어왔다.
석실에 있는 의자에 앉은 석목은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손을 흔들어 최상급 영석을 가득 꺼냈다.
작은 산처럼 쌓인 최상급 영석을 바라보며 석목은 매우 아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석목은 망설이지 않고서 손을 흔들어 여의빈철곤과 천기곤초를 단번에 영석 더미에 꽂아놓았다.
천기곤초는 겉에서 빛을 반짝이더니 금빛이 크게 번졌다. 엄청난 영력이 눈에 띄는 속도로 곤초로 흘러 들어갔다.
잠깐 사이에 영석 더미가 뿜던 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최상급 영석 더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석목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아까워서 마음이 다 쓰라렸다.
총 최상급 영석 이십만 개였다. 조금 전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현령점으로 바꾼 영석들이었다.
석목은 여의빈철곤을 들고서 손으로 가볍게 천기곤초를 매만지며 눈을 감은 채 그 힘을 느꼈다.
잠시 후에 석목은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곤초가 머금고 있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곤초가 자연 속에 흐르는 영력을 빨아들이는 속도를 봤을 때, 이 정도 영력을 담으려면 아마 삼사십 년은 모아야 할 터였다.
석목은 확신이 들었다. 이제 어떠한 위험에 부딪쳐도 천기곤초가 지닌 힘 덕분에 충분히 안전해지리라는 사실을.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석목은 동부를 떠나 전송대전으로 갔다.
* * *
보름 후, 만로성(萬魯星) 천천성(天泉城)의 한 전송대전.
성역 전송진법에서 빛이 반짝이며 검은 피풍의를 입은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주변을 한번 바라보더니 진법에서 걸어 나와 아무 말도 없이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법을 지키던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은 이상한 눈빛으로 중년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만로성은 매우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성역 전송진법이 방치된 지 오래되었다. 그런 진법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피풍의를 입은 중년은 대전에서 걸어 나와 이 외진 성에서 오래 머물지 않으며 푸른색 비차를 불러 먼 곳으로 날아갔다.
검은 피풍의를 입은 중년은 석목이었다. 석목은 번거로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변장을 한 후에 만로성까지 왔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석목은 한숨을 돌렸다.
천천성에서 나온 석목은 용우비차의 고도를 조절하며 성해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행성의 강력한 흡인력을 벗어나 우주로 들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계 이상 실력자만이 할 수 있었다.
석목은 비록 실력이 천위 정상이었지만 실제 실력은 성계 강자들만큼 강력했으며 용우비차라는 법보급 비행 보물을 타고 있어서 성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용우비차는 빠르게 흡인력에서 벗어나 성역에 도착했다.
석목이 반나절 정도 날자, 주변에 노란 성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운석이 날아다녔다.
만로성과 은련성 사이 구역이 그리 평온하지 않다는 사실은 석목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석목은 정신을 가다듬고서 비행을 했다.
성역은 폭풍과 혼돈된 난류로 가득하여 성계 강자라 할지라도 조금만 정신을 팔면 이 망망한 성역에서 부스러기가 되어 남을 터였다.
석목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석목은 부석 성해에서 오랜 시간 머문 덕분에 성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위험한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용우비차도 등급이 올라 혼돈의 힘이 주는 충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석목은 순조롭게 성해를 지나서 커다란 행성으로 향했다.
행성에 자란 울창한 숲 위로 푸른빛이 허공에서 날아 내려와 숲 위에 멈춰 섰다. 빛이 사라지며 용의 머리와 용의 날개가 달린 푸른색 비차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희미해지며 석목이 비차 옆에서 내려오더니 곧바로 비차를 거두어들였다.
“여길 거야.”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신식을 보내 주변을 훑어보았다.
잠시 후에 석목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이 행성은 천지 영기가 매우 짙었다. 초목이 무성했는데 석목이 예상한 바와는 확연히 달랐다.
석목이 놀란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행성에는 곳곳에 하얀 안개가 자욱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행성에 드리운 운무와 달리 여기 드리운 운무는 한곳에 뭉치지 않고서 커다란 구름이 땅 위에 떨어진 듯이 각각 다른 크기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큰 덩어리는 수 백 리, 나아가 수 천리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작은 덩어리는 일 이 십 리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매우 이상했다.
석목은 주변을 몇 번 더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며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서 신식으로 채아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이내 기쁜 기색을 드러내고는 한 쪽으로 날아갔다.
마옥이 한 말이 맞았다. 채아는 지금 이 은련성에 있었다. 하지만 석목과 여전히 거리가 멀어 소식을 전 할 수 없었다.
* * *
석목은 구름을 타고서 앞으로 날아갔고, 잠시 후에 커다란 안개 구역이 석목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쪽 모두 운무로 가득했는데 범위가 만 리나 되는 것 같았다.
이 하얀 안개는 매우 기이해 보였다. 하지만 면적이 워낙 넓어서 안개를 에돌아간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석목은 잠깐 침묵하더니 안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윙윙……
안개 바다에 들어가자 귓가에서 낮은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지며 기이한 힘이 석목의 신혼으로 스며들어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석목은 얼굴을 찡그리며 곧바로 공법을 시전하여 신혼을 보호했다. 기이한 힘의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바람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군. 이 안개 바다에 이런 현묘한 게 있다니.”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갖춘 실력으로는 당연히 바람 소리 따위에 영향을 받을 리 없었다.
안개 바다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차린 후로 석목은 오히려 마음을 놓고서 신식으로 몸과 마음을 보호한 채 속도를 박차며 앞으로 날아갔다.
안개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귓가에 올리는 바람 소리는 점점 더 커졌지만, 여전히 석목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조금 더 앞으로 날아가니 바람 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석목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 안개 바다 가운데를 벗어나서 바람 소리가 약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은 눈앞이 환해지면서 안개 구역을 벗어났다.
“그 이상한 바람 소리는 안개 바다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어. 잠시 후에 채아를 만나게 되면 제대로 거길 뒤져봐야지.”
석목은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순간 석목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그는 두르고 있던 빛을 순식간에 줄이며 아래에 있는 숲으로 숨어 들어가서는 모든 기운을 감추었다.
석목이 이제 막 몸을 숨겼을 때 커다란 먹구름이 앞쪽에서 날아왔다.
검은 구름 속에 칠흑 같은 새가 한 마리 날아다녔는데 그 새는 두 날개가 족히 이삼십 장이나 되었다. 몸에 자라난 깃털들은 마치 검은 철침처럼 딱딱해 보였으며 머리 꼭대기에 자라난 금색 깃털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금색 화염 같았다.
그 새는 강력한 요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이미 성계에 도달한 요수였다.
검은 새가 숲에서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하늘을 반쯤 가려 어두컴컴해졌고, 새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눈에서 의아한 빛이 스쳤다.
멀리서 분명 기이한 기운을 느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은 새는 몇 바퀴 돌더니 숲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는지 곧바로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참 후에 석목이 숲에서 튀어나와 몸에 감은 푸른빛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검은 새가 날아간 곳을 한번 쳐다보고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온몸을 검은 철로 뒤덮고 있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게 금색 화염이라면 아마 전설 속에 나오는 독수리들 중에서도 요수왕인 금염철시(金焰鐵翅) 독수리겠군. 내 소 구전현공의 목화 신통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엔 한계가 있지만 큰 나무 하나로 변신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 다행이었군. 들켜버렸다면 꽤나 골치 아플 뻔했어.”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전각에 있던 전집에 의하면 은련성에는 저런 날렵한 요수들이 수도 없이 서식하고 있다 했는데 그 말이 정말인 것 같았다.
이 요수들은 다른 종족들이 자기 서식지에 나타난 모습을 발견하면 절대 살려 보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다투거나 도망을 치려하면 피치 못하게 소란을 피우게 되어 더 많은 요수들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석목의 실력이라면 짧은 시간 안에 요수 한 마리 정도를 죽이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고작 요수 한 마리 때문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은 절대 상책이 아니었다.
석목은 생각에 잠긴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모든 기운을 전부 숨기고는 신식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비교적 안전하게 나아갔다.
워낙 조심조심 다가간 터라 가는 길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비록 가는 길에 몇몇 요수들과 부딪치기는 했지만, 천위 경지라 들키는 일은 없었다.
* * *
이렇게 한 시진 정도 날아가자 시선 끝에 파란색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파란색은 점점 뚜렷해졌는데 양쪽으로 뻗어나가 있었고, 반딧불이 반짝이는 커다란 호수였다.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선 끝자락에 물 위에 뜬 옅은 안개가 천천히 흐르며 희미하게 호수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석목은 두 눈에 금빛이 흘렀다.
호수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은 전부 연꽃이었다. 분홍색, 붉은색, 금색, 은색…… 다양한 색 연꽃들에 햇살이 쏟아지자 여기저기서 빛이 뿜어나오더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호수 위에 비단결처럼 하늘거리는 새하얀 안개, 부드러운 바람이 청량한 물안개를 감싸며 불어왔다. 오색찬란한 연꽃이 호수를 수놓아 그림 같은 경치가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아마 여기겠군.”
석목이 내려와 호수 변두리에 서서는 주변을 훑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주변 절경은 전집에 적힌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호수가 바로 천련지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색이 영롱한 장소가 은련성의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석목이 다시 심신이 연결되도록 시도를 해봤다. 연결이 훨씬 강력해졌다. 채아는 아마 호수 안쪽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채아가 목숨만 붙었다면 석목은 걱정할 일이 없었다.
석목은 다시 안개를 밟고서 호수 안쪽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이때, 앞쪽 허공에서 파동이 일렁이며 금빛이 드넓게 번졌고,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석목은 어두워진 표정을 짓고는 순식간에 백 장 멀리까지 물러나더니 여의빈철곤을 손에 꺼내 들었다.
앞쪽에서 금빛이 한참 동안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홉 사람이 나타났다. 여덟 사람은 컸고 한 사람은 작았다.
석목의 안색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여덟 사람은 유난히 컸는데 상반신을 드러낸 채 튼튼하게 근육이 자란 고만족이었다. 고만족들은 전부 성계 고수였으며 방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엄연히 성계 중기를 뛰어넘는 강력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석목은 그 여덟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석목은 키가 평범한 청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청년은 비록 아무런 기운도 풍기고 있지 않았지만 고만족 여덟 명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석목은 신식으로 상대를 훑어본 후에 깜짝 놀라며 마음을 졸였다.
청년 신경 강자였는데 석목이 전에 만났던 구봉 신장처럼 신경 초기인 것 같았다.
외모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정도 되어보였으며 매우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입가에 오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양새가 분위기를 흩뜨려 놓았다.
고만족 무리는 부채 모양으로 대열을 이루어 마치 성벽처럼 호수 위에 서서는 석목이 갈 길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누구신가?”
석목은 눈알을 굴리더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천정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석목을 죽이러 왔을까? 그렇다면 천정은 어떻게 석목이 은련성에 오리라는 걸 알게 되었을까? 마씨 가문 사람들이 소문을 흘리기라도 했나?
석목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안색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