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20화 (620/916)

620화. 성계 (1)

소용돌이가 터지며 만들어낸 격렬한 충격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파편들이 되감겨 나왔다.

백원왕의 몸통도 충격 때문에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석목은 깜짝 놀랐고, 이어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백원왕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꽉 쥐고 있던 번천곤이 미친 듯이 돌면서 날아가 빛으로 변하여 망망한 성해로 사라져버렸다.

백원왕은 붉었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에 비치던 금빛도 점점 어두워졌으며 가슴에 난 구멍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멈춰버렸다.

석목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미 모든 피가 전부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필살기를 한 번 시전하느라 백원왕은 모든 힘을 전부 빼냈다.

“만 년이 흐르는 동안, 너는 나를 위협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쉽지만 너도 나를 거역한 또 다른 녀석들처럼 처절하게 져버렸구나!”

제준은 몸집이 빠르게 줄어들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후 백원왕의 앞까지 다가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준, 나는 네가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지켜보겠다!”

백원왕이 제준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죽어가는데 아직도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흥, 못 볼 거다!”

그 말을 들은 제준은 차갑게 말했다.

이어 제준이 옷자락을 흔들자 백원왕의 두 볼에서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눈구멍이 피범벅이 되더니 금색 눈알 두 개가 튀어 나왔다.

핏빛기둥이 두 갈래 뿜어져 나와 얼굴에 핏자국 두 줄이 생겼다.

“하하하……”

백원왕은 두 눈알이 빠져 나갔지만 화를 내지 않고서 오히려 호탕하게 웃었다.

백원왕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성역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무언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어서 백원왕이 웃는 소리가 멈추었지만 저 멀리 허공에서는 메아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백원왕이 내뿜던 기운은 전부 사라졌다. 하지만 커다란 몸통을 꼿꼿이 세우고는 두 눈으로 제준을 노려보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잔혼과 잔혈을 조금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내가 따로 쓸 일이 있다.”

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고만족은 천천히 백원왕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백원왕이 여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준을 입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못난 놈들.”

이어서 제준은 큰 걸음으로 백원왕의 몸 앞까지 걸어가 한 손을 들어 올렸고, 손에서 찬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와 막 백원왕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백원왕의 흩어졌던 기운이 갑자기 다시 뭉쳤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금빛 한 줄기가 튀어나와 곧바로 폐부로 들어가더니 가슴과 배에 금색, 푸른색,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 다섯 가마의 허영이 연이어 나타나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다섯 빛 가마 사이에서 영롱한 빛띠가 하나 나타나더니 서로 연결되며 큰 고리를 하나 만들어내어 백원왕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구전현공!”

제준은 상황이 뒤바뀌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도망을 치려 했다. 하지만 다섯 가마 사이에서 오색이 흘러나와 제준을 그 자리에 묶어 버렸다.

이때, 백원왕의 몸에서 검은색과 하얀색 빛이 두 갈래 뿜어져 나왔다.

이 두 갈래 빛은 마치 헤엄을 치는 물고기처럼 오색 빛띠 사이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헤엄을 쳤다.

흑백 두 물고기가 들어오자 오색 빛띠는 격하게 흔들리며 가운데서 파멸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제준, 승자는 왕이 될 수도 있지만 패자가 꼭 잘못을 한 건 아니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백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어서 빛이 갑자기 눈부시게 번지며 제준을 삼켜버렸다.

쾅!

폭발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백원왕의 커다란 몸통이 터져버려 수많은 핏덩이가 금색 화염을 감싼 채 주변으로 튀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만족과 전함은 피하지 못한 채 전부 터져 버렸고, 또 수많은 강자가 죽어 버렸다.

석목은 한쪽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록 이 모든 일들이 백원왕의 기억 속 한 단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석목은 마음이 많이 씁쓸했다.

석목은 백원왕이 이렇게 운명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장렬하게 희생을 한 것이었다.

수많은 금색 화염이 사라지며 우주에서 휘몰아치던 거센 바람도 잠잠해졌고, 수많은 불빛 속에서 금빛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 그림자는 매우 희미했는데 제준이라는 건 틀림이 없었다.

“구전현공 아홉 번째 단계를 끝내 버렸다니. 이 힘만 잘 숨겼다면 부활할 가능성이라도 챙겼을 텐데! 그런데 꼭 이런 방식으로 나와 같이 죽겠다고 나대다니.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금빛 그림자가 비아냥거렸다.

“네가 이렇게 한다고 한들 고작 나를 천 년 밖에 막지 못한다. 천 년이 아니라 만 년이 지나도 이 망망한 성역에서 너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할 테지. 그리고 아무도 구전현공을 아홉 번째 단계까지 수련하지 못할 거야.”

금빛 그림자가 말했다.

이어서 제준은 손을 흔들어 금빛을 날리더니 커다란 망을 이루었고, 우주에 남은 백원왕의 기운과 백원왕이 쓰던 물건에 전부 드리웠다. 살덩어리 하나마저 남겨놓지 않았다.

* * *

이어서 석목은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주변 광경이 다시 변했다. 제준, 우주, 전함…… 모든 게 사라졌으며 석목은 다시 자신의 의식 세계에 놓였다.

이 모든 게 남가일몽(南柯一夢) 같았다.

석목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번천곤에서 금빛이 한참 동안 일렁거렸다. 백원왕의 잔혼처럼 생긴 무언가가 번천곤 속에서 흘러나와 커다란 백원왕의 허영으로 나타났고, 백원왕이 원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석목에게 달려와 단번에 석목의 몸속으로 들어가더니 석목과 한 몸이 되었다.

백원왕이 몸에 들어오자 석목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석목이 두 눈을 뜨자 눈에서 금빛이 번쩍였고, 이어서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퍽!’

가벼운 소리였다.

단전에 자리한 금단이 터져 금빛이 줄줄이 흘러나와 근맥을 타고 오르더니 의식 세계에 도달했다.

금빛이 솟아오를 때마다 석목은 근맥을 칼로 자르는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많은 번개가 구름에서 쏟아져 석목의 몸에 내리쳤다.

석목이 입던 옷은 이미 활활 타버렸고, 드러난 근육은 번개가 단련을 하여 투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석목은 피부가 점점 더 투명해졌다. 심지어 지렁이 같은 붉은색 혈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번개와 금빛으로 단련을 하자 사지에 흘러 다니던 천련심의 액체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목의 피와 융합되어 피가 옅은 금색을 내뿜었다.

“팍!”

끊임없이 내리치는 번개와 함께 섬 주변에 맴돌던 영력 소용돌이가 갑자기 단단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너비가 수십 장에서 한 뼘 정도 크기로 변하여 금색 빛기둥이 되더니 동굴을 가로질러 석목의 머리를 뚫고서 몸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두 눈을 꼭 감았고, 그는 마치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처럼 끊임없이 영력을 몸에 불어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석목의 몸속으로 쏟아지는 금색 빛기둥은 흩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굵고 단단해졌다.

쾅!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이 있던 동굴은 드디어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천지 영기 때문에 부서져 버렸다.

이에 돌덩이가 주변에서 흩날리며 석목의 몸에도 떨어졌다. 하지만 석목은 지금 희미한 금빛을 두르고 있어서 돌들이 전부 튕겨져 날아갔다.

채아는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눈치를 채고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석목과 수백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섬에 내려앉았다.

터지는 소리가 울리자, 채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의 몸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걸 본 채아는 다시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로 지저귀었다.

“석두 이놈, 나무로 변하더니 이제 황금으로 변하려는 건가?”

이때 석목이 있던 작은 섬 주변에 다시 파동이 일었고, 섬 주변을 감싼 호수에서 커다란 물꽃이 일어나며 물거품이 보글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채아는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석목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때 석목이 있던 작은 섬 주변에 자욱하게 펼쳐졌던 짙은 안개는 이미 흩어지고 없었으며 안개에 숨에 있던 드넓은 땅이 훤히 드러났다. 드러난 땅 위엔 수많은 요수들이 어슬렁거렸다.

근처에 자리한 또 다른 섬 위에는 체구가 작은 요수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요수들은 석목이 천지를 휘저어놓아 달라지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체구가 큰 요수들은 오히려 강력한 기운을 풍기며 석목 주변에서 어슬렁거렸고, 틈을 노려 석목을 덮치려는 속셈이었다.

그 광경을 본 채아는 날개를 푸득대며 다급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롱한 빛을 감은 채아의 몸집이 순식간에 커졌고, 석목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금색 빛기둥 주변으로 날아가 기둥을 싸고 돌며 날카롭게 울었다.

그러자 석목에게 몰래 다가가려던 푸른색 구렁이 한 마리가 채아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물속에 파묻은 머리를 다시 빼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구렁이와 멀지 않은 곳에서 호수를 가로 질러 석목을 덮치려던 꼬리가 긴 도마뱀 한 마리도 다급하게 돌아섰다.

출렁이던 물 위가 다시 평온해졌다.

요수들이 허겁지겁 물러나자 채아는 뿌듯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만만하게 울어댔고, 그 울음소리는 마치 석목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석두, 봤지? 이번에는 이 채아 어르신이 너를 지켜 줄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채아의 커다란 몸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섬과 조금 멀리 떨어진 외곽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자욱했는데 외곽에서 커다란 그림자 일고여덟 개가 꿈틀거렸다.

흐늘거리는 그림자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끼며 채아는 잘난 척을 했던게 조금 후회되었고, 그림자들은 전부 성계 요수였기 때문에 채아 혼자서 상대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채아는 한참 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도망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빛기둥 주위를 맴돌며 온힘을 다해 울어댔다.

채아의 울어대는 소리가 짙은 안개 속으로 전해지자 다가오던 성계 요수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채아가 기뻐하기도 전에 가장 방대한 기운을 풍기던 세 마리 요수가 다시 발을 움직여 앞으로 향했다.

석목과 가까이에서 짙은 안개가 용솟음치더니, 검고 뾰족한 뿌리가 두꺼운 안개를 뚫어버렸고, 벽이 뚫리자 머리에 뾰족한 뿔이 한 쌍 자라난 마귀 늑대가 한 마리 나타났다.

짙은 안개가 드리운 또 다른 곳에서 검은 쇠날개를 펄럭이는 새 한 마리와 머리는 소에 몸은 뱀인 괴수 한 마리가 안개를 뚫고 나와서는 석목이 있는 섬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광경을 본 채아는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요수들을 물리치고 싶었지만, 채아는 분신술을 쓸 수 없었기에 어느 요수를 먼저 막아야 할지 몰랐다.

“아이 참…… 이럴 줄 알았더라면 마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그 무슨 진화 비술인가 뭔가 하는 걸 잘 배워둘 걸. 어쩔 수 없지! 석두, 네가 빨리 끝내야 해!”

채아는 씁쓸하게 소리를 지르며 ‘훅!’ 몸에 불을 지폈다.

채아는 날개를 펄럭이고 허공에 붉은 호광(弧光)을 그으며 빠르게 앞으로 날아갔고, 동작이 매우 날렵했다.

이어서 뿔이 자라난 마귀 늑대 옆을 호광이 ‘휙!’ 스쳐 지나자 늑대의 뿔에서 붉은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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