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열전
백원왕의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금색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하지만 백원왕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으며 손에든 곤봉으로 금빛 찬란한 풍차를 만들어 산과 같은 곤봉 그림자로 계속해서 앞으로 공격해 나갔다. 곤봉 그림자가 홍수를 이룬 거인들 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자 적잖은 거인들이 큰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거인들은 눈에 핏빛을 머금은 채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백원왕이 무너질 때까지 끊임없이 덮쳤다.
잠깐 사이에 거인들 수십 명이 죽어버렸다.
맹수 같은 거인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하자 백원왕이 두르고 있던 금색 갑옷에도 균열이 줄줄이 나타났고, 찢어진 틈으로 드러난 털 위에는 금색 피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백원왕이 입은 상처에 나무 무늬가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다만 무엇 때문인지 백원왕은 가슴에 뚫린 구멍을 다시 메우지 못해 피가 흘러나오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때 우주에서 맑은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백원왕을 덮치려던 거인들은 호각 소리를 듣더니 양쪽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거인들 사이로 거대한 금색 전함 열 척이 날아 나왔다.
전함 위에는 구름이 깔려 있고 빛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갑옷을 두른 병사와 옷자락이 휘날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함 앞머리에 튀어나온 둥그런 기둥엔 생김새가 기괴한 짐승의 머리들이 붙어 있었고, 짐승들은 전부 입을 크게 벌리고서 눈부신 금빛덩어리를 뿜어냈다.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굵은 금색 기둥 열 몇 갈래가 마치 우주를 가로지르는 금색 창들처럼 검은 하늘에 금색 잔영을 줄줄이 만들며 백원왕을 습격했다.
금색 전함은 미양 성역 삼대 성지에서 운용하는 금색 전함들보다 적어도 열 배는 더 컸으며 터져 나오는 위력도 백 배정도 더 강력했다.
하지만 백원왕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에서 하얀 화염이 타오르는 커다란 주먹을 만들어 그 주먹에 파멸의 기세를 휘감으며 날아오는 금색 창 열 몇 갈래와 부딪쳤다.
우르릉!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많은 금빛이 화염에서 흩어져 성역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석목은 전장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강력한 힘과 진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석목은 다급하게 백원왕을 바라보았고, 백원왕은 노란빛이 흐르는 왼쪽 주먹을 높이 치켜들어 허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쿵!
성해 전체가 흔들렸다. 이어 노란색 광막이 백원왕의 주먹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나머지 거인들과 금색 전함들을 전부 감싸버렸다.
광막 겉에선 커다란 부문들이 들끓으며 두텁고도 단단한 기운을 풍겼다.
백원왕은 몸을 일으켜 세워 왼쪽 주먹을 편 후에 다시 허공을 한번 휘갈겼다. 그러자 광막 안에 들어간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과 금색 전함들은 마치 중력을 잃어버린 듯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적들은 순식간에 혼란해져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백원왕은 다시 한번 왼쪽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떠다니던 전함들과 거인들이 서로 부딪치며 터져버렸다.
우주 속,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금색 전함 열 몇 척에 커다란 균열이 몇 갈래 생겼고, 전함의 파편들이 떨어지며 허공을 떠다녔다.
하지만 백원왕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다시 왼쪽 주먹을 꽉 쥐자 떠다니던 전함의 파편들이 뒤로 날아가 전함의 본체와 거인들을 전부 한곳으로 모아버렸다.
“이건…… 영역, 법칙의 힘.”
여기까지 지켜본 석목은 참지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백원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갈수록 붙어있던 거인들과 전함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에 쥐인 듯 계속해서 압축되었다.
하지만 이때, 석목은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백원왕이 풍기는 기운이 점점 쇠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우주에서 ‘쩍, 쩍!’ 갈라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는데 전함의 본체가 갈라지는 소리인지 거인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도 끊이질 않았고, 금색 갑옷을 두른 병사들은 압력을 견디지 못한 채 터져버렸다.
이 형태가 없는 힘 때문에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과 전함들은 계속해서 일그러지고 줄어들며 곧 전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때, 검은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한 줄기 날아왔는데 금빛을 뒤덮은 희미한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손에 검고 오목한 무기를 하나 쥐고 있었고, 희미한 광막을 향해 손에 들고있던 무기를 ‘휙!’ 그었다.
노란 광막은 겉에 갑자기 검은 균열이 하나 나타나더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고,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과 전함들을 묶어두었던 형태가 없는 힘도 사라져버렸다.
금빛 속에 드리운 그림자는 평범한 사람만 했는데 만약 그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저항을 하는가?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나를 주인으로 모셔!”
금빛 속에 선 그림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하, 제준! 내가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만 않았어도 너와 나중 하나는 이미 죽었을지 모르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대장부는 죽어도 당당하게 죽어야지. 노예로 살아갈 이유는 없다. 빨리 나와 끝장을 보자.”
백원왕이 큰소리로 웃으며 포효했다.
“좋아! 그렇게 죽길 원한다면 내가 허락해주지.”
그림자가 말했다.
그림자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희미한 그 사람에게서 금빛이 폭발하여 몸통이 점점 불어나더니 몸집이 수 만 장까지 불어났다.
순식간에 백원왕과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은 한없이 작아보이게 되었다.
그림자가 손을 흔들자 큰 손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바닥에서 보랏빛이 반짝이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중 길이가 열 장이나 되는 번개 수백 갈래가 마치 보랏빛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백원왕의 머리를 갈라버렸다.
우주에서 굉음이 울러 펴졌고, 허공이 보랏빛과 금빛으로 물들었다.
백원왕은 마치 형태가 없는 영압에 눌린 듯이 몸을 흔들었고, 그는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백원왕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손바닥에 붉은 불빛을 태웠다. 그리고 보라색 번개 폭포를 맞았다.
커다란 손이 하늘에서 굽으며 보라색 번개 폭포를 손으로 잡아버린 후에 힘껏 찢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수많은 보랏빛이 허공에서 터지며 찬란한 빛이 되어 반짝였다.
놀라운 점은 보라색 번개가 찢어진 후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서 다시 뭉쳐 굵은 보라색 사슬 몇 갈래로 변하여 계속 백원왕을 묶었다는 점이었다.
석목은 눈을 똑바로 뜨고서 사슬을 바라보았다. 보라색 사슬은 평범하지 않았고, 부문들이 촘촘하게 가득 새겨진 부적 같았다.
수많은 보라색 부적들이 꿈틀거리며 흘러 나왔는데 마치 뱀처럼 백원왕의 몸을 감고 돌았다. 그리고 부적은 백원왕의 커다란 두 손과 번천곤을 몸 옆에 꽉 묶어놓았다.
부적 사슬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백원왕의 몸을 공격하자 수많은 불꽃이 튀었다.
백원왕은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백원왕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으며 눈에 금빛이 크게 번졌고, 몸 주변에 드리운 빛이 용솟음쳤다. 백원왕의 몸통이 다시 몇 배로 불어났으며 목에서 커다란 머리 두 개가 튀어 나왔다. 그 중 한 개는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다른 한 개는 분노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백원왕은 보라색 번개를 몇 배나 더 늘려버렸다. 이어서 등 뒤에 달린 갈비뼈에 굵직한 팔이 네 개나 더 뻗어 나와서 그를 묶어버리고 있던 사슬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백원왕이 이제 막 자유로이 되었을 때, 금빛을 감고 있던 그림자 주변에서 파동이 일더니 금색 물결이 주변으로 드넓게 퍼지며 우주에 금색 광막을 펼쳤다.
그 광막은 백원왕의 노란빛과 같은 또 다른 영역의 힘이었다!
금빛 그림자가 한 손을 뻗더니 이내 그 손으로 주먹을 쥐자 형태가 없는 힘이 사방팔방에서 다가와 백원왕을 꽁꽁 묶어버렸다. 백원왕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우주에 강력하게 맞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운석이 활활 타오르며 수많은 화염구가 되어 백원왕에게 떨어져 내렸다.
백원왕의 이마 가운데에선 살가죽이 뒤집히며 금빛 찬란한 눈이 하나 더 나타났고, 눈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백 장 범위를 전부 드리웠다.
위력이 담긴 화염구가 금빛을 내리치자 화염구는 마치 흙덩이가 바다 속으로 스며들 듯이 소리 없이 녹아버렸다.
이때, 허공에서 금빛 그림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공영고(時空永錮).”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깜짝 놀라며 우주를 훑어보았고, 금색 광막 속에 든 모든 게 멈춰버려 굳어버린 듯이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심지어 우주에 흐르던 천지 원기가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았고, 이건 시간과 공간을 전부 묶어버리는 이중 금제였다. 그리고 성역을 모두 완전히 봉쇄할 수 있는 힘이었다.
백원왕의 몸과 눈에서 내뿜던 금빛도 한 순간에 전부 묶여버렸다.
금빛을 두른 그림자가 큰 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빛이 반짝이며 붉은빛을 내뿜는 돌덩이가 하나 나타났다.
돌은 모양이 불규칙했으며 위에는 아무런 부문도 찍혀있지 않았지만 심장 모양과 비슷한 돌이 끊임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석목은 그 돌이 매우 기이했다.
“오늘 네게 성핵이 지닌 위력을 맛보여주지.”
금빛 그림자가 말했다.
그림자가 손을 흔들자 붉은빛을 내뿜던 돌이 떠올라 백원왕에게 날아갔다.
이때, 백원왕의 이마에 자라난 눈에서 금빛이 다시 한번 번쩍이더니 시공영고를 벗어났고, 이어 굵은 팔 다섯 개가 한 번에 앞으로 뻗어 나가 몸 앞에서 누런 돌방패를 만들어내며 붉은 빛덩어리를 막아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성핵이 터져버렸다.
방대한 붉은색 파동이 백원왕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성역이 한참 동안 흔들려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주변에 서 있던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과 금색 갑옷을 두른 병사들은 이미 먼 곳까지 물러나 바라만 볼 뿐 다가오지 못했다.
석목은 눈앞이 격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고, 이어서 엄청난 붉은 빛덩어리가 들끓으며 수많은 불빛과 번개가 빛 속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얽히고설키며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백원왕 앞에 있던 노란색 돌방패가 불빛이 터지는 순간 찢어져 버리며 모든 파편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소용돌이의 일부가 되었다.
동시에 소용돌이 주변에서 떠다니던 전함의 파편들과 운석의 파편들도 흡인력에 따라 삼켜졌다.
삼키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붉은 소용돌이는 점점 더 커졌으며 점점 더 강력해졌다.
“제준, 오직 네 이익만을 취하기 위해 세상을 뒤엎으며 성역의 백성들이 죽고 사는 건 쳐다보지도 않다니. 천도(天道)도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백원왕은 눈에 분노가 번지며 소리를 질렀다.
“천도? 황당하군! 백성들에겐 내가 바로 천도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아남겠으나 나를 거역하는 자는 죽는다!”
제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하더니 들어 올린 손을 꽉 쥐었다.
쿵!
붉은 소용돌이가 빠르게 커졌다!
잠깐 사이에 천 장 밖에 되지 않던 붉은 소용돌이가 이미 열 배나 더 커져서 크기가 만 장은 되어 보였다.
만약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소용돌이는 더 많은 것들을 빨아들일 터였으며 눈앞에 있는 우주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백원왕의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나타나더니 그는 튀어나온 머리와 팔을 거두어들이고는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금색 피가 빠르게 흘러나와 두 손에 쥔 번천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번천곤에 금색 피가 들어가 눈부신 금빛이 번졌다.
백원왕은 번천곤을 휘두르며 온힘을 다해 붉은 소용돌이 가운데를 내리쳤다.
쾅!
커다랗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소용돌이에서 수없이 많은 균열이 생기며 드디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