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창월의 이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개월이 흘렀다.
이날도 자취로에서는 화염이 한참 동안 용솟음쳤다. 순간, 화염이 꺼져버리며 풍기는 금빛이 보름 전보다 훨씬 짙어졌다.
입구에 있던 석목이 두 눈을 뜨더니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석목은 일어서서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자취로를 바라보았다.
이때, 자취로의 뚜껑이 휙! 열리더니 눈부신 금빛이 안에서 튀어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색 갑옷이었다.
윙, 윙!
갑옷에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편종 소리 같은 귀에 즐거운 음악 소리였다.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에서 갑옷을 두른 작은 사람들이 나와 나팔을 불며 기묘한 음악 소리를 만들었다.
갑옷에서 방대한 영력 파동을 머금은 금색 빛고리가 줄줄이 뿜어져 나왔다.
석목이 기뻐하며 다급하게 몸을 날려 금색 갑옷을 잡았다. 그리고 손끝에 붉은 피를 한 방울 짜내어 갑옷에 떨구었다.
금색 갑옷은 빛을 반짝이며 금빛 덩어리로 변하여 석목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이 두 눈을 감은 채 주문을 몇 마디 외웠다. 그러자 몸속에 들어갔던 금색 갑옷이 순식간에 몸을 감쌌다.
진룡쇄금갑은 모양이 많이 바뀌었다. 갑옷을 두른 비늘은 동그란 모양에서 타원형으로 변하였고, 용 모양 부문이 더해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슴 부위에 있던 용머리 장식은 하나에서 아홉 개로 늘어났는데 몸을 빙 두르고 있어서 처음보다 훨씬 위엄이 넘쳐 보였다.
석목이 갑옷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순간, 갑옷에서 금빛이 번지며 용머리가 두 눈에 불을 밝혔다. 갑옷을 두른 광막에서 헤엄쳐 다니던 금룡도 아홉 마리로 늘어났다.
금룡 아홉 마리는 광막에서 헤엄쳐 다니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강력한 기운을 뿜어냈다.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었으며 기운 속에 조금 특별한 기운들도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기운은 번천곤이 지닌 위력과 비슷한 영보급 기운이었다.
갑옷의 광막을 두르고 있던 석목은 마치 세상에 나타난 신처럼 기세가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석목은 다시 법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아홉 금룡이 드리운 광막이 어두워지며 다시 갑옷으로 숨어버렸다.
석목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고, 설레는 마음 때문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때, 공수자는 마치 석목이 느낀 기분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자취로에서 튀어나왔다.
“어때? 내 연기 솜씨가 어떻느냐.”
공수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역시 공수자 대사님답게 엄청나게 정교한 실력이십니다. 절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입니다.”
석목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 갑옷은 크게 망가진 적이 있어 최상급 법보로 등급이 떨어졌지. 아직 완전히 고친 건 아니라 좋은 재료 몇 가지와 영석만 충분히 있다면 이 갑옷은 등급을 한 층 더 높일 수 있단다.”
공수자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어떤 재료가 더 필요합니까?”
공수자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좋아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구해야할 재료는 여기에 있다. 충분히 모은 후에 다시 날 찾아오너라.”
공수자가 손을 흔들자 한 갈래 빛이 튀어나와 하얀 종잇장으로 뭉치며 석목 앞에 떨어졌다. 종잇장 위에 일고여덟 가지 재료들이 적혀있었다.
석목이 종이를 훑어보니 대부분 들어본 적도 없는 재료들이었다. 그 중에 곤륜응금석(昆侖凝金石)과 천하성사(天河星沙)만 전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두 재료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고시대의 재료들인데 다른 재료들도 아마 전부 상고시대의 재료들일 터였다.
이 밖에도 최상급 영석 오십만 개도 필요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재료를 모아보겠습니다.”
석목이 깊은숨을 내뱉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공수자는 알았다고 답을 한 뒤로 다시 자취로 속에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자취로에서 나던 빛이 서서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석목은 손을 흔들어 자취로를 거두어들인 후, 종이에 적힌 재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고시대의 재료들을 어디에 가서 찾겠나?
하지만 석목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종이를 넣어두었다. 진룡쇄금갑이 영보급이 되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백원왕의 잔혼이 번천곤을 시전하면 단 한 방에 유풍 신장 같은 신경 강자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비록 쇄금갑은 번천곤만큼 강한 위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강력한 상대와 싸울 때 목숨을 지킬 수 있을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
석목은 아직 완벽하게 번천곤을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쇄금갑만큼은 언제든지 꺼내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력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옷의 등급이 높아지자 힘과 법력 또한 많이 소모했다. 만약 전력을 다해 용 아홉 마리를 전부 밝힌다면 평범한 신경 초기 수준으론 절대 광막을 뚫을 수 없을 터였다. 토템 비술과 토화의 힘까지 합치면 신경 중기 강자가 날린 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다만 석목이 지닌 법력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몸에 두른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의 등급도 강해졌으며 모양도 바뀌었으니 진룡쇄금갑이라 부르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구룡쇄금갑이 적합하겠군.”
석목은 곧바로 새로운 이름을 생각해냈다.
석목은 다시 한참 동안 구룡쇄금갑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 * *
석목은 다시 석실에 앉아 몸을 조금 회복한 후에 동부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훑어보던 석목이 눈썹을 치켜떴다.
동부는 매우 조용했다. 채아는 보이지 않았으며 몇몇 시종만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석목은 방향을 틀어 다시 편전 방향으로 걸어갔다.
편전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상엔 이불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동자도 사라졌다.
석목은 다급하게 방에서 걸어 나와 앞마당으로 향했다.
때마침 제풍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앞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제 관사.”
석목이 제풍을 불렀다.
제풍은 그제야 석목이 나온 걸 알아차리고는 잔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부주님, 나오셨군요.”
“채아는 어디로 간 건가?”
석목이 물었다.
“어제 마옥 부주께서 다녀갔습니다. 채아와 어린 도련님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부주님께서 폐관을 하시는 동안 채아 어르신과 도련님은 간간이 마옥 부주님에게 가셔서 며칠 동안 묵으시다 오곤 했습니다.”
제풍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가서 일을 보거라.”
석목이 말했다.
하지만 제풍은 대답을 하지도 떠나지도 않은 채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왜? 할 말이 있더냐?”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주님, 성지에서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풍이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문인가?”
석목이 물었다. 괜히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삼대 성지가 연합하여 세상에 드러난 창월 비경으로 들어가리라는 일 말입니다. 부주님께선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제풍은 곧바로 말하지 않고는 창월을 언급하며 다시 석목에게 물었다.
“기억한다. 말해 보아라.”
석목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저도 조금 전에 소식을 들은 것인데, 창월로 가는 일에 차질이 생겼다고 합니다. 삼대 성지에서 보낸 제자들 수백 명은 창월 신수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청란성지가 무슨 연유인지 다른 두 성지와 충돌을 빚었다고 합니다.”
“삼대 성지는 사이가 나빠져 다들 서로 의심을 품고 있었을 테니, 충돌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삼대 성지에서 성계 장로를 두 명씩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석목이 물었다.
“그렇긴 한데 이번 충돌이 일어난 큰 원인이 성주의 직전제자인 조극과 축운성전의 소주인 목역에게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수련을 한 경지가 너무 높아 보통 성계 장로들이 절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조극은 구전현공의 일곱 번째 단계를 대성하여 매우 두려운 수를 썼는데, 그 잔인한 방법 때문에 목역이 죽어버렸다고……”
제풍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뭐?”
석목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떠도는 소식이긴 합니다만 축운검파의 성주인 목천절이 이 일로 노발대발하며 따지러 찾아올 것이라 했습니다. 심지어 목천절은 이미 이진종의 성주 신도남과 연합을 했다고 합니다. 두 성주가 대군을 거느리고 청란성지로 쳐들어 온다고 합니다. 지금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전부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적잖은 제자들은 이미 여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풍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생각에 잠겼다.
제풍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몇 년간 미양 성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충돌들이 완전히 폭발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아마 미양 성역 전체를 휩쓸만한 전쟁이 될 터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건 예측한 바였지만,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조극이 한 이간질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석목은 조극과 천정이 어떤 관계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 어떤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청란성지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못된다. 미리 준비하고 있거라. 때가 되면 너와 시종들을 데리고 여길 떠날 테니.”
석목은 잠깐 침묵한 후에 말했다.
“부주님……”
제풍은 통통한 얼굴에 감격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됐다. 빨리 가서 준비하거라. 이 일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나는 우선 채아부터 데리고 오마.”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풍은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서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석목은 잠깐 침묵하더니 용우비차를 소환하여 현령탑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이 시각, 청란성지의 총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간간히 큰소리도 들렸다.
속승 진인은 주좌에 앉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대전에서 끊임없이 논쟁 중인 성계 강자들 수십 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좌 밑에 자리한 여덟 의자 중에 일곱 개는 이미 전부 차 있었다. 하지만 남궁 장로는 보이지 않았다.
관산해, 악 호법과 연꽃 선자 말고도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흰머리 노부인도 한 명 앉아있었다. 노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조극 이 자식,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 다녀서 종문에 이렇게 큰 화를 불러일으키다니. 악 호법, 종문의 율법대로라면 어떤 벌을 내려야 합니까?”
파란 옷을 입은 악 호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창월 사건 이후로 조극은 계속 성지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축운검파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인지 아직 확인한 바도 없습니다. 축운검파에서 한 말만 듣고 판단을 내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흥, 다른 제자들이 증언을 했잖습니까. 조극이 축운검파의 소주 목역을 죽이는 모습을 다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봤습니다. 그런데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연꽃 선자가 일어서서 말했다.
“그건…… 이제 와서 그 일을 꺼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성지에 잠입해 있는 제자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축운검파와 이진종은 이미 제자들을 이끌고서 주둔지를 떠났다고 합니다. 우선 어떻게 대처를 할지 논의해봅시다.”
악 호법이 말했다.
“그럼 악 호법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은 생각인 것 같은가?”
주좌에 앉아 있던 속승 진인이 악 호법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주님, 우선 사자(使者)를 보내 두 종파의 성주들과 담판을 지어 시간을 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틈에 우리는 곧바로 부속 행성 네 곳에서 사람을 소집하여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악 호법이 말했다.
“목역은 목천절이 가장 아끼는 후배다. 목역을 축운검파의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지. 조극이 자취를 감췄으니 목천절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속승 진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그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괜한 화만 불러일으켜서는.”
대전 속에서 누군가 갑자기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누군가가 반박을 하며 나섰다.
“그때 그렇게 반대했는데도 소용이 없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대부분이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지요. 그렇지만……”
“그때 너무 대충 생각을 하고서 결단을 내린 건 잘못된 일이 맞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졌지요.”
“조극 이놈은 절대 쉽게 교화시킬 수 없는 놈입니다. 성지에 이렇게 큰일을 만들어놓았으니 그 책임은 절대 면할 수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