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40화 (640/916)

640화. 청란성지가 함락되다.

허공에 나타난 괴이한 광경 때문에 기세등등하던 이진종과 축운검파의 모든 제자들과 청란성지를 배신한 성계 장로들은 전부 움직임을 멈춘 채 일제히 한 곳만 바라보았다.

동성성의 하늘에서 외로운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 서서는 옷자락을 휘날렸다.

속승 진인의 허리까지 드리운 머리카락과 하얀 눈썹이 바람에 휘날렸다. 속승 진인은 몸집이 그리 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 속승 진인은 혼자 동성성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두 성지, 심지어 두 성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한 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속승 진인이 깃털 부채를 천천히 흔들자 쇠사슬에 묶여있던 칠색린록이 풀려나며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순식간에 속승진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금동사취와 적염리호도 언제인지 모르게 속승 진인의 등 뒤에 나타났는데 두 눈에 슬픔이 어렸다.

“가라.”

속승 진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두 글자만 내뱉었다.

그러자 신수 세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고서 슬프게 울부짖더니 몸을 돌려 세 갈래 빛으로 변하여 망망한 성해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신도남은 세 신수를 신경도 쓰지 않고는 뚫어져라 속승 진인을 바라보았다.

목천절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하하…… 하하……”

청란성지의 제자들이 전부 멀리까지 흩어지자, 속승 진인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신도남과 목천절은 의아한 표정만 드러냈다.

이때, 속승 진인이 내뿜는 기운이 한참 동안 변하더니 주변에 드리운 영역 광막에서 균열이 나타나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속승 진인의 경지가 신경 정상에서 끊임없이 추락했다……

신경 후기, 중기…… 성계 정상, 후기, 중기……

잠깐 사이에 속승 진인은 신경 정상에서 성계에도 미치지 못할 경지까지 떨어졌으며 기운은 계속해서 약해졌다……

신도남은 그제야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얼굴에 흉악한 기색을 드러내며 이를 갈면서 말했다.

“속승, 우리를 속여?”

그리고 손에 든 깃털 부채를 앞으로 짚자, 금색 사슬 두 줄기가 앞으로 뿜어져 나가 창처럼 속승 진인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신도남이 다시 손목을 당기자 속승 진인의 몸이 곧바로 사슬에 끌려서 날아갔고,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에 두 갈래 핏줄을 그어놓았다.

신도남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속승 진인의 텅 빈 몸을 끌며 마음속으로 굴욕을 느꼈다. 신도남은 고개를 돌려 관산해를 비롯한 배신자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로 와서 이놈을 죽여!”

곽어진을 비롯한 장로들은 신도남이 내리는 명령을 듣고서 한참 동안 복잡한 기색을 들어냈다. 하지만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목천절도 속승 진인이 달라지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속승 진인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신도남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못 죽이겠나?”

신도남이 어두워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침묵이 흐르던 사이, 관산해가 이를 악물고서 앞으로 날아가 단번에 속승 진인의 머리카락을 잡으며 쥐어뜯기 시작했다.

속승 진인의 안색이 더없이 흐려졌다. 숨결도 가냘플 정도로 약해져서 마치 쇠퇴한 노인 같았다. 속승 진인은 암울한 눈초리로 관산해를 바라만 볼 뿐 두렵거나 분노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관산해는 속승 진인이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속승 진인의 목덜미를 그었다. 그러자 속승 진인의 머리가 가볍게 잘렸다.

매우 미약한 사람 모양 빛덩이가 속승 진인의 잘린 머리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관산해가 내리치기도 전에 스스로 흩어졌고, 하늘에 빛들이 흩날리다가 사라졌다.

속승 진인이 죽어버리자, 신경 사령도 옅은 빛으로 변하여 흩날렸다.

관산해는 속승 진인의 머리를 쳐들고는 외쳤다.

“속승이 죽었습니다. 이진종의 성주께서 청란성지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성계 장로들 수십 명도 전부 무릎을 꿇으며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진종의 성주님, 청란성지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목천절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속승 진인이 죽기 직전, 목천절은 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쟁으로 청란성지와 축운검파가 전부 진 것이었다.

“아직 주인 자리를 들먹이기엔 이르다. 모두 명을 듣거라, 동성성을 봉쇄하라. 반항하는 청란성지의 제자들을 전부 쓸어버린다! 단 한 명도 남겨서는 아니 된다!”

신도남은 얼굴에 의기양양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성계 장로들이 동시에 대답을 했고, 전함 수백 척에서 빛이 번지더니 동성성 밖에 드리운 두꺼운 성운을 뚫으며 행성 안으로 날아갔다.

신도남은 목천절에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목 도우, 속승 녀석이 껍데기 하나로 우리를 근 만 년 동안 속였소.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못 알아봤단 말이오.”

“후후,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라 속승과 경지가 같다고 생각했지. 속승이 짧게나마 영역을 소환한 걸 보면 대승 경지까지 갔던 게 분명하오. 그리고 혼자서 청란성지를 만 년 가까이 지키며 적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한 걸 보면 이 정도 실력과 패기는 나도 절대 따라갈 수 없소.”

목천절이 말했다.

* * *

청란성지, 현계 구역.

채아는 한참 동안 날아가서야 쫓아오는 무리를 따돌렸다. 채아는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전에 시전한 화염 비술 때문에 꽤 많은 원기를 소모한 모양이었다.

석목이 천천히 일어나 채아의 등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옥합을 하나 꺼내서 열었다. 옥합 속엔 푸른색 옥삼이 한 뿌리 누워있었는데 바로 만년 벽옥삼이었다.

“이렇게 빨리 옥삼을 쓸 줄은 몰랐네.”

석목은 한숨을 내뱉으며 옥삼을 입에 넣은 채 두어 번 씹더니 삼켜버렸다.

펑!

만년 벽옥삼은 삼키자마자 곧바로 녹아 버려 순수한 나무 속성 원기로 변하였고, 석목이 나무의 힘을 펼치자 온몸에 푸른색 빛이 번지며 내상이 천천히 치유되었다.

만년 벽옥삼은 나무 속성 원기가 매우 풍부해 빠르게 몸속을 흘러 다니며 석목이 입은 상처를 치료했다.

잠깐 사이에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내상이 육할 정도는 회복되었으며 진기도 대부분 회복되었다.

“채아, 잠깐 멈추자.”

석목이 말을 꺼내며 연꽃 동자를 안고서 내려왔다.

석목은 은밀한 산봉우리 위로 내려왔다.

채아도 몸을 줄여 석목의 어깨에 내려앉았는데 기운이 허약해졌다.

석목은 손가락을 짚어 순수한 나무의 힘을 채아의 몸속에 불어넣었다. 채아는 기운이 빠르게 돌아온 듯이 눈을 초롱초롱 떴으나 지금 처한 상황이 걱정되었는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석두, 우리 이제 어떡해?”

채아가 물었다.

채아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쓴웃음을 지었다.

석목도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청란성지에서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가 이 현령탑이었다. 하지만 전송대전을 신경 강자가 지키고 있으니 지금 상태로 다가갔다가는 죽기를 자초하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도망을 칠 생각을 접고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땅과 산봉우리, 공간이 모두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동은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는데, 마치 묵직한 무언가가 땅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밖에서 전해진 힘 같아. 동성성이 함락됐나 봐.”

석목이 눈을 껌뻑이며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안색도 매우 어두워졌다.

청란성지가 모두 진동하는 걸 보니 전장에서 큰 패배를 맛본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소리가 울리지 않을 터였다.

이때,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승이 죽었습니다. 이진종의 성주께서 청란성지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소리는 엄청나게 컸는데 마치 일부러 술법을 써서 청란성지 안까지 전해지도록 만든 것 같았다.

석목이 깜짝 놀라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며 처량한 감정이 목구멍을 통해 밀려 올라왔다.

“속승 진인이 죽었다고……”

속승 진인이 죽었다는 건 청란성지가 완전히 함락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 청란성지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지워질 터였다.

석목이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실의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청란성지가 함락되었으니 석목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기둥이었던 속승 진인이 죽었으니 아마 미양 성역도 점점 혼란스러워질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석목은 어떻게 여길 빠져나갈지 생각해야만 했다.

이제 곧 이진종과 축운검파, 심지어 천정의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그때가 되면 숨을 곳조차 없을 터였다.

석목은 깊은 생각에 잠겨 다양한 탈출 방법을 떠올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밖에서 들리는 맹렬한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진동도 점점 격렬해졌고, 심지어 허공이 일그러지며 크고 작은 공간 균열까지 번쩍였다.

석목은 표정을 피더니 눈에 금빛을 흘리며 채아와 연꽃 동자를 데리고서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산봉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퍽!

이때, 석목의 등 뒤에서 갑자기 틈이 하나 벌어졌다. 푸른빛이 틈에서 흘러나와 석목의 몸을 감싸고는 안으로 끌었다.

석목은 파란빛을 드리우며 저항하려다 다시 생각을 바꾸고는 저항하길 포기했다.

* * *

석목은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다시 영롱한 빛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석목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구룡쇄금갑을 두르고는 크기가 반장 정도 되는 둥그런 광막을 만들어 연꽃 동자와 채아까지 감쌌다.

찢어지는 공간의 힘이 석목의 몸에 닿자 구룡쇄금갑에 부딪쳐 흩어져 버리며 힘이 조금만 남았다. 하지만 이 정도 힘은 석목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이었다.

채아도 성계 요수라 공간의 힘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연꽃 동자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석목 일행은 공간 난류 속에서 한참 동안 흘러 다녔다. 그러다가 앞에 하얀빛이 나타나더니 방대한 힘으로 일행을 감고는 날아가 버렸다.

석목은 몸이 가벼워졌다가 눈앞이 다시 환해졌고, 그는 폐허 속에 떨어졌는데 부서지고 타버린 시체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 고개를 들어보니 허공에 전함 몇 척이 떠 있었다. 전함은 빛기둥을 떨구며 성을 부숴버리고 있었다.

“여긴…… 청란성!”

석목은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여기가 청란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기쁨 같기도 슬픔 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슬펐던 건 석목이 생각했던 것보다 바깥 상황이 처참했다는 사실이었다.

웅장하고 번성했던 청란성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대부분은 무너져 폐허로 변하였고, 성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시체와 잘린 팔다리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시체들은 대부분은 수련을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노인과 아이, 여자의 시신이 유독 많았다.

허공에서 공격을 날리는 전함들은 조금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성을 철저히 부수려는 모양이었다.

“이진종! 축운검파!”

석목의 눈에 분노와 원망이 스쳤다.

청란성지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무고한 백성들까지 죽일 이유는 없지 않았나.

청란성지에서 도망을 친 제자들이 간간히 나타나 떨어지는 빛기둥들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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