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백원왕이 다시 나타나다.
석목이 숨을 몰아쉬며 심각한 눈빛으로 파란색 피풍의를 두른 채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러 번 교전을 하며 석목은 눈앞에 선 또 다른 자신이 힘이나 무기, 술법이나 전투 습관까지 꼭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석목은 상대에게서 빈틈을 찾을 수 없어 당황스럽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전투를 거치며 석목은 힘이 다 빠져버렸지만,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진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퍽!
파란 피풍의를 입은 석목은 등 뒤에 펼친 흑백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석목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손에서는 여의빈철곤의 금빛이 크게 번졌다.
여의빈철곤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고, 수많은 금색 짐승들의 그림자가 금빛에서 뿜어져 나와 기세등등하게 홍수를 이루며 석목에게 향했다.
백수진황!
시공이 격렬하게 흔들리다가 짐승의 홍수가 주는 충격 때문에 단번에 찢어지며 강력한 힘이 석목을 묶어버렸다. 주변 공기도 움푹 꺼져버리면서 커다란 나무 우리를 만들어 석목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버렸다.
석목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백수진황’으로 수많은 적들을 공격했었는데 오늘 자신이 이 공격에 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석목은 처음으로 자신이 시전한 공법의 날카로움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석목은 금빛을 반짝이며 금의 힘으로 단번에 주변을 감싼 우리를 찢어버렸다.
등 뒤에 흑백 날개를 펼쳐 크게 빛을 드리우자 순식간에 크기가 몇 배나 불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흑백 부문들이 날개에 나타나 끊임없이 흘렀다.
흑백 날개가 빛을 반짝이며 석목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금색 짐승의 홍수가 허공에 부딪치며 석목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을 하나 만들어냈고, 천지 영기가 마치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파란 피풍의를 입은 석목은 ‘백수진황’을 시전하더니 기운이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이때, 뒤편에서 빛이 반짝이며 석목이 나타났다. 곤봉이 손에서 튕겨져 나와 호랑이가 동굴에서 뛰쳐나오듯 강하게 내리쳤다.
하늘을 흔들릴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공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졌고, 촘촘한 공간 균열이 여기저기서 번쩍였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은 파란 그림자로 변하여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손에 든 곤봉으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각도에서 석목이 날린 공격을 막아냈다.
석목은 눈에 희열이 스쳤다. 그리고 곧바로 번천곤을 소환하여 아직 허공에 서 있는 파란색 피풍의를 두른 석목에게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
석목은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성공할 확률이 팔 할은 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석목은 얼굴이 곧바로 굳어버렸다. 아무리 소환을 해도 영해 속에 깃든 번천곤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번천곤 뿐만 아니라 구룡쇄금갑도 무엇 때문인지 소환되지 않았다.
석목이 주춤하는 사이에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이 곧바로 틈을 노려 몸을 멈추더니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의 등 뒤에서 흑백 날개가 번쩍이더니 크기가 몇 배 나 더 커져서는 천천히 흔들리며 파란색 선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공간의 틈을 뚫고 나와 석목 가까이로 다가와서는 금색 곤봉을 휘둘렀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석목이 빠르게 여의빈철곤을 가로로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등 뒤에 있던 흑백 날개를 동시에 펄럭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두 갈래 환영으로 변하여 얽혔다.
탱! 탱!
둘은 흑백 날개를 최대한 빠르게 놀리며 쇠가 부딪치는 소리를 한참 동안 퍼뜨렸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간격이 매우 촘촘했다.
석목은 온 몸에 금빛을 끊임없이 번쩍이며 여의빈철곤으로 커다란 풍차를 만들어냈다.
정천립지, 풍소락엽, 역진팔방, 번천부지!
통천십팔곤의 다양한 곤법을 폭풍처럼 시전했으며 심지어 ‘백수진황’, ‘천지무극’도 몇 차례나 시전하였다.
번천곤과 구룡쇄금갑을 꺼낼 수 없으니 석목은 다른 수로 눈앞에 선 또 다른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여의빈철곤이 다양한 궤적을 그리며 줄줄이 뿜어져 나와 마치 현묘한 그림 같았다.
이 순간 석목은 또 다른 자신과 격전을 치르며 마치 매우 맑은 거울을 바라보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 보았다.
석목은 마치 신묘한 경지에 이른 듯이 지금 격전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평생 동안 배운 무도 공법들을 전부 시전하였다.
풍치십삼도법, 쇄석권, 칠살곤법, 통천십팔곤, 멸선곤법……
심지어 자신이 봤던 수많은 무도들까지 하나하나 뚜렷하게 마음속에서 흘러 지나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했다.
마음속에서 흐르기 때문에 무도들이 변화하였으며 마음속에서 사라지면 또한 사라질 터였다.
석목은 이런 무도 공법들이 지닌 깊은 뜻을 느끼자 몸속 진기가 기묘하게 흐르며 변화를 일으켜 풍기던 기운마저 흔들렸다.
마치 순식간에 풍치십삼도법의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가도 갑자기 쇄석권법의 맹렬한 기운을 드러냈다가 또 칠살곤법이 지닌 하늘을 찌를 것만 같은 살의를 풍기듯 했다.
다양한 무도가 지닌 깊은 뜻이 석목의 마음속으로 모여 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상태는 매우 현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석목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조금 풀리자 곧바로 허점을 드러냈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은 눈에서 빛을 반짝이더니 금색 곤봉을 앞으로 찔러 정확하게 석목이 풍기는 기운의 허점을 뚫고서 여의곤이 드리운 방어벽을 가로질러 종아리로 향했다.
석목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 곤봉은 이미 세 척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석목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흔들자 빈철곤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찔러오는 곤봉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석목이 당황하고 있을 때, 여의곤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희미한 환영으로 변하여 기이한 각도에서 순식간에 석목 앞에 나타났다.
‘탱!’
그리고는 큰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이 날린 곤봉을 막아냈다.
석목은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몸은 이미 본능을 따라 움직여 열 장 멀리까지 날아갔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도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하지만 곧바로 석목을 쫓아가 금색 곤봉을 휘두르며 통천십팔곤의 필살기인 ‘역발산하’를 휘둘렀다.
석목은 덮쳐오는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석목은 곤법 ‘역발산하’를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생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석목이 여의곤을 흔들어 현묘한 곡선을 그리며 똑같이 ‘역발산하’를 시전하였다.
석목이 시전한 ‘역발산하’는 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느려 보였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이 튕겨져 날아가면서 피풍의는 찢어져 버렸으며 가슴에 곤봉 흔적이 새겨졌다.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석목은 쫓아가지 않은 채 오히려 눈을 감고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통천십팔곤의 곤법들이 석목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통천십팔곤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은 공격을 하지 않고는 몸에 파란빛을 반짝이며 빠르게 가슴에 난 상처를 회복했다.
“하하하! 그렇군, 이게 진정한 통천십팔곤이지!”
호흡을 단 몇 번만 내쉰 후에 석목은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들어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림자가 반짝이더니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이 다시 한번 덮치며 손에 든 곤봉을 휘둘렀다.
석목이 담담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리고 오른손 손가락에 힘을 불어넣으며 팔을 들어 여의빈철곤을 흔들었다.
하늘이 찢어질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천십팔곤이 물 흐르듯 줄줄이 시전되었다. 예전에 보이던 사나운 기세와는 전혀 달랐지만, 하늘을 뒤덮은 곤봉의 기운은 열 배나 더 강력해졌다.
곤봉을 휘두르던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 주변으로 곤봉 그림자가 촘촘하게 밀려왔는데 극도로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
마치 화려한 꽃이 갑작스럽게 피어나듯 간간이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의 몸을 그어놓아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나타났으며 그 사이로 파란빛이 뿜어져 나왔다.
석목이 팔을 흔들자, 여의빈철곤이 희미해지더니 다시 한번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이 막는 걸 뚫고는 가슴을 내리쳤다.
펑!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은 몸을 흔들다가 움직이길 멈췄다. 몸에서 상처가 빠르게 찢어졌다.
이어서 “풉!” 소리와 함께 파란 피풍의를 두른 석목의 몸이 유리처럼 깨져버려 빛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짧은 숨을 몰아쉬던 석목이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폭포를 바라보았다.
폭포에서 일렁이던 물빛이 몇 번 반짝이더니 사라져 버렸다.
석목이 화색을 드러내며 폭포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순조롭게 폭포 속을 뚫고서 지나갈 수 있었다.
* * *
폭포 뒤에는 높이가 한 장 정도인 동굴의 입구가 있었는데 옅은 금빛이 반짝였다.
석목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속은 네다섯 장 되는 크기였으며 아무 물건도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석대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크기가 한 척 정도인 금색 상자가 석대 위에서 금빛을 뿜고 있었다.
금색 상자를 본 석목은 흥분한 얼굴로 석대를 향해 다가갔다.
이때, 허공에서 파동이 일더니 금색 갑옷을 입은 하얀 원숭이 한 마리가 서서히 나타났다.
날카로운 하얀 원숭이는 이목구비에서 따뜻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석목을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백원 선조님!”
석목이 걸음을 멈추고는 눈앞에 선 하얀 원숭이를 보며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석목은 이내 눈앞에 선 백원왕이 실체가 아닌 반투명한 허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내가 백공이다. 하지만 지금 네가 보는 건 내 잔혼 한 줄기일 뿐이지.”
백원왕이 말했다.
“제자 석목, 선조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석목은 곧바로 몸을 숙여 큰절을 올렸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인사였다.
백원왕의 피 한 방울이 아니었더라면 석목은 아마 평범한 세상 중에서도 외진 곳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무인으로 평생을 보냈을 터였다. 아마 자신이 머물던 행성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 * *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한다.”
백원왕이 말했다.
“첫 번째 시험이요?”
석목이 일어서서는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
“네가 자신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무도의 진리를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었다. 비록 너는 인족이지만 무도 실력만 두고 보면 천재가 틀림없다.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어.”
백원왕이 칭찬을 하며 말했다.
“칭찬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백원왕이 칭찬을 하자 석목은 기분이 좋았다.
“시험을 통과했으니 이《대범반무진경(大梵盤武真經)》은 포상으로 주겠다.”
백원왕이 손을 흔들자 석대에 놓인 금색 상자가 ‘휙!’ 열렸다. 상자에 든 책자가 석목 앞으로 날아왔다.
석목이 다급하게 책자를 받아들자 금색 상자가 ‘퍽!’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석목은 눈을 반짝였다. 금색 상자가 열리는 순간, 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볼 필요 없다. 상자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으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구나. 때가 되면 다른 시험들을 보게 되겠지.”
백원왕이 말했다.
“혹시 그 때는 언제인가요?”
석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는 내게 대물림을 받았지만 아직 천수 혈맥을 각성하지 못했으니 혈맥이 순수하지 않구나.”
백원왕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지금 적합한 공법을 수련하지 못해서 수련 경지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대범반무진경》은 내가 주로 수련했던 공법인데 지금 네게 가장 어울리는구나. 잘 깨닫고 경지를 빨리 올려야 천정과 싸울 수 있단다.”
백원왕이 말했다.
석목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저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알고 계신가요?”
“내게는 다 방법이 있지. 허허.”
백원왕이 담담하게 웃었다.
석목은 조금 전에 번천곤과 구룡쇄금갑이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았던 일을 떠올렸다. 혹시……
“구전현공을 아주 단단하게 수련했더구나. 이미 여섯 번째 단계까지 대성했구나. 하지만 앞으로 수련을 할 땐 꼭 ‘평형(平衡)’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두길 바란다.”
“평형……”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생각에 빠졌다.
“됐다. 여기에 들어와 시간이 꽤 흘렀으니 빨리 나가봐라. 천수 혈맥을 각성하면 다시 와서 두 번째 시험을 볼 수 있단다. 그때면 또 다른 포상을 네게 주마.”
석목이 더 묻기도 전에 백원왕이 말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석목은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몸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