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26화 (626/916)

626화. 단검

이어서 석목은 조금 큰 옥합을 하나 열어보더니 표정이 얼어붙었다.

옥합 속에 주먹만 한 수정들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수정들은 오색 빛을 뿜어내는 선급 영석이었는데 희귀한 영석들이 옥합 속을 꽉 채웠다.

얼어붙었던 석목은 얼굴을 조금씩 풀다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영석이 하나도 없어 유풍을 거지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유풍은 최상급 영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석목은 이 선급 영석들이 그 어떤 보물들보다 사랑스럽게 보였다. 성지에 돌아온 후로 선급 영석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떡하니 나타날 줄이야.

선급 영석만 있으면 전투를 치르며 더는 진기를 모두 쓰는 걸 두려워할 필요 없이 번천곤을 소환할 수 있고, 그러면 실력도 몇 배나 더 늘 터였다!

한참 동안 소리를 내며 웃던 석목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영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영석은 족히 서른 개가 넘었는데 오행 속성이 전부 들어 있었다. 특히 물속성 선급 영석은 일고여덟 개나 되었다.

석목은 싱글벙글 웃으며 옥합을 거두어들이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유풍 신장이 남긴 보물을 거의 다 구경했다. 이제 옥병 몇 개와 네모 난 목합 하나만이 남았다.

석목은 옥병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병 속에 든 단약들도 매우 귀한 것들이었는데 속성이 석목과 잘 맞지 않았다.

석목은 마지막으로 네모 난 목합을 잠깐 훑어보더니 안색이 변했다.

목합에 봉인 부적이 일고여덟 개나 붙어 있어 목합을 꽁꽁 묶어버렸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석목은 봉인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네모난 목합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흉물이라도 봉인되어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목합을 열어버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석목은 잠깐 침묵하더니 목합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한 손을 흔들어 법결을 몇 개 시전하였다.

동부 주변에 여러 가지 색 부문들이 나타나 얽히고설키더니 진법을 층층이 드리워 동부를 안으로 감싸버렸다.

석목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파란색 진기가 줄줄이 날아나와 비밀 석실 주변에 떨어지며 파란색 법진을 하나 펼쳐놓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석목이 다시 목합을 들고는 위에 붙은 부적 한 장을 찢으려 할 때였다.

부적에서 갑자기 빛이 한 줄기 튀어나와 석목의 손가락을 튕겨냈다.

등급이 꽤 높은 부적이라 석목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뜯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부적은 아니었다.

석목은 손에 하얀 화염을 만들어 부적에 불을 지폈다.

치칙!

종이가 타는 소리와 함께 봉인 부적이 재가 되었다.

석목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튕기며 다른 부적들에도 불을 지폈다. 잠깐 사이에 부적들은 전부 까맣게 타버렸다.

석목은 깊은숨을 한번 내뱉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목합을 열었다.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소리나 기이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목합 뚜껑을 살짝 열어보니 두 뼘 정도 되는 단검(斷劍)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검집은 검은색이었으며 검신(劍身)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는데 가운데가 부러져버려 옅은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매우 괴이한 모양이었다.

“단검……”

석목이 망설이다가 신식으로 훑어본 후에 검집을 잡아 단검을 꺼내 들었다.

석목은 이 핏빛 단검을 가까이로 가져와 이리저리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별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시 침묵에 잠긴 석목이 몸속에 깃든 진기를 단검에 불어넣었다.

윙!

눈부신 핏빛이 목합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퍼졌다.

비밀 석실에서 한참 동안 파란빛이 번지더니 물빛을 감아 사발을 뒤엎은 모양인 광막을 하나 만들어냈다. 광막은 핏빛 살기를 전부 덮어버려 살기가 흘러나갈 수 없었다.

단검에서 풍기는 핏빛에 광막이 드리웠지만, 빛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검날은 스스로 윙윙 소리를 내며 진동했고, 검날에 괴상한 핏빛이 묻어있었는데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듯이 위아래로 흘렀다. 마치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와 동시에, 포악스러운 기운이 검신에서 흘러나와 석목의 머릿속으로 침입했다.

순간 석목은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피바다가 펼쳐졌는데 피바다 속에는 온전하지 못한 시체와 백골들이 둥둥 떠다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헛구역질이 났다.

“으아……”

석목의 몸에서 포악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마치 실존하는 것만 같은 붉은빛이 석목의 몸을 감싸며 옅은 핏빛 안개로 뭉쳤다. 석목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해버렸고, 석목은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구쳤다.

단검에서는 피 같은 검빛이 뿜어져 나와 허공을 가볍게 찢어버렸다.

이때, 석목의 영해 속에 자리한 번천곤이 훅! 움직이자 눈부신 금빛이 석목에게서 뿜어져 나와 핏빛 단검을 감아버렸다.

금빛에 감긴 단검이 내던 핏빛은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듯이 순식간에 흩어졌고, 하늘을 찌르던 포악한 기운도 두어 번 흔들리더니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석목은 몸을 파르르 떨었고, 그를 감싸고 있던 살기도 서서히 흩어졌으며 피를 삼키고 싶던 충동도 억눌렸다. 그리고 눈에서 번지던 핏빛도 사라져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석목은 깜짝 놀라 단검을 던져버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태앵!

단검이 땅에 떨어져 두어 번 뒤집히더니 멈춰버렸다.

“이건 무슨 물건일까…… 심신까지 흩어놓다니……”

석목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석목은 늘 정신력이 단단한 사람이라 자부했다. 환마도도 석목을 가둬둘 수 없었는데 이 해괴한 단검 때문에 심신이 흐트러졌다니.

번천곤이 지닌 위력으로 누르지 못했더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단검을 던져버리자 금빛도 사라졌으며 영해 속에 있던 번천곤도 다시 조용해졌다.

석목은 다시 단검을 훑어보았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놀라운 살육의 기운이 들어있으니 절대 평범한 법보는 아닐 터였다.

특히 검빛만으로도 가볍게 허공을 찢어 버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부러진 검이었지만 온전했더라면 절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을 터였다. 유풍 신장이 조심스럽게 봉인을 하여 지니고 다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다시 팔을 뻗어 단검을 들었다.

진기를 불어 넣지 않으면 이 단검은 평범한 단검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석목은 눈을 몇 번 껌뻑이며 이렇게 귀중한 보물을 다룰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석목은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진기를 시전하여 단검에 불어넣었다.

윙!

단검에서 또다시 핏빛이 뿜어져 나왔으며 검신에 핏빛 검 기운이 나타나더니 흉악한 살기가 다시 석목의 머릿속으로 침입하였으며 피바다가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음에 준비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심신을 보호하여 살기가 침입하는 걸 막아냈다.

약 열 몇 번 호흡을 한 후에 석목의 심신은 결국 버티지 못하여 눈에 붉은 피가 불어났다.

이때, 영해 속에 있던 번천곤이 다시 움직여 금빛을 드리워 단검이 불어넣는 살기를 눌러버렸다.

석목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검을 던져버리지 않았다. 석목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금 전에 단검의 살기를 억제할 때 단검이 지닌 힘도 고스란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검은 방대한 힘을 머금고 있었는데 번천곤과 비슷한 영보급 보물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런 보물은 짙은 살기를 머금고 있어서 힘을 시전하면 살기가 검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갈 터였다.

석목은 단 몇 번 호흡을 할 동안만 단검을 들 수 있었다. 이 살육의 기운을 제어하려면 아마 신경 강자는 되어야할 터였다.

석목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 우선 거두어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때, 석목의 몸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며 분신이 나타났다.

분신은 핏빛 단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갈망을 하는 눈길을 보냈다.

“이 검을 가지고 싶은 건가?”

석목이 멈칫했다.

분신은 말을 할 줄 몰랐지만, 몹시 갈망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이건 본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갈망이었다.

석목은 곧바로 손을 흔들어 핏빛 단검을 분신에 던져주었다.

단검을 받아든 분신은 눈에 흥분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검은빛을 내뿜어 단검에 불어넣었다.

으르렁!

붉은 단검에서 핏빛이 크게 번지며 석목이 손에 들고 있을 때 보다 열 배나 더 눈부신 빛을 뿜어내면서 맹수가 포효하는 것만 같은 소리를 냈다.

석목은 분신과 심신이 연결되어 있어 곧바로 단검이 지닌 흉악한 살기가 분신의 몸속으로 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분신의 손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수많은 부문들이 나타났다. 영역의 힘이었다.

영역이 나타나자 곧바로 살기를 대부분 막아냈고, 비록 여전히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었지만, 심신의 힘으로 간신히 막아낼 수는 있었다.

석목은 매우 좋아했다. 분신은 신경 강자는 아니었지만, 석목이 예상한 대로 온전치 못한 영역의 힘을 써 단검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단검이 있다면 분신은 실력이 대폭 강해질 터였고, 신경 강자와 싸워도 문제가 없었다. 만약 다시 유풍 신장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허둥지둥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석목은 분신의 몸으로 핏빛 단검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는 다시 목합 속에 넣어두었다.

단검은 살육의 기운이 너무 강해 분신과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살육과 피에 굶주린 기운이 분신의 마음을 흩뜨려 놓을까 불안했다.

* * *

석목은 동부에서 잠깐 앉아있다가 통류방으로 향했다.

반나절 뒤, 석목은 다시 동부로 돌아와 동부 곳곳에 금제를 드리우고는 비밀 석실로 들어왔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최상급 영석이 두둑하게 나타났는데 족히 오십만 개는 넘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통류방에서 석목은 쓰지 않는 재료들을 팔아 최상급 영석을 십만 개가 넘게 바꾸었다.

석목은 깊은 고민을 한 끝에 당분간 영석으로 구전현공의 마지막 단계를 바꾸지 않기로 다짐했다. 급하게 필요한 게 아니니 필요할 때 바꾸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석목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보랏빛이 반짝이며 자취로가 나타났다.

석목은 중얼거리며 파란빛을 동로 속으로 날려 보냈다.

자취로에서 보랏빛이 밝아지며 길고 좁은 틈에서 푸른색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그림자는 왜소한 노인처럼 생겼다. 공수자였다.

공수자는 끊임없이 다양한 연기 구결을 외우기만 할 뿐 석목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수자 선배님.”

석목이 인사를 올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공수자는 외우던 구결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석목을 한 번 쳐다봤다.

“넌 누구냐? 나에게 연기를 배우러 온 것이냐?”

공수자가 물었다.

석목은 눈을 껌뻑거렸다. 보아하니 공수자는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기의 도는 깊고 정교하여 큰 지혜와 대단한 의지력을 갖춘 사람만이 도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자질이 떨어져 연기의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석목은 잠깐 망설이더니 갑자기 공수자를 추켜세웠다.

그러자 공수자는 수염이 갑자기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연기는 타고난 기질도 중요하지만, 뒤따르는 노력도 필요하다. 너는 자질이 좀 떨어지지만 차분하고 듬직한 면이 있구나. 연기를 하며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는 없겠지만 내가 너를 가르친다면 평범한 연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게다.”

“공수자 선배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후배는 선배님께 부탁을 드릴 일이 따로 있습니다.”

석목이 다급하게 포권을 쥐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말해 보아라.”

공수자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석목이 미소를 머금고는 금빛을 반짝이며 진룡쇄금갑을 꺼내 입었다. 쇄금갑에서 금색 파동이 일렁였다.

“이건…… 최상급이다. 최상급!”

공수자는 진룡쇄금갑을 보더니 지난번과 똑같이 눈에 빛을 뿜어내면서 갑옷을 입은 석목을 둘러싼 채로 한 바퀴 빙 돌며 중얼거렸다.

석목은 가만히 서서 공수자가 취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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