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화. 넷째 장로
지하 석실, 장로 세 명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석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목이 비석에 들어간 지 한 시진이 넘었다. 대장로와 백장은 차분한 표정을 지은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비는 잔뜩 초조한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며 석실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이때, 잠잠하던 비석에서 빛이 크게 번지더니 검은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세 장로는 각각 다른 눈빛으로 비석을 바라보았다.
스읍!
석목이 반짝이며 튀어나와 바닥으로 내려왔다.
장로 세 명은 석목이 나온 것을 보자 전부 석목에게로 우르르 다가갔다.
“석목 도우, 철원령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족장의 후손이 틀림없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무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대장로가 석목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다 종족의 안위를 위해서 그러셨다는 걸 잘 압니다. 조심스러운 건 좋은 일이지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석목이 말했다.
“대장로님, 석목 도우가 족장의 후손이라는 게 증명되었으니 약속대로 석목 도우를 족장으로 모십시다.”
백장이 석목 옆으로 다가가 대장로와 백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대장로가 머뭇거렸다.
“둘째 장로, 우선 이 일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네. 우선 확인해야할 일들이 있지.”
백비가 말했다.
“석목 도우, 비경에 들어갔는데 어떤 수확을 얻었는가? 족장의 신물을 가져왔는가?”
백비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이 멈칫했다. 족장의 신물?
“맞습니다. 백공 족장이 천정과 싸우기 전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족장의 신물을 이 비경에 넣어두었습니다. 석 도우가 족장에게 대물림을 받아 철원령으로 비경에 들어갔으니 무언가 가져온 물건이 있을 겁니다.”
대장로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석목은 침묵을 지키다가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세 장로에게 대충 말해주었다.
백원왕의 잔혼이 비경에 남아있다는 말을 듣자 장로들은 흥분하여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쉽게도 제 실력이 부족해 첫 번째 시험만 통과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원왕이 저에게 공법 하나를 상으로 주셨습니다. 족장의 신물은 따로 없었습니다. 아마 안에 있겠지요.”
석목이 말했다.
“석 도우가 족장의 신물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족장으로 받아드릴 수 없지요. 족장의 자리는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워낙 큰일이라 자리에 앉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요.”
백비가 눈을 풀며 말했다.
“예전에 우리가 약속을 했을 때 족장의 신물을 꼭 가져와야만 족장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는 정하지 않았소. 셋째 장로, 계속 말리는 걸 보니 혹시 족장의 자리를 탐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자네 행동거지를 보면 또 누가 자네를 족장이 되도록 허락하겠나?”
백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차갑게 웃었다.
“당신……”
백비는 화가 나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무엄하도다! 석목 도우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지금 뭐하는 짓인가!”
대장로가 안색을 굳히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찍었다. 그러자 석실이 격하게 흔들렸다.
백장과 백비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석 도우, 볼 면목이 없습니다.”
대장로가 고개를 돌려 석목에게 말했다.
석목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장로, 셋째 장로가 한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석목 도우는 족장의 후손이 맞지만 족장의 신물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 우리가 족장으로 모신다고 해도 종족 사람들이 받아들이긴 쉽지 않겠지요.”
대장로가 침묵을 한 후에 말했다.
백장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한쪽으로 다가가 서 있었다.
“석목 도우, 비록 도우가 미천거원 일족은 아니지만 우리 족장의 후손이시니 혹시 별다른 일이 없다면 우선 여기 머물면서 넷째 장로가 되시는 건 어떤가요? 종족이 처한 상황도 살펴볼 겸 추후에 족장의 신물을 받으셨을 때 도우님을 다시 족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떠신가요?”
대장로가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목이 침묵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석목은 족장 자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여긴 천지 영기가 짙어서 수련하기 매우 적합한 곳이라 이 기회에 《대범반무진경》을 제대로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백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행입니다. 바로 거처를 배정하라 일러두겠습니다.”
대장로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석목과 장로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석실에서 나왔다.
* * *
일각 후.
푸른색 산봉우리 근처, 세 갈래 빛이 먼 곳에서부터 날아왔다. 그들은 석목과 두 미천거원족이었다.
채아도 이미 석목의 어깨에 앉아있었는데 두 볼이 뽈록하게 튀어나온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아보였다.
두 미천거원은 가까이 있던 푸른 산봉우리를 가리켰다가 다시 석목에게 손을 굽히며 말했다.
“넷째 장로님, 지내게 되실 거처는 사타봉(四駝峰) 위에 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드려요.”
“따라 오세요.”
두 거대한 원숭이는 넓고 네모난 비주를 소환하여 멀리 날아갔다.
석목도 곧바로 용우비차를 불러 원숭이들을 따라갔다.
“석두, 아까 전에 그 붉은 원숭이 녀석은 정말 너무한 게 아니야? 어쨌든 백원왕의 후손인데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화가 나서 못 참겠어.”
채아가 투덜거렸다.
“괜찮아, 두 장로는 나를 인정했잖아.”
석목이 말했다.
“그 금색 원숭이는 꽤 좋아 보이던데. 그리고 늙은 원숭이도 괜찮고. 넷째 장로 자리를 내주었으니 영석과 보물을 적잖이 주겠지?”
채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먹보야, 하루 종일 영석과 보물만 생각하니. 넷째 장로는 명분일 뿐이야. 아무런 실권이 없지. 중요하지 않은 위치니 너도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는 마.”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 말을 들은 채아는 힘이 풀려 석목의 어깨에서 주저앉았다.
* * *
잠시 후에 석목과 두 원숭이는 사타봉 산중턱으로 내려왔다.
산중턱에 자리한 푸른 숲으로 내려온 일행은 청석이 깔린 넓은 산길을 따라 숲의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봉미송(鳳尾松) 숲을 지나 석목의 동부 앞에 도달했다.
여기엔 외따로 붉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크기가 족히 수십 장이나 되었으며 산에서도 가장 앞쪽과 붙어있었다.
석목은 건물 앞으로 다가가 대전의 문을 열고 안쪽을 둘러보았다.
안쪽은 텅텅 비어있었으며 별달리 놓인 물건들은 없었다. 양쪽에 각각 별실이 하나씩 있었으며 뒤편에도 큰 문이 하나 있었다.
“두 분께서 수고하셨습니다. 별일 없으면 돌아가세요.”
석목이 두 원숭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둘은 전혀 떠나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중 털이 노란 원숭이가 말했다.
“저희는 대장로님께 명을 받아 넷째 장로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러자 석목은 잠깐 침묵을 한 후에 말했다.
“좋습니다. 저도 여긴 처음 와서 아직 익숙하지 않군요. 아, 두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둘은 석목이 하는 말을 듣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이 의아하게 굴었다.
노란 원숭이가 말했다.
“넷째 장로님, 저는 백요(白垚)라고 합니다.”
“저는 백풍(白風)이라고 합니다.”
푸른 원숭이가 말했다.
“백요, 백풍,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두 원숭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석목이 채아를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가자 두 원숭이는 따라서 들어가지 않았다. 둘은 대전의 문을 닫고는 문 옆에 서 있었다.
대전을 한 바퀴 둘러보니 너무 넓고 공허해 보이는 것 말곤 불편한 점은 없었다.
왼쪽 편실은 손님방이었으며 오른쪽은 안방이었다. 안에는 일상품들이 진열되어있었는데 전부 엄청 컸다. 의자만 해도 석목이 쓰던 침상과 크기가 비슷했다.
방에서 잠깐 머문 후에 석목은 대전의 벽 뒤에 있는 나무문을 열고서 나갔다.
대전 뒤편은 정원이었는데 푸른 대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대나무 숲 뒤로 드넓은 비밀 석실이 하나 있었다.
비밀 석실로 들어간 석목은 석실문을 닫고는 동굴 안에 놓인 돌침상에 걸터앉았다.
“석두, 그런데 저 자들이 왜 너를 넷째 장로가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둬두는 것 같지? 밖에 서 있는 두 원숭이도 우리를 감시하러 온 것 같아.”
채아가 기분나빠하며 말했다.
“미천거원 일족이 이렇게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숨어서 사는 이유는 천정의 시선을 피해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지. 나는 여기에 처음으로 왔으니 일족에겐 여전히 외부인이나 다름이 없어. 조심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석목이 말했다.
“석두, 앞으로 비참한 생활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채아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뒤편에서 백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넷째 장로님, 백장 장로께서 오셨습니다.”
“음, 금색 원숭이가 왔다고?”
채아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빨리 모셔주세요.”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채아를 데리고 석실에서 나와 문을 열고는 둘째 장로를 맞이했다.
백장은 들어오자마자 기분이 좋은 웃음을 드러내며 물었다.
“석목, 불편한 점은 없는가?”
석목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백장이 이렇게 도우나 또는 다른 칭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주니 훨씬 친근했다. 보아하니 백장 장로는 석목을 진심으로 반기는 것 같았다.
“백장 장로님, 신경을 써주시서 감사합니다.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목이 말을 마치기 바쁘게 채아가 오히려 불만인 듯이 말했다.
“우리를 감시하려고 따라다니는 커다란 기둥 같은 녀석들만 없어도 많이 편할 것 같은데!”
“채아, 무례하게 굴지 마.”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 앵무새 영총은 성격이 호탕하군! 헌데 백요와 백풍은 대장로를 모시는 사람들이지. 우리 쪽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백비 녀석과는 관련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백장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당신 쪽이라니요? 백장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미천거원 일족도 계파가 나뉘나요?”
석목이 의문스러운 듯 말했다.
“실은 종족은 계파를 나누고 있는데 나처럼 팔황고족, 그리고 여러 성역에서 천정과 딱히 관련이 없는 세력을 연합하여 천정을 쳐서 백공 족장과 죽은 종족 사람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는 쪽은 응(鷹)파라고 하지.
그리고 백비는 우리 미천거원 일족이 아직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천정과 정면충돌을 하는 걸 꺼려하는 쪽이라고 볼 수 있네. 우선 계속 은거 생활을 하며 수련을 통해 실력이 강해지면 그때 천정에 복수를 하겠다는 쪽이지. 그래서 합(鴿)파라고 부르네.”
백장이 말했다.
“실은 백비 장로님이 하신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후후, 그런 말은 그냥 하는 소리네.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나 다름없지. 숨어서 실력을 키울 때까지 천정이 기다려 주진 않을 테니까. 최근 천 년 동안 천정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쫓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천 년 가까이 숨어있었는데 그렇다고 지금 실력을 얼마나 되찾았을까? 오히려 천 년 전 백공 족장이 우리를 이끌 때보다 훨씬 뒤떨어졌지.”
백장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종족은 오랜 세월 동안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소통도 하지 않았네. 지금 미양, 지음, 심지어 천하 성역에서도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일세. 백 년 전부터 우리 종족이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지경이니.”
백장은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