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미양을 떠나다.
“서문 관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은 서문설을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서문설을 바라보았다. 전부 뛰어난 미모에 감탄을 했다.
서문설은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을 신경도 쓰지 않고는 시선을 돌려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흠칫했다. 서문설이 이진종의 관주가 되었다니. 뒤에 있던 또 다른 세 명은 경지가 서문설보다 높았지만 전부 서문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뚱뚱하게 부어있는 석목을 바라보는 서문설은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 눈빛은 의문스럽기도 했으며 또 막연하기도 했다.
석목은 고개를 들어 서문설과 눈을 마주쳤다.
서문설의 눈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노 장로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서문설은 아직 단 한 번도 노인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서문 관주님. 아무 문제없습니다. 다만 저 자가 손에 들고 있는 앵무새가 조금 이상하여 제가……”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곧바로 대답했다.
“종문이 우리를 여기로 보낸 이유는 청란성지에서 도망친 녀석들을 찾아 놈들이 천하 성역으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청란성지의 도망자들 중에 앵무새도 섞여 있는지요?”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말을 떨어뜨리기 바쁘게 서문설이 말을 끊어버렸다.
노 장로는 얼굴에 땀이 두 방울 맺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지금 입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서문설이 물었다.
“그건…… 제가 감히.”
노 장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계속 이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요?”
서문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네, 네. 곧바로 지나가라 하겠습니다.”
노 장로가 다급하게 답했다.
“관주님 감사합니다!”
그러자 석목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이마에 난 땀을 닦아내며 감격스러운 표정로 서문설을 향해 포권을 쥐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골짜기 속으로 걸어갔다.
이제 막 백 걸음 정도 걸어갔을 때 석목이 갑자기 몸을 멈춰 세웠다. 머릿속에서 서문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목, 네게 진 빚은 다 갚았다고 생각할게. 청란성지는 이미 사라진데다가 미양 성역은 너무 위험해졌어. 미양 성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절대, 다시는 돌아오지 마.”
“왜? 석두.”
석목이 멈춰 서자 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야. 가자.”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 * *
사람 한 명과 새 한 마리는 대략 한 시진 반 정도 걸어서야 협곡 중간에 자리한 공간통로에 도착했다.
공간통로는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팔각형 진법이었는데 높이가 백 장에 달하는 하얀색 돌기둥들이 여덟 개 서 있었다. 기둥 위로는 촘촘한 부문들과 주문들이 새겨져 있었다.
팔각형 진법 가운데는 제단이 아니라 지름이 서른 장 정도 되는 검은 돌로 판 우물이 있었다.
석목이 진법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돌기둥에 새겨진 부문들은 진법을 시전하기 위한 게 아니라 검고 둥그런 우물을 단단히 만들기 위해 새겨져 있었다.
우물의 한편에는 검은색 석패가 서 있었으며 위에는 ‘통천정(通天井)’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천하 성역으로 통하는 우물이었다.
백모성에 오기 전, 석목은 공간통로가 부석 성해처럼 하늘에 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통로는 우물에 있었다.
석목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서야 통천정 앞에 다가갈 수 있었다. 우물을 바라보니 그리 깊지 않았다. 열 장 정도 되어보였으며 우물 밑으로 검은 물이 반짝였다.
석목은 영수 주머니를 꺼내 채아를 넣어둔 후에 우물 밑을 바라보더니 단번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귓가에서 바람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석목은 몸이 빠르게 떨어져 곧바로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두 발이 물에 닿는 순간, 물 위에서 칠색 빛이 반짝이며 비단처럼 석목의 몸을 감사더니 단번에 삼켜버렸다.
잠시 후에 칠색 빛이 사라지며 우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물물은 거울처럼 잔잔했으며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
* * *
성역 세계를 크게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에 다양한 성역들이 존재했다. 선계, 명계, 마계가 삼성 성역이며 천하 성역은 비록 삼성 성역과 비교를 할 정도로 크진 않았지만 하계에서는 꽤 규모가 큰 성역이었다.
만약 먼 곳에서 천하 성역을 내려다보면 마치 커다란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즐비해있을 터였다. 반짝이는 별들은 전부 행성이었다.
하지만 행성들은 각자 특징과 환경이 달랐다. 어떤 행성은 산과 물이 있어서 환경이 우월해 생명들이 자랐지만 또 어떤 행성은 환경이 열악하여 풀마저도 자라지 않았다.
천하 성역 변두리에 자리한 복룡성은 커다란 행성이었는데 기후가 따뜻하여 생명들이 번성하기에 적합한 행성이었다.
이때, 복룡성 근처 허공에서 갑자기 형태가 없는 공간 파동이 일렁이더니 커다란 은빛이 번졌다.
훅!
그림자 하나가 은빛에서 내던져져 비틀거리다가 이내 몸을 멈춰 세웠다. 몸이 뚱뚱한 중년 남자였는데 몸에 금색 갑옷을 두르고 있는 석목이었다.
석목은 지금 매우 처참해보였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온통 상처투성이였으며 안색은 창백했다.
성역의 공간을 지나며 찢기는 힘을 너무 강력하게 받아 구룡쇄금갑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힘겨운 여정을 겪었다.
석목은 곧바로 단약을 한 알 삼켰다. 그러자 안색이 점점 돌아왔으며 몸에서 뚝뚝대며 뼈가 꺾기는 소리가 들리다가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석목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시선을 돌렸다. 성역 뒤편은 매우 평온했다.
석목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여기가 천하 성역이구나……”
이곳은 커다란 은하가 성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실로 아름다웠다.
석목은 성역을 한참 바라보다가 용우비차를 불러 멀리 있는 복룡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몇 년 동안 별바다를 가로지르며 석목은 어느 행성에 생령들이 머무는지 잘 알게 되었다.
* * *
한참 뒤에 석목은 복룡성에 자리한 한 산맥에 도착했다.
다행히 복룡성은 천지 영기가 매우 짙었으며 더 다행인 점은 천지 영기에 마기가 섞여있다는 점이었다.
마기만 있다면 석목의 분신이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석두, 이미 천하 성역에 도착한 거야? 빨리, 빨리 나를 꺼내줘! 나도 구경할 거야!”
채아의 목소리가 영수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손을 흔들어 채아를 풀어놓았다.
“아이고!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채아는 날아 나오자마자 큰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채아를 신경쓰지 않고 미천거원 일족의 신물을 꺼냈다.
갈색 영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영패를 거두어들였다.
“여기가 바로 천하 성역이야? 미양 성역이랑 비슷하니 꽤 괜찮아 보이는데.”
채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행성에도 수련자가 있을 거야. 우선 성을 찾아서 천하 성역이 처한 상황부터 알아보자. 그리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자.”
석목이 말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라 먼 곳으로 날아가려던 참이었다.
“잠깐만, 천하 성역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면 저쪽으로 가야해.”
채아가 갑자기 말을 하며 날개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석목이 멈칫하더니 재빨리 신식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눈썹을 치켜뜨며 채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 산골짜기에서 사람들 한 무리가 격렬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한쪽 무리는 다섯 사람이었는데 머리에 외뿔이 자라나 있었으며 온몸에 동전 모양 비늘을 두르고 있는 이족 사람들이었다.
다른 한쪽 무리는 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금발머리 이족들이었는데 남녀 한 쌍이었다. 그들은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뿔이 난 이족들에게 공격을 받아 뒤로 점점 밀려났다.
다섯 사람은 아무도 법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몸의 힘으로만 싸우고 있었다.
뿔이 난 이족들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원래도 굵던 사내의 팔뚝이 한 층 더 커지더니 금속성 빛을 뿜어내며 두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소름 돋는 바람소리와 함께 주먹이 금발 소녀에게로 향했다.
금발 소녀는 때마침 뿔이 난 이족 두 명과 격전을 치르고 있던 터라 거대한 남자가 날린 공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소저, 조심해요!”
금발 소녀가 공격을 받게 되자 금발 머리 청년이 다급하게 소녀의 앞을 막아서서는 두 손바닥으로 공격을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청년의 손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쾅!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금발 청년은 손바닥이 부서져 버렸지만 몸집이 거대한 사내가 날린 주먹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은 채 무겁게 금발 청년의 가슴을 뚫고서 지나갔다.
“목금!(穆金)”
금발 소녀가 놀라서 소스라치며 소리를 질렀다.
“소저, 빨리 가요!”
금발 청년은 큰 부상을 당했는지 얼굴 곳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더니 사나운 눈빛을 내비치며 거대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남자의 팔뚝을 곽 잡고는 온몸에 금빛을 크게 드리웠다. 청년은 몸이 일그러지더니 곧바로 금색 화염을 활활 내뿜으며 다시 거대한 남자를 덮쳤다.
뿐만 아니라 금색 화염이 주변으로 퍼져 옆에 있던 다른 뿔이 난 이족들을 공격했다.
이족들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몸을 한쪽으로 돌리며 피하려고 했다.
금발 소녀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지체하지 않고서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금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도망가다니! 어딜 가!”
몸집이 거대한 남자는 금색 화염이 드리워졌지만 고동색 빛으로 이루어진 갑옷을 두르고 있어서 금색 화염이 몸에 닿지 않았다.
“비켜!”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팔에 힘을 모아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금발 청년은 몸이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남자의 등 뒤에서 활활 타오르던 금색 화염도 흩어져버렸다.
남자는 이미 백 장 멀리까지 도망간 금발 소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웃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고동색 반월 다섯 갈래를 날렸다. 그 속도는 매우 빨라서 순식간에 금발 소녀를 거의 따라잡았다.
소녀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하얀 칼을 꺼냈고, 칼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며 빙글빙글 돌더니 수많은 칼날이 만들어져 날아오는 반월 다섯 갈래를 튕겨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작이 조금 느려져 이미 뿔이 난 이족 다섯 명에게 따라잡혀 둘러싸였다.
하지만 몸집이 거대한 남자는 곧바로 금발 소녀를 죽이지 않고 장난을 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만웅, 여긴 우리 금절 일족(金絕 壹族)의 땅이다. 너희 만룡 일족(蠻龍 壹族)이 이렇게 침입하다니. 천벌을 받을 거야!”
금발 소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
“쯧쯧, 역시 금절족에서 제일가는 미녀군. 아주 훌륭해. 몸매도 뛰어나고, 이렇게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워.”
몸집이 거대한 남자는 얼굴에 사악한 웃음이 어렸다. 그리고 혀를 끌끌 차며 금발 소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금발 소녀는 몸을 파르르 떨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소녀는 눈에 결연한 기색이 스쳤다. 이어 소녀가 칼을 가로로 들고는 자신의 목을 그으려 했다.
“자결하겠다고? 후후, 나부터 충분히 즐긴 다음에.”
남자가 추잡스러운 웃음을 드러내며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고동색 비늘이 나타나더니 단번에 칼을 잡아버렸다.
하지만 이때, 하얀 칼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하얀 그림자로 변하여 남자의 손을 그어버리고는 빠르게 남자의 목덜미를 스쳤다.
남자가 깜짝 놀라 피하며 금빛을 크게 드리우자 고동색 갑옷이 다시 나타났고, 동시에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금발 소녀를 공격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