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삼성성역
“너, 너는 누구냐?”
석목이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후에 물었다.
연꽃 동자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어렸다.
“나는 청란성지의 성조란다.”
“말도 안 돼! 속승 진인은 이미 운명하셨어. 그리고 너는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잖아. 네가 어떻게 속승 진인이야!”
석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채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연꽃 동자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은 안색이 살짝 바뀌더니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너, 속승 진인의 분신이구나?”
“그 반대지. 속승이 내 분신이란다. 나야말로 진정한 청란성지의 성조, 장현(藏玄)이다.”
연꽃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복잡해져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긴 대화를 나누기 좋은 곳은 아니군. 조금 전에 너무 큰 소란을 피웠다. 지금은 바쁠 때니 우선 여길 떠나서 얘기하자.”
연꽃 동자가 한 손을 흔들자 푸른색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석목과 채아를 드리운 채 연꽃 모양 진법을 하나 만들었다.
연꽃 진법이 반짝이더니 세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 * *
석목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칠흑같이 검은 혼돈의 공간에 빠져버렸는데 마치 전송진법을 탄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에 석목의 눈앞이 다시 환해지며 푸른 숲이 나타났다.
채아는 여전히 석목의 어깨에 앉아서 날개로 머리를 감싸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연꽃 동자는 석목, 채아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야?”
채아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긴 미양 성역에 있는 작은 행성이다. 동성성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진종 사람들은 이곳을 찾을 수 없을 게야.”
연꽃 동자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네가 정말 청란성지의 성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알려줘.”
석목은 연꽃 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급히 굴지 마려무나. 내 신분을 밝힌 이상 숨기지 않겠다. 그리고 너도 이제 알 때가 됐지.”
연꽃 동자가 몸을 낮추며 석목에게도 앉으라고 말했다.
석목은 아이이처럼 생겨선 노인처럼 구는 연꽃 동자가 우스웠지만 정말 청란 성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가까운 곳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동자는 그동안 석목을 해치지도 않았다.
채아도 주변 환경이 바뀐 걸 알아차리고는 날개를 살짝 벌려 두 눈을 빼꼼 내밀더니 곧바로 두 날개를 거두어들이고는 연꽃 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남해성을 떠난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성역 세계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느냐?”
연꽃 동자가 뜬금없이 물었다.
“성역 세계는 끝없이 펼쳐져있으며 성역도 수 없이 많지. 미양 성역은 수천만 성역들 중 하나……”
석목은 잠깐 멈칫하더니 스스로 알고 있는 지식들을 줄줄이 말했다.
숨길 것도 없는 게 석목도 성역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네 말이 옳다. 진정한 성역 세계는 끝없이 넓으며 성역도 수 없이 많지. 성역에는 또 수없이 많은 행성들…… 모든 성역은 전부 독립된 존재지만 성역과 성역 사이는 또 연결이 되어있지.”
연꽃 동자가 말했다.
“연꽃?”
석목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래. 성역 세계에 수많은 성역들이 있지만 전부 하계에 속한단다. 어떤 공간 통로나 균열을 통해 서로 연결이 되어있지. 하지만 성스러운 세 성역은 아니야.”
연꽃 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스러운 세 성역? 어느 세 개를 말하는 거야?”
석목이 물었다.
“선역, 마역, 그리고 명역. 이 세 성역을 삼성 성역 또 선계라고도 부르지.”
연꽃 동자가 말했다.
석목은 무엇인가 떠오른 듯 숨이 턱 막혔다.
“아마 무언가 떠올랐을 테지. 예전에 마역의 중심은 곤륜이었고, 명역의 중심은 창월, 선역의 중심은 바로 천정이었지.”
여기까지 말을 한 연꽃 동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추억이 가득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을 이어갔다.
“천정의 왕인 제준, 곤륜의 마조인 보화 선자, 그리고 창월의 주인은 각각 맡은 영역을 다스리며 선계의 균형을 유지했지. 처음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서 모두가 평안했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준이 한 영역을 총괄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세력 범위를 늘리려했단다. 제준은 세력을 하계 성역으로 뻗었을 뿐만 아니라 전설 속에만 존재하던 더 높은 계면을 찾기 위해서 천도를 어기는 미친 짓을 벌였단다.”
연꽃 동자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결과는?”
석목이 동자가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동자가 말을 끊자 석목은 다급하게 물었다.
“명주와 마조가 제준을 막으려 했으나 둘은 동맹을 맺지 않았단다. 마조인 보화 선자는 성격이 냉담하여 제준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큰 충돌을 빚진 않았지. 하지만 명주는 성격이 다급해서 여러 번 타일러도 소용이 없자 제준과 전투를 벌였단다.
둘은 원래 실력이 비슷했지만 명주가 간과한 점이 있었지. 그건 제준이 다른 행성들에서 막대한 원기를 뽑아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다는 점이었어. 그리하여 명주는 상대가 되지 못해 큰 부상을 입은 채 어쩔 수 없이 명역을 떠나 미양 성역에서 상처를 보듬었단다.”
연꽃 동자가 말했다.
“그럼 보화 선자는 명주를 도와주지 않았어?”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준은 매우 교활한 놈이야. 명주와 교전을 할 때 계략을 써서 보화 선자를 가둬 놓았지.”
연꽃 동자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양 성역으로 간 명주는 청란성지라는 종파를 만들어 거기에 숨어서 실력을 되찾고 있었단다. 하지만 명주는 수련 경지를 일부만 회복했지. 제준이 행적을 찾아내서 미양 성역까지 쫓아오자 둘은 또다시 격전을 치렀단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쪽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었지. 명주는 다시 한 번 큰 부상을 입었단다. 다행히 제준도 큰 부상을 당해서 폐관하며 수련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연꽃 동자가 말했다.
“청란성지가 그렇게 생겼군. 그 뒤는?”
석목이 말했다. 속승 진인의 본체는 정말로 창월의 주인인 명주였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또 얼마나 큰 파동이 일까.
“명주는 두 번이나 큰 상처를 입어 근본이 파괴되어 다시는 원래 실력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단다. 하지만 명주는 여전히 경지들을 깨닫고 있었지. 제준이 품은 야심이 쉽게 꺾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된 명주는 평생 깨우친 내용으로 구전현공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백원왕에게 구전현공을 가르쳐 키웠지. 제준도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드디어 실력을 되찾아 명역은 완전히 무너졌어.
하지만 제준은 여기서 멈추지 않은 채 마조인 보화 선자와 싸우기 시작했지. 그리하여 명주는 백원왕에게 보화 선자를 도와 제준과 싸우라고 명을 내렸단다. 불행하게도 백원왕은 배신을 당하여 보화와 함께 제준에게 살해를 당했지만. 허나 마지막 순간에 백원왕은 구전현공으로 다시 제준에게 큰 부상을 입혔지.”
연꽃 동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동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백원왕과 연나에게서 들은 정보들을 떠올리자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알 수 있었다.
“백원왕과 보화가 전부 죽어버렸는데 제준은 왜 청란성지를 공격하지 않았어?”
연꽃 동자가 말을 멈추자 석목이 다급하게 물었다.
“백원왕이 동귀어진을 선택해 큰 부상을 당한 제준은 구전현공의 놀라운 힘을 보고는 명주가 가진 진정한 실력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지. 그리하여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단다. 하지만 제준은 여전히 횡포를 부렸어.
미양 성역에서 이진종이라는 종파를 만들어 명주가 지닌 실력을 끊임없이 염탐하는 한편, 미양 성역에 있는 영석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단다. 명주는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빈껍데기로 위장하여 모든 사람을 속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
연꽃 동자가 말했다.
“속승 진인은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제준이 실력을 알아내려 시도하지 않았나?”
석목은 눈에 존경심이 어렸다.
“물론 시도했지. 오랜 시간 동안 제준은 이진종에 명을 내려 여러 번 시도했지. 심지어 첩자를 청란성지로 보냈어. 하지만 속승이 전부 차분하게 대처했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준은 드디어 백원왕이 입힌 상처를 완벽히 회복해 속승도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하지만 속승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도 나타났지.”
연꽃 동자가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은 안색이 변했다.
“왜 나를 봐? 속승 진인이 나를 기다렸다는 거야?”
석목이 말했다.
“물론. 그동안 진정으로 백원왕의 혈맥을 물려받은 네가 오길 계속 기다렸단다.”
연꽃 동자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백원왕에게 대물림을 받은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네 신분은 밝히지 않았잖아.”
석목이 깜짝 놀라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 잊고 있었네. 명주는 자기 실력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곧바로 도(道)의 근본을 전부 몸에서 빼내어 구보금련(九寶金蓮)으로 또 다른 몸을 만들어냈는데 그게 바로 나야. 속승의 몸에는 강타를 세 번 정도 날릴 힘만 남겨두었지.
그동안 신경에 오른 힘 세 번은 각각 곤륜과 창월,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란성지가 붕괴되기 직전에 신도남을 막는데 썼단다. 후후, 제준은 내가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절대 모를 테지. 제준이 죽인 건 내 분신일 뿐이야.”
연꽃 동자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백원왕에게 대물림을 받았는지 알았냐고 물었지. 백원왕은 내 제자란다. 백원왕이 죽을 때 대물림을 했으며 쓰던 법보에 피를 한 방울 넣어서 하계에 두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암암리에 계속해서 그 피를 쫓아다녔지. 네가 어렸을 때 바다에서 놀며 피를 얻게 된 순간도 모두 내 눈으로 직접 봤단다.”
연꽃 동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때 석목이 벌떡 일어서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굳혔다.
그러니까 석목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감시를 받으며 통제를 당했다. 그동안 속승 진인이 통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깐만! 내가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건앵 일족은 남해성과 엄청 멀리 떨어져있는데 어떻게 남해성에 소환된 거야. 그때 그 뚱보는 네가 보낸 사람이지? 일부러 나를 흑마문에 버려뒀지?”
채아가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석목이 눈을 껌뻑거렸다.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석목은 국 사숙이 가르쳐 혼사가 되었다. 그리고 연나와 계약을 맺었다. 이 모든 우연은 전부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부……
“그래, 국 사숙은 내 분신일 뿐이란다. 그동안 전부 내가 통제했지. 보화 선자는 그해 파멸에 가까운 큰 부상을 당했단다. 내가 몰래 그녀를 도와줘서 명역으로 보내 너와 계약을 맺도록 했단다. 나중에 너희가 순조롭게 힘을 합쳐 함께 제준과 싸우도록.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도 있었단다. 네가 보화에게 인정을 받을 줄은 몰랐지.”
연꽃 동자가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은 멈칫하며 눈에 기이한 빛을 스쳤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명역? 연나는 사령계면에 있었어. 네가 한 말은?”
석목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네가 말하는 사령계면이 명역이야. 사령계면은 별칭일 뿐이지.”
연꽃 동자가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사령계면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쉽게 연나와 만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새를 네 곁에 둔 건 네가 안전하도록 그랬단다. 이 건앵은 별다른 능력을 갖추진 않았지만 통찰력 하나는 뛰어나지.”
연꽃 동자가 채아를 한번 보며 말했다.
“네가 그 국 뚱보구나!”
채아가 연꽃 동자를 흘겨봤다.
“그렇다면 제가 겪은 모든 일들을 다 봤다는 겁니까……”
석목이 침묵한 후에 물었다.
“그래.”
연꽃 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연꽃 동자를 바라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감시를 당했다고 생각을 하니 몹시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동안 연꽃 동자가 석목을 많이 도와줬을 테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