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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25화 (625/916)

625화. 자격을 잃다

이때 조금 추잡스럽게 생긴 중년 도인 하나가 적문천이 하는 말을 듣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속승 진인은 강적과 전투를 치르다가 큰 부상을 당하여 경지가 낮아져 이 동성성에서 폐관수련을 하고 있으셨다고 합니다. 아마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또한 빈 껍데기뿐일지도 모르지요.”

“후후, 정말 그렇다고 해도 예전에 백원왕 같은 강자를 키워낸 사람입니다. 혹시 백원왕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적문천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중년 도사가 멈칫하더니 어색한 표정을 드러냈다.

“우리 성주님도 속승 진인이 정말 완전히 경지를 회복되었는지 많이 궁금해 하십니다. 그런 걱정만 아니었더라면 축운검파는 진즉에 우리 이진종에게 속했을 겁니다. 청란성지 또한 마찬가지지요. 성주께서 이런 계획을 내놓으신 건 아마 다시 속승진인께서 지니신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으신 마음일 겁니다.”

적문천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때, 청란성지의 장로 한 명이 다가와서는 이진종 일행들을 다시 총전으로 안내했다.

이진종 일행이 다시 대전에 돌아오자 속승 진인이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적 관주, 우선 자세한 계획부터 들어보지.”

“속승 진인께 아뢰옵니다. 신도 성주님께서 하신 제안은 이러합니다. 결계가 열리면 각 종문에서 천위 제자들을 이백 명씩 들여보내며, 성계 강자 두 명이 대오를 이끌어 비경으로 들어가 함께 창월 신수를 찾는 겁니다. 그리고 비경에서 찾아낸 보물은 각자 가지기로 하되, 월신과는 어느 종문이 먼저 찾든지 꼭 다른 두 성지와 나눠 가져야 하며 절대로 독차지하면 안 된다는 제안입니다.”

적문천이 대답했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이 계획은 겉으로 봤을 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심지어 매우 공평한 방법이라 연꽃 선자를 비롯한 반대 세력들마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속승 진인이 입을 열었다.

“신도 도우는 결계를 열 시간을 정했는가?”

“자세한 시간은 아직 결정하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 성주 존상께서 추측하시건대 가장 적합한 시기는 삼 년 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각 종문에겐 뛰어난 제자들을 뽑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겁니다.”

적문천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적 관주가 돌아가서 신도 도우께 전하게나. 청란성지도 참여하겠다고.”

속승 진인이 말했다.

* * *

이 시각, 푸른색 빛이 청란성지 밖에서 날아 들어왔다.

빛이 사라지자 어른과 아이 한 명이 나타났다. 어른의 어깨 위에는 앵무새도 한 마리 앉아있었다.

그들은 석목과 채아, 그리고 은련성에서 데려온 신비스러운 연꽃 동자였다.

“하하,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모든 게 전부 그대로네.”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흥분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연꽃 동자는 석목 옆에 서서 작은 손으로 석목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청란성지를 바라보는 동자는 눈빛에 빛이 맴돌았다.

“가자.”

석목은 아이가 바라보는 눈빛을 읽지 못한 채 용우비차를 몰고 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반시진 뒤, 석목 일행은 현계 공간의 동부로 돌아왔다.

“부주 어르신!”

제풍은 때마침 동부의 문 앞에 있었다. 그리고 석목이 다가오자 곧바로 석목에게 날아와 몸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제풍은 석목이 안전하게 돌아오자 그제야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많은 일들을 겪으며 제풍은 석목이라는 존재가 시종들에게 주는 영향을 뼈저리게 느꼈다. 석목이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안 혹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지는 않았을까 단 하루도 맘 편히 지내지 못했다.

“일어나거라.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니 큰절까지 할 필요는 없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제풍이 힘에 이끌려 일어났다.

“부주님, 수련 경지가……”

제풍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

“음, 우연한 기회로 성계에 도달했다.”

석목이 대충 대답을 했다.

제풍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석목의 실력이 성계에 도달했으니 성지의 규정대로라면 만 년 제자가 되어 종문에게 더 많은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제풍은 석목이라는 사람을 잘 알았다. 석목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석목이 만 년 제자들이 머무는 지계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면 기필코 시종들을 전부 데리고 갈 터였다.

“제 뚱보. 왜 석목에게만 인사하는 거야? 이 어르신은 못 봤는가?”

채아가 날개를 푸득거리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 어르신, 돌아오셨네요!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제풍이 기뻐하며 말했다.

제풍은 석목의 수련 경지를 보고서 놀라느라 채아와 함께 따라온 동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이 아이는 부주님의……’

제풍은 석목에게 기댄 동자를 보며 이런저런 추측을 했지만,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는 잘 돌아가고 있었나?”

석목은 제풍이 하는 엉뚱한 생각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석목은 곧바로 동부로 걸어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다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풍은 동부로 따라 들어가서는 영지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간단하게 보고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종문에는 별일이 없었고?”

“아, 그동안 종문과 삼대 성지 사이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진종이 미양 성역 변두리에서 창월이라는 유적지를 발견했는데 예전에 본 곤륜 비경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상고 유적지……”

제풍은 창월 유적지와 관련된 정보와 삼대 성지가 연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석목에게 알렸다.

“창월 유적지?”

석목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처음에는 욕심났으나 제풍이 하는 보고를 듣고 난 후 잠깐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접었다.

청란성지가 보낼 성계 우두머리 두 명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천위 제자들을 선발하는 건 이제 석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석목이 창월로 가고 싶다 해도 종문에서 성계 우두머리를 석목으로 바꿀 리 없었다. 석목은 고작 성계 초기였으니 중요한 임무를 석목에게 맡길 연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석목은 성계로 진입하면서 오히려 창월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잃은 셈이었다.

하지만 석목은 소탈한 성격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막 성계에 진입했으니 시간을 들여 경지를 잘 다듬어야만 했다. 이 밖에 금속성 본원의 힘도 얻었기 때문에 빨리 구전현공의 여섯 번째 단계를 수련해야만 했다.

“부주님, 원하시지 않으시면 가지 마십시오. 창월 유적지라고 해봐야 별 게 있겠습니까?”

제풍은 석목이 창월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속으로 기뻐했다.

제풍은 창월이 곤륜보다 더 위험한 곳이라 전해 들었다. 석목이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막상 가기 싫어하니 당연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주님, 수련 경지가 성계에 도달하셨는데 언제 만 년 제자가 되실 겁니까?”

제풍이 물었다.

“아직 그럴 계획은 없다. 아, 너도 내 수련 경지와 관련된 일은 밖에 알리지 말거라.”

석목이 침묵하더니 말했다.

“네!”

제풍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으면 나가보거라.”

석목이 말했다.

제풍이 이제 막 인사를 올리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잠깐만, 제 뚱보.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날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줘.”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제풍의 어깨로 날아갔다.

“네, 네……”

제풍이 다급하게 답했다.

“살은 왜 이렇게 찐 거야. 이 어르신이 돌아왔으니 영지에 있는 시종들은 내가 잘 다스려볼게. 어때?”

채아가 갑자기 제안을 했다.

“그럼요.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제풍은 채아가 하는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풍과 채아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석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동자가 석목의 몸에 기댄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피곤해? 조금 쉴까?”

석목이 말했다.

동자는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석목은 동자를 안고는 동부 근처에 자리한 편전으로 들어가 푹신한 침상에 눕혔고, 동자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석목은 곤히 잠든 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동자의 몸에서 기이한 기운이 풍겼다. 백원왕이 석목에게 남긴 자이니 석목은 일단 동부에서 데리고 있기로 다짐을 했다.

석목은 금제를 몇 개 드리웠다. 그리고 시종 두 명을 불러 동자를 돌보라고 지시를 내린 후에 비밀 석실로 들어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목이 손을 흔들어 저장 반지 아홉 개를 꺼냈다. 이 저장 반지는 유풍 신장과 성계 고만족 여덟 명이 남긴 반지들이었다.

그동안 석목은 정신없이 성지로 돌아오느라 저장 반지를 살펴볼 시간도 없었다. 천정에서 왔다고 하니 꽤나 기대가 되었다. 특히 유풍은 신경 강자라 아마 실망을 주지 않을 터였다.

석목은 푸른색 옥고리를 하나 꺼내 들고는 신식으로 훑어보았다. 그건 성계 고만족이 쓰던 저장 반지였다.

이어서 석목의 안색이 활짝 폈다.

다양한 보물들과 희귀한 단약, 법보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최상급 영석이 족히 육칠만 개는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석목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영석이었다. 구전현공의 아홉 번째와 바꾸려면 엄청나게 많은 영석이 필요했다. 그리고 충분한 영석이 있으면 진룡쇄금갑도 영보급으로 제련할 수 있었다. 그러면 방어력도 훨씬 더 뛰어나질 터였다.

석목은 또 다른 저장 반지를 꺼내 들어 신식으로 훑었다.

이 저장 반지에도 최상급 영석이 오만 개 정도 들어있었다.

석목은 저장 반지를 하나하나 꺼내 들고는 신식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성계 고만족 여덟 명이 쓰던 저장 반지를 합치면 최상급 영석이 약 사십만 개는 되었다.

석목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금색 저장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건 유풍 신장이 쓰던 저장 반지였다.

유풍 신장은 신경 강자였으니 최상급 영석 수십만 개 정도는 거뜬히 들어 있을 터였다.

석목은 신식으로 금색 저장 반지를 훑어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손을 흔들자 바닥에 물건들이 떨어져 나왔는데 전부 옥병이나 옥합이었다.

의외로 영석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풀었다.

저장 반지에는 희귀한 보물들이 많으니 가져다 팔면 영석과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조금 번거로울 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천천히 유풍 신장이 남긴 보물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때, 석목은 입이 찢어질 듯이 웃었다.

유풍 신장이 남긴 단약과 재료들은 전부 매우 희귀한 보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옥합을 열어보니 안에 푸른색 뿌리가 하나 누워있었다. 인삼같이 생긴 이 뿌리는 겉에 푸른색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매우 훌륭한 보물이었다.

푸른색 뿌리는 극도로 순수한 나무 속성 원기를 지니고 있어 옥합을 열자 석목의 몸에 깃든 나무의 힘이 꿈틀거렸다.

석목은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보물은 아주 희귀한 만 년 벽옥삼(碧玉參)이었다. 뿌리가 머금고 있는 나무 속성 영력은 극도로 순수했는데 신경 아래 수련자가 한계를 돌파할 때 매우 유익하게 쓸 보물이었다. 특히 나무 속성 공법을 수련한 사람에겐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석목은 나무 속성 공법을 수련하지도 않았으며 구전현공에서 쓰는 나무의 힘도 이미 원만에 이르렀다. 허나 벽옥삼은 석목에게 여전히 큰 가치가 있었다. 벽옥삼이 머금은 나무의 힘은 매우 풍부하여 구전현공에서 쓰는 나무의 힘과 합친다면 죽은 자도 살릴만한 효험이 있어 전투 중에 큰 상처를 입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여서 소중했다.

석목은 조심하며 벽옥삼을 거두어들였다. 벽옥삼은 석목에게 생명을 무려 두 번이나 줄 수 있는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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