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따라가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안개가 드리운 깊은 곳까지 날아갔다.
이때, 석목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앞에 작은 섬이 하나 나타났는데 섬 주변에 다양한 색을 띤 연꽃이 피어있었다.
여긴 천지 영기가 놀라울 정도로 짙었다. 청란성지에 있는 현계 공간보다 몇 배나 더 짙은 것 같았다.
“존상, 따라 오십시오.”
숭오가 석목을 데리고서 섬으로 날아가 작은 연못 옆으로 내려왔다.
연꽃은 매우 화려했는데 향기가 가슴 속까지 파고들었다.
석목이 연못 안쪽을 바라보니 안쪽에 사람만 한 푸른색 연꽃이 한 송이 있었는데 꽃에서 푸른빛이 줄줄이 뿜어 나오며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은 앞을 꽉 닫고 있는 봉오리였다.
“여긴 왜 데려온 겁니까?”
석목이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백원 존상께서 푸른 연꽃 종자를 주시면서 여기에 심으라고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백원 존상의 후예가 이곳에 오면 꼭 푸른색 연꽃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숭오가 말했다.
“저에게 말입니까?”
석목이 멈칫했다.
“그렇습니다. 백원 존상께서 정확히 어떤 뜻으로 그러신 건진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이런 지시를 내리신 걸 보니 특별한 의도가 있으셨을 겁니다.”
숭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침묵을 하더니 날아올라 푸른 연꽃 근처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연꽃 잎사귀 사이에 가느다란 뿌리가 하나 꼿꼿하게 자라나 푸른색 꽃봉오리를 받쳐 들고 있었다.
석목은 신식으로 푸른 연꽃을 훑어보았으나 주변에 핀 다른 연꽃들과 같았으며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신식을 보내 꽃봉오리를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하자 부드러운 힘이 신식을 밀어냈다.
“채아, 네 시력으로 이 푸른 연꽃이 지닌 현묘한 점을 알아낼 수 있을까?”
석목은 심신이 연결되어 어깨에 앉은 채아에게 물었다.
“음…… 몰라……”
채아가 웅얼댔다.
석목은 한참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푸른 연꽃을 가볍게 만졌다.
손이 닿는 순간, 영혼 깊은 곳이 가볍게 흔들리며 차가운 기운이 푸른 연꽃에서 흘러나와 백원 혈맥이 지닌 힘과 순식간에 연결이 되는 것만 같았다.
펑!
눈부신 푸른빛이 연꽃에서 터지며 방대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어서 푸른색 연꽃잎이 한 장, 한 장 펼쳐지기 시작하더니 꽃이 활짝 피자 꽃 속에 금빛 찬란한 연화대(蓮花臺)가 하나 나타났다.
석목은 연화대를 자세히 훑어보고는 이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연화대에는 네다섯 살 정도 되는 동자가 앉아 있었는데 윗도리로는 붉은색 배두렁이를, 아랫도리로는 연꽃잎으로 만든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 동자는 코와 입을 벌렁대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작은 몸집은 고작 두 뼘 정도였으며 금색 연화대에 몸을 웅크린 채 가로로 누워 있었고, 품에 안고 있는 찬란한 금련자에서 강렬한 금속성 본원의 힘이 흘러나왔다.
석목의 어깨에 앉아있던 채아는 연자를 보더니 눈에 빛을 반짝이며 날개를 펄럭였고, 동자의 품속으로 파고들려했다.
채아의 모습을 본 석목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단번에 채아의 꼬리를 잡아끌었다.
“아야, 석두. 왜 날 끌어? 저 금련자를 봐봐! 저 영력이 얼마나 순수한지 보라고. 엄청 맛있을 거야.”
채아는 석목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석목이 또다시 채아를 잡아챘다.
“먹을 줄밖에 모르는 먹보야. 이 금련자는 주인이 있는 물건이잖아. 물어보지도 않고서 이렇게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려고?”
석목이 말했다.
석목은 입으로 채아와 말을 하며 눈길로는 동자의 몸을 훑어보았다.
동자는 하얀 피부에서 투명하고도 은은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하얀 옥을 빚어서 만든 것만 같았다. 웃음기가 가득한 동그란 얼굴, 비스듬히 감고 있는 눈, 간간이 떨리는 속눈썹까지 매우 정교하고도 수려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석목은 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숭오 선배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석목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물었다.
“저도 명을 받고서 푸른 연꽃을 지키고만 있었던 터라 다른 건 잘 모릅니다. 존상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저 또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백원 존상께서 명하신 일을 완수해서 다행일 뿐입니다.”
숭오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혹시 백원왕이 지시를 내릴 때 푸른 연꽃 속에 잠든 아이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나요?”
석목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계속해서 물었다.
“그때 보화 성조는 이미 운명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부 큰 부상을 당했었죠. 백원 존상께선 매우 위험한 상황이시라 제게 지시한 일들을 자세하게 물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숭오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석목이 계속해서 물어보려고 할 때, 숭오가 말을 끊어 버렸다.
“여기로 오기 전에 천정과 격전을 치르며 입은 제 상처는 천 년이 지나도록 낫지 않았습니다. 이제 존상께서 여기로 오셨으니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폐관수련을 하며 예전 실력을 되찾도록 집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되면 다시 나와 존상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숭오가 말했다.
그리고 석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몸에 검은빛을 드리우며 다시 커다란 두꺼비로 변하여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잠깐 사이에 커다란 몸집이 물속으로 들어가 기운마저 사라져버렸다.
숭오의 거대한 몸집이 천천히 석목의 눈에서 사라졌고, 석목은 다시 막연했다.
동자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동자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깼어, 깼어! 석두, 빨리 봐봐. 이 녀석 깨어났다니까!”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서 팔딱팔딱 뛰면서 흥분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봤어. 그러니깐 가만히 좀 있어.”
석목이 눈에 힘을 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채아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동자에게로 날아가 물었다.
“어머나, 어린 아가, 너 너무 귀엽다. 너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거야? 내가 집에 데려다줄까? …… 아, 네가 안고 있는 그 물건이 너무 무겁다고? 내가 들어줄까?”
“음…… 채아, 조용히 좀 해봐……”
석목이 어이없다는 듯이 채아를 끌어와서는 어깨에 올려놓았다.
“아야, 석두, 아프다고!”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동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연근처럼 하얗고 탱탱한 팔로 바닥을 짚더니 연꽃 위에 앉아서는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석목과 채아를 훑어보았다.
잠시 후에 동자는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금련자를 석목에게 건네었다.
“이건…… 나에게 주는 거야?”
석목이 멈칫했다.
하지만 동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활짝 웃기만 했다.
석목은 잠깐 멈칫하더니 금련자를 건네받았다.
금련자는 아이 주먹만 했는데 둥근 모양에 꽃무늬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꽃무늬는 사람이 새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긴 무늬였다.
금련자 속에는 강렬한 금속성 본원의 힘 말고도 날카로운 기운이 은은하게 풍겼다.
“석두, 예전에 천련심도 내가 너에게 남겨줬잖아, 이거는……”
채아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채아가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을 본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채아에게 던져주었다. 석목의 손바닥에서 금빛이 튀어 나왔다.
그러자 채아가 기뻐하며 날개를 펄럭이더니 단번에 입을 벌려 금빛을 받았고, 대충 몇 번 씹더니 곧바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다시 석목의 어깨로 날아가 쩝쩝거리며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 금련자는 보기에는 영력이 매우 순수해 보였는데 삼키니 별거 아니군. 내가 찾은 영재보다도 맛이 없어,”
채아는 알고 있었다. 석목이 던진 건 최상급 금속성 영석이었다. 금련자는 지금 석목의 저장 반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러니까 잘 씹고 삼켜야지. 이러면 맛을 알 수 없잖아? 그걸로 만족해.”
석목이 웃으며 채아를 꾸짖었다.
석목이 인색해서 그런건 아니었다. 금련자는 금속성 본원의 힘으로, 석목이 구전현공을 수련할 때 매우 중요한 물건이어서 채아에게 줄 수 없었다.
석목은 나중에 채아에게 좋은 영재를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목이 금련자를 받자, 동자는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석목을 향해 하얗고 통통한 두 팔을 벌렸는데 그 자세는 마치 안아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석목은 동자의 행동을 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동자에겐 악의가 없어 보였다. 석목은 잠깐 망설이더니 동자를 안아 옆에 있던 연꽃잎에 올려놓았다.
“너는 이름이 뭐야? 대체 누구야?”
석목이 동자의 눈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자는 웃는 얼굴로 석목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석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동자가 석목의 시선을 피했더라면 석목은 동자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터인데 동자는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럼 왜 연꽃 속에 있었던 거야? 너와 백원왕은 또 무슨 관계야?”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동자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서 동자 주변으로 날아가 한 바퀴를 돌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석두, 이 녀석은 바보인가 봐.”
그러자 석목이 채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고, 석두, 왜 나를 때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저 녀석이잖아.”
채아가 억울해하며 말했다.
그 광경을 본 아이는 ‘풋!’ 웃음을 터뜨리더니 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 녀석, 바보가 아니네. 이 채아 어르신을 비웃다니. 혼내 줄 거야.”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채아, 가만히 좀 있어 봐.”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래, 난 몰라. 석두, 네가 알아서 해!”
채아에겐 어린 아이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석목이 호통을 치자 곧바로 토라져서는 날개를 펄럭이며 연꽃잎으로 날아가 연못에 비친 자기 그림자만 빤히 바라보았다.
* * *
석목은 반나절 동안 끈질기게 물어보았으나 동자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석목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동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서서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채아,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어. 이제 청란성지로 돌아가자.”
석목은 가까이에 있는 채아를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
연꽃잎에 앉아 토라진 얼굴로 자기 그림자만 바라보고 있던 채아가 석목이 하는 말을 듣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좋아. 너무 오랫동안 밖에 있었어. 제 뚱보도 보고 싶네. 아, 석두, 우리가 머물 새 동부에 영천이 있어? 영천에서 정백이나 잡아먹어야지.”
“영천은 없는데 영폭은 있어. 근데 정백은 없으니 네가 직접 찾아야 할 거야.”
석목이 답했다.
“히히, 그럼 나에게 맡겨! 아,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채아가 날개를 몇 번 펄럭이며 석목의 어깨로 날아가 동자를 흘겨보더니 석목의 귀에다가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동자는 요수가 사는 천련지에서 기적처럼 태어났으니, 절대 평범한 동자는 아닐 거야. 백원왕이 준 종자가 변신을 한 것이니 아마 백원왕과도 연관이 있을 테지. 우선 이곳에 머물게 하면 숭오 일행이 알아서 챙기겠지. 조금 더 크면 그때 다시 와서 보자고.”
석목이 고민을 한 후에 대답했다.
그리고 채아를 데리고 날아가려 했다.
석목이 이제 막 돌아섰을 때, 동자가 갑자기 따라와 석목의 종아리를 끌어안았다.
석목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동자가 두 팔로 다리를 꽉 붙들고 있었다. 석목이 물었다.
“왜, 나를 따라오려고?”
동자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석목이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웃는 얼굴만 비치던 동자의 얼굴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그런데 내 곁은 아주 위험해. 나를 따라오면 너도 위험해질 거야. 네가 여기 남는다면 숭오 일행이 너를 챙길 테고.”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석목이 하는 말을 들은 동자는 고개를 힘껏 저으며 다리를 더욱 꽉 붙들어 맸다.
“석두, 이 녀석이 너무 불쌍해. 우리가 데려가자! 우리도 이 녀석에게 물건을 받았잖아.”
채아가 말했다.
“그래.”
석목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춰 동자를 번쩍 안았다. 우선 동부로 데려가기로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