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화. 거원족의 대장로
석목이 고개를 들어 하얀 원숭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구전현공.”
그러자 하얀 원숭이가 얼굴에 드러낸 악랄한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원숭이는 거대한 몸집을 앞으로 조금 옮기더니 다시 날카로운 금빛을 뿜어냈다.
“그만, 나는 당신들의 적수가 아니오.”
석목이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하얀 원숭이는 냉정을 되찾으며 물었다.
“자네는 누구지?”
“나는 백원왕의 후손이오.”
석목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천거원족 몇몇은 그 말을 듣고는 멈칫하더니 이내 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인족 따위가 성조의 후손이라고 지껄이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하얀 원숭이는 웃지 않았지만, 몸에서 번지던 빛은 더욱 밝아졌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석목은 곧바로 손바닥만 한 갈색 영패를 꺼내들어 원숭이들 앞에서 흔들었다.
비아냥거리며 웃고 있던 미천거원족들은 영패를 보는 순간 웃음을 멈췄다. 숲속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제 믿을 건가.”
석목이 말했다.
“우리 종족을 죽이더니 선조의 후예라고 사칭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조의 친령(親令)까지 위조하다니!”
하얀 원숭이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서 사람을 이렇게 공격하다니. 이게 미천거원 일족이 처세를 하는 방법인가?”
석목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자는 내력이 확실치 않은데다가 백석을 죽였다. 아마 천정의 앞잡일 테지. 같이 죽여 버리자.”
털이 하얀 원숭이가 소리를 질렀다.
몇몇 거대한 원숭이들은 조금 난처하게 굴었다. 그중 갈색 털이 난 원숭이가 말했다.
“백홍(白洪), 저 자가 들고 있는 영패에서 우리 미천거원 일족의 기운이 느껴지네. 대장로님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아.”
하얀 원숭이는 고개를 돌려 조금 전에 말을 꺼낸 원숭이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망(白綱), 장로님께 보고했어?”
“그건…… 맡은 일이 있으니까.”
갈색 원숭이는 하얀 원숭이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실대로 말했다.
“왜? 적을 해치우는 사소한 일도 대장로님께 보고를 올려야 직성이 풀리나? 너희가 움직이기 싫으면 내가 알아서 하지.”
하얀 원숭이가 말했다.
그리고 몸에 빛을 드리우더니 털을 꼿꼿이 세웠다.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오며 몸통도 터지듯이 크게 불어났다.
하얀 원숭이는 몸통이 불어나자 풍기는 기운도 강력해져 순식간에 키가 이백 장 가까이 되는 커다란 미천거원으로 변하여 주변 나무들을 짓눌러 버렸다.
주변에 있던 몇몇 원숭이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변하여 뒤로 물러섰다.
백홍이 주먹을 꽉 쥐고는 태산압정 같은 기세로 석목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만……”
이때 숲속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은 백홍은 움직이길 멈추고는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내키지 않는 듯이 쥔 주먹을 풀었고, 거대한 몸집도 빠른 속도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석목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키가 한 장 정도 되는 늙은 원숭이가 붉은 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비틀거리며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이 푸른 원숭이는 원래 몸집이 거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늙어가면서 몸집이 줄어들어 다른 원숭이들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하얀 눈썹을 바닥까지 드리웠으며 가냘플 정도로 마른 몸집에 품이 큰 붉은 피풍의를 걸친 채 밑단을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 원숭이는 아주 천천히 석목에게 걸어갔다.
뒤에는 갑옷을 입고서 방대한 기운을 풍기는 원숭이 전사들이 서 있었다. 전사들은 전부 경계하는 눈빛을 내비치며 천천히 늙은 원숭이의 뒤에서 걸어왔다.
“석두, 저 늙은 원숭이는 나이가 엄청 많아서 언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채아가 석목의 귀에 대고서 재잘거렸다.
“어이구…… 나이는 많아도 귀는 또 잘 들린단다.”
채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늙은 원숭이가 헛기침을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채아가 깜짝 놀라며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잰걸음으로 다가가 늙은 원숭이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후배 석목, 대장로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푸른 늙은 원숭이는 눈썹을 치켜뜨며 깊은 금빛 눈으로 평온하게 석목을 훑어보았다.
석목은 움츠러들지 않으며 두 팔을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백홍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백홍이 석목과 늙은 원숭이를 번갈아 보았다.
“신물을 주거라.”
잠시 후에 늙은 원숭이가 입을 뗐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색 영패를 꺼내 대장로에게 건넸다.
갈색 영패를 보자, 대장로의 희미했던 두 눈에서 밝은 빛이 감돌았다. 장로는 바싹 마른 팔을 소매에서 꺼내며 영패를 건네받고는 손바닥에 두고서 한참을 매만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석목에게 영패를 돌려주면서 물었다.
“선조님의 후손인데 왜 우리 미천거원족을 죽였는가?”
“대장로님께 아룁니다. 그 자는 천정과 결탁하여 몰래 미천거원족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사실을 들켜버리자 천정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 자를 죽였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백석이 너희 천정 앞잡이들이 머무는 거점을 발견하여 신분이 노출되자 죽인 건 아니고?”
백홍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제 결백을 증명하는 건 아주 간단합니다. 백석은 조금 전에 죽어서 아직 신혼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장로님은 충분히 수혼을 하셔서 진위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석목이 말했다.
“흥, 수혼? 백석은 시체마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려 신혼이 부서졌는데 어떻게 수혼을 하겠나?”
백홍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석목은 숨이 턱 막혔다. 분신이 백석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됐다.”
대장로의 거친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대장로의 이마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강한 영력 파동이 흘러나왔다. 긴 눈썹 두 갈래도 힘 때문에 흔들렸다.
푸른빛이 뿜어 나오자 부서져 버린 백석의 시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대장로의 이마에서 번지던 푸른빛이 점점 사라지며 흩날리던 눈썹도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장로님, 무언가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백홍이 물었다.
“백석은 우리를 배신하고 천정의 첩자가 된 게 맞다. 다만……”
대장로가 말했다.
“다만, 무엇입니까……”
백홍이 다급하게 물었다.
“신혼이 이미 심각하게 찢어져 아주 적은 내용만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석 도우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증명할 수 있겠구나.”
대장로가 멈칫하며 말했다.
“흥!”
백홍이 불쾌한 눈빛으로 석목을 째려보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석목은 백홍을 신경도 쓰지 않고서 대장로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보게나.”
대장로가 석목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따뜻해졌다.
“실은……”
석목은 미양 성역을 떠나 미천거원 일족을 찾아다니며 오소성에서 미천거원 일족을 만난 일과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이 하얀 거원이 나타나 다짜고짜 저를 죽이려 드는 와중에 장로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석목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대장로는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서 있었는데 눈에서는 빛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걸 보니 어떤 생각에 잠긴 것만 같았다.
백홍은 잠깐 망설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차가운 눈으로 석목을 쳐다보았다.
대장로의 모습을 보자 석목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미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홍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짓더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백홍이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석목을 덮치려할 때,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오해도 풀렸고, 석 도우는 백원왕의 신물을 가지고 있으니 나를 따라 종족이 머무는 땅으로 가지.”
“원하던 바입니다.”
* * *
잠시 후에 석목은 종족 사람들을 따라 산골짜기 암벽을 지나 미천거원 일족이 은거하고 있는 비경으로 들어갔다.
비경 입구에는 끝없이 숲이 펼쳐져 있었으며 높이가 백 장까지 뻗은 푸른 고목들이 우거졌고, 나무로 지은 건물들이 숲의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석목이 먼 곳을 바라보니 숲의 다른 한쪽으로 산맥이 이어졌는데 산에선 폭포가 쏟아졌으며 빛이 반사되어 맑은 은빛을 뿜어냈다.
숲으로 들어가자 석목의 어깨에 엎드려있던 채아가 석목의 귀에다가 대고서 말을 했다.
“석두, 여긴 천지 원기가 엄청 짙어.”
“조용히 해.”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대장로는 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가장 앞쪽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대장로님, 비경의 안팎으로 천지 원기가 어째서 이렇게 크게 차이 날까요?”
석목이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천정이 거의 만년 가까이 포기를 하지 않고서 우리 미천거원 일족을 몰살시키려고 했지. 백원왕이 운명한 후로 우리는 천정의 첩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 비경을 만들었네, 그리고 천지 원기를 대부분 이 비경 속에 끌어 모았지.”
대장로가 말했다.
천지 원기를 전부 한 곳으로 끌어 모으면 이 행성은 자원이 매우 적어질 터였으며 환경도 점점 나빠질 터였다. 환경을 이렇게 만들어야만 천정에게서 관심을 돌릴 수 있었고, 미천거원 일족은 최대한 숨을 수 있었다.
대장로는 석목을 데리고서 비경 안쪽 산봉우리로 날아가 위에 있는 커다란 대전으로 내려왔다. 대전은 매우 컸는데 크기가 족히 수십 장은 되었으며 건물은 모두 짙고 푸르렀으며 꼭대기엔 뾰족한 지붕이 있었다. 건물은 매우 특이했는데 얼핏 보면 푸른색 머리 같았다.
“석 도우, 들어오게나.”
대장로가 말을 하며 먼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안은 칠흑같이 검고 어두웠다.
밖에서 바라본 대전의 입구는 마치 검고 커다란 주둥이 같았다.
“석두, 조심해. 느낌이 이상해. 함정일 수도 있어.”
채아의 목소리가 석목의 심장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은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장로는 표정이 차분한 석목을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지웠다.
“가서 둘째 장로와 셋째 장로도 오라고 해라.”
대장로는 돌아서서 백홍에게 지시를 내렸다.
백홍은 한 마디 대답을 하고는 석목을 한번 쳐다보더니 밖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대장로와 석목은 자리에 앉아 담소를 주고받았다.
대장로는 석목에게 미양 성역이 처한 상황을 물어보았으며 석목은 숨길 것도 없이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청란성지가 멸망했다는 말을 들은 대장로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장로님, 거점에 있던 고만족은 제가 죽였지만, 천정 사람들은 이미 미천거원 일족이 여기에 은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장로님도 항상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천정은 세력이 막강하다. 여기가 노출되었다고 한들 내가 어찌하겠나. 거처를 옮기겠나? 다시 거처를 옮긴다고 하더라도 규모가 크게 움직일 텐데 천정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지. 차라리 여기서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네.”
대장로가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천거원 일족이 정할 일이니 나서서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