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24화 (624/916)

624화. 창월

석목이 손을 흔들자 용우비차가 빛을 반짝이며 연못 위에 나타났다.

석목은 비차 위로 날아올라가 동자를 비차에 올려놓고는 영석 몇 개를 꺼내서 비차 앞쪽에 놓인 원판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비차가 금빛을 반짝이며 광막을 한 층 드리웠다.

용우비차는 빛을 반짝이며 안개 밖으로 날아갔다.

채아는 이미 백 년이 넘게, 심지어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동자에게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는데 어찌어찌하더니 또 동자와 사이가 좋게 지내게 되었다.

돌아가는 동안, 동자가 알아듣든 듣지 못하든 혼자서 끊임없이 동자에게 재잘거렸다.

비록 동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깔깔 웃고 있는 걸 보니 채아를 많이 따르는 것 같았다.

채아가 석목을 귀찮게 하지 않자 석목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집중하여 비차를 몰아 안개 속을 날아다녔다.

잠시 후에 비차는 안개 바다를 벗어났고, 비차 겉에 나던 빛이 더욱 밝아지자 속도가 한 층 더 빨라졌다. 그리고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점점 높이 날아 은련성 밖으로 사라졌다.

* * *

동성성, 청란성지의 총전.

깊은 대전을 등불이 환하게 비췄다.

대전의 문과 마주한 주좌에 하얀 눈썹이 어깨까지 드리운 노인이 앞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청란성지의 속승 진인이었다.

속승 진인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보라색 자작나무 의자가 각각 네 개씩 놓여있었는데, 왼쪽 의자에는 계율당의 악 호법, 뛰어난 연단 실력을 지닌 남궁 장로, 연꽃 선자와 관산해가 나란히 왼쪽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오른쪽의 의자 네 개는 비어있었다.

그들 밑으로 의자 이십여 개가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었는데 의자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청란성지의 성계 장로들 말고도 청란성지의 제자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이 수련을 한 경지는 전부 팔대 호법에 조금 미치는 못하는 정도였다.

팔대 장로와 가장 가까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청란성지의 복식을 입지 않고서 이진종의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 중 우두머리는 보라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 보라색 짧은 수염이 철침처럼 자라났으며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이진종 팔대 도관 중에 하나인 진뢰관의 관주 적문천이었다.

적문천의 옆으로 성계 강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그중 한 명은 긴 수염이 가슴까지 자랐으며 깊은 도를 닦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른 한 명은 수염이 꼬부라졌으며 더럽고 지저분한 도포를 입고 있었다.

속승 진인이 두 눈을 반쯤 뜬 채 시선을 이진종 사람들에게 던졌다.

“적 도우, 우리 청란성지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그러자 적문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가운데로 걸어 나오더니 속승 진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속승 진인, 저희는 이번에 중요한 일을 논의하러 왔습니다. 약 한 달 전, 우리가 관할하는 구역 북쪽을 떠돌아다니던 종문의 제자들이 상고시대 유적지를 한 곳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청란성지와 축운검파를 초청하여 함께 제자들을 보내 탐색을 하고자 요청하는 바입니다. 축운검파의 목천절 성주님은 이미 이 일에 동참하기로 정하셨습니다.”

“상고시대 유적지? 유적지의 유래를 알고 있는가?”

속승 진인이 물었다.

“신도 성주님께서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오래전에 곤륜과 이름을 나란히 했던 비경으로 창월이라 합니다.”

적문천이 대답했다.

그러자 대전이 시끌벅적해졌다. 차분하게 표정을 관리를 하고 있던 청란성지의 성계 강자들도 전부 놀란 얼굴로 일제히 적문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속승 진인은 의자에 무겁게 앉은 채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아주 보잘 것도 없는 일을 전해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속승 진인의 표정을 살피던 적문천은 잠깐 멈칫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도우님들도 아시다시피 창월은 곤륜과 마찬가지로 선계의 세력이 은거하던 곳입니다. 심지어 한창 번성했을 때는 곤륜보다 규모가 훨씬 컸지요.”

“내가 알기로 창월은 이미 만 년 전에 망한 곳이네. 헌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겠나?”

속승 진인이 또 물었다.

“정확한건 저도 잘 모릅니다만 최근 성역에서도 외진 곳이 불안해져, 작은 행성들이 무너지고 또 터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천지 원기가 어지러워 창월이 나타난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적문천이 설명을 했다.

적문천이 하는 말을 들은 청란성지의 성계 강자들은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

행성이 무너지는 건 이진종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석 광맥을 과도하게 채굴하여 자원을 전부 써버려 천지 영기가 균형을 잃어버렸다. 혼돈의 힘이 침습하면 행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속승 진인은 일관된 표정을 지으며 침묵에 잠겼다.

“여러분, 혹시 창월 신수(神樹)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적문천이 망설이더니 시선을 돌리며 적막을 깼다.

“만 년에 딱 한 번 월신과(月神果) 아홉 개가 달린다는 그 창월 신수 말씀입니까?”

속승 진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악 호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어딘가에서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창월 성지는 원래 윤회(輪回)의 도(道)를 깨우친 곳이었습니다. 대도삼천(大道三千) 중에 윤회가 최고라 하지요. 그리하여 창월의 정수가 깃든 월신과는 속에 자연스럽게도 대도삼천 중에 하나를 머금고 있다 합니다. 성계 정상인 수련자가 월신과를 먹는다면 곧바로 안에 든 천지의 도를 깨우쳐 신경으로 거듭난다고 했습니다!”

남궁 장로가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 장로가 말을 하자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런 신물이 있다는 겁니까?”

“그 물건만 받을 수 있다면, 그건……”

대다수 수련자에게 성계가 신경으로 오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이 좋아 대도삼천이지 진정으로 오묘함을 꿰뚫고서 도를 깨우치는 자는 수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했다. 그렇지 않다면 미양 성역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 중에서 세상에 알려진 신경 강자가 고작 세 명일 리 없었다.

고생스럽게 수천 년 동안 시간을 보내며 공법을 끝까지 끌어올려도, 마지막 한 걸음을 넘기지 못하는 수련자가 수두룩했다. 이 자리에 있는 성계 장로들만 해도 그랬다. 오랜 세월 성계 정상에만 머물러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어려울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정말 그 정도로 신비스러운 영과가 창월에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청란성지의 도우님들은 역시 견식이 뛰어나십니다. 바로 그 신수입니다. 월신과는 잘 익은 후에도 저절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쇠로 만든 평범한 도구로도 딸 수 있다지요. 창월이 만 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 안에 월신과가 있을 겁니다.”

적문천이 수염을 매만지며 천천히 말했다.

이때, 연꽃 선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적 도우님께서 말씀하신 제안이 솔깃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삼대 성지가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도우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을 터인데 왜 독차지하지 않고서 우리와 함께하려는 겁니까?”

너무나도 사리에 밝은 말이었다. 월신과를 향한 동경만 드러냈던 청란성지의 성계 장로들이 다시 이성을 되찾으며 이진종이 품은 목적을 파악하려 들었다.

연꽃 선자가 날카롭게 물었어도 적문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곤륜처럼 창월도 강력한 상고시대의 봉인 결계로 봉쇄되어있습니다. 삼대 성지의 성조들께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절대로 열지 못할 겁니다. 그게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신도 성주님은 천하의 창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십니다. 이번 기회에 상대 성지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여 미양 성역의 정세를 안정시켜 전쟁을 피하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적문천이 하는 말을 들은 청란성지의 장로들은 반신반의했다.

연꽃 선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속승 진인이 손을 들어 연꽃 선자를 말렸다.

“적 관주, 우선 편전에서 차나 한 잔 마시고 있게. 나와 우리 종문의 장로들이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네.”

속승 진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적문천이 곧바로 “네.”라고 대답했다.

이진종 일행이 자리를 옮긴 후, 속승 진인은 대전에 있는 장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남궁 장로가 가장 먼저 일어서서 말했다.

“성주님, 창월 비경은 이미 무너진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게 실로 미심쩍으니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우선 사람을 보내서 잘 알아본 후에 결정을 내리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남궁 장로가 하는 말을 들은 관산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금색 피풍의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성주님, 이런 몰락한 비경은 언제 나타났다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릅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겁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만 남을 겁니다.”

“관 호법님, 그 말씀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삼대 성지는 관계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절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진종의 움직임도 의심할 만합니다. 비경을 발견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소식을 퍼뜨렸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비경에 몇 번 정도만 다녀올 수 있는 시간입니다. 아마 결계를 여는 법조차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연꽃 선자가 말했다.

“연꽃 선자님이 하신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창월 비경이 정말 나타났다면 우리 청란성지는 월신과를 적어도 세 개는 얻게 될 겁니다. 그 말인즉슨 성지에 신경 강자가 세 명이나 더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그러니 그 정도 위험을 부담할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악 호법이 말했다.

“저도 악 호법님이 하신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입니다. 설사 어떤 음모가 숨어있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가 아니지요. 그리고 성주 존상께서도 계시니 이진종도 쉽게 우리를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관산해가 말을 보탰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팽팽히 맞섰다. 성계 장로들은 대부분 이 일에 끼고 싶어 했으나 남궁 장로를 비롯한 적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고 의견을 내세웠다.

“됐다! 우선 이진종이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할지 들어본 다음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속승 진인이 손을 들어 논쟁을 끊으며 말했다.

* * *

이 시각, 편전 속.

의자에 앉아있던 적문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찻잔을 들고만 있을 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긴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수심 가득한 적문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적 관주님, 무슨 걱정을 그리하고 계십니까?”

“혹시 아십니까? 만여 년 전, 이 미양 성역에는 원래 성지가 단 하나만 있었습니다.”

적문천이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적 관주님, 갑자기 그 말은 왜 꺼내신 겁니까?”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

“우리 성주님과 축운검파의 성주 목천절, 그리고 속승 진인은 서로를 도우라 칭하며 지내는 사이들이시지만, 두 성주님과 속승 진인은 항렬이 꽤 많이 차이 납니다. 실력 또한 엄청나게 차이가 나니 우리 성주님도 속승 진인을 절대 가볍게 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니 제가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적문천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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