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반무신구(盤武神軀)
“몰라.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워.”
채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석목이 한참 고민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네게 매우 날카로운 보검이 한 자루 있어. 그 보검을 담으려면 매우 견고한 칼집이 있어야겠지?”
“이렇게 말하니까 알겠네. 그러니까 많은 영석을 먹으려면 나처럼 튼튼한 위장과 배가 있어야 된다는 소리지?”
채아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 먹보야.”
“조극은 이미 일곱 번째 단계를 대성했어. 석목, 네가 말한 대로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절대 따라잡을 수 없지 않을까?”
채아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비관할 필요는 없어. 나에겐 도전이자 기회야. 조극이 일곱 번째 단계를 수련하는 걸 마쳤지만 네 가지 속성이 평형을 이루도록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아마 적잖은 시간을 써야하겠지. 여덟 번째 단계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테고, 아홉 번째 단계는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 내겐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기회는 있어.”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두, 네가 이렇게 말하니 내 어깨가 더 무거워지잖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얼마나 남았다는 거야?”
채아가 물었다.
“조극이 지닌 자질과 천정이 지원해주는 자원으로 봤을 때, 십 년 안에 조극은 네 가지 속성을 완벽하게 뭉칠 수 있을 거야. 천정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으니 아마 여덟 번째 단계를 수련하며 필요한 물속성 본원의 물건도 이미 전부 가지고 있을지 몰라. 만약 조극과 동시에 여덟 번째 단계를 수련하고 싶다면 나는 십 년 안에 일곱 번째 단계를 수련해내야만 해.”
석목이 침묵을 한 후에 말했다.
“십 년, 다행이네. 몇 달이라고 했더라면 난 조급해서 죽었을 거야.”
채아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아봐 줘. 너만 믿을게.”
석목이 또 당부를 했다.
“알았어. 석두, 걱정하지 마. 최선을 다할 거니까!”
채아가 돌탁자에 서서는 날개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물, 불속성 본원의 물건은 매우 귀한 것들이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백장 장로님께 물어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어.”
석목이 말했다.
“그래, 내가 또 정보는 기가 막히게 알아내잖아.”
채아가 우쭐댔다.
그러자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 잘 도망가고 또 잘 먹고, 그 다음으로 잘하는 게 정보를 캐내는 일이잖아.”
“됐어. 너는 빨리 폐관수련이나 해. 나는 간다.”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려고 할 때였다.
“채아, 잠깐만. 잊어버릴 뻔했는데 해야 할 일이 더 있어.”
석목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다급하게 채아를 불렀다.
“무슨 일?”
채아가 다시 석목에게로 날아와서 물었다.
석목이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기에 있는 재료들을 전부 기억해두었다가 관련된 정보를 알게 되면 바로 알려줘.”
석목이 종이에 적힌 검은 글씨 일고여덟 줄을 가리키며 당부했다.
“곤륜응금석(崑崙凝金石), 천하성사(天河星沙), 낙해명정(落海冥晶)……”
채아가 종이에 적힌 영재들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읽더니 석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기억했어.”
“좋아. 꼭 조심해서 다니고.”
석목이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저장 반지를 하나 꺼내서는 채아의 발목에 끼워주었다.
“석두, 지금 뭐하는 거야?”
채아가 놀라며 물었다.
“안에 영석이 들었어. 아껴 먹어.”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채아는 좋아서 난리법석을 떨더니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그래, 알았어.”
“가봐.”
채아가 가자 석목은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책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백원왕의 잔혼이 석목에게 준 《대범반무진경》이었다.
석목은 책자의 가장 첫 장을 들여다보았다. 책자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촘촘한 금색 글자들이 나타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유를 추구하며 먼 곳을 떠돌아다녔다. 천하, 미양, 지음 삼대 성역을 떠돌며 많은 것들을 얻어냈다. 이 《대범반무진경》은 내가 지음 성역에 자리한 태고의 살진(殺陣)에서 얻은 고전비급이다. 머나먼 시기에 세력이 막강했던 종족인 반무족(盤武族)에서 내려오던 비전이다.
처음 수련을 할 때, 나는 이 공법이 지닌 대단한 점을 깨우치지 못했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 뒤로 갈수록 적힌 내용이 절대로 짐작할 수 없는 신묘한 공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특별히 이 비책을 네게 물려준다. 꼭 열심히 수련을 하여 빨리 화신의 단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이건 백원왕이 남긴 말이었다.
석목이 책자에 나타난 글씨를 다 읽자, 금색 글씨가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책자에서 금색 불꽃이 타오르며 그 장만 사라져버렸다.
“천지무극, 우주홍황, 범성입신, 반무신구의 발전과 변화……”
《대범반무진경》에 적힌 목차는 매우 길었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문체로 쓰여 있어 내용이 난해해 석목은 총강만 반 시진을 읽었다.
석목이 한 장씩 읽을 때마다 읽은 장에 적힌 글씨가 사라지며 종이가 활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총강을 읽은 석목은 이 공법을 쓰는 용도를 깨우칠 수 있었다. 대범반무진을 쓰는 취지는 수련을 해서 발전하여 수련자의 육신과 신혼을 단단하게 만들어 막강한 경지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총강을 통해 석목은 공법이 총 세 단계에 아홉 단락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 단계는 제목이 초범(超凡)이었다. 천위 수련 경지를 기점으로 세 단락을 수련하면 천위 정상에 도달할 수 있어 육신과 신혼이 평범한 수련자들보다 훨씬 강력해져 금과 옥을 부숴버릴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제목이 입성(入聖)이었다. 세 단락을 모두 수련하면 성계 정상에 도달하여 신마의 육신을 지니게 되었는데 몸집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몸을 최대 천 장까지 늘려 평범한 종족과는 달리 산을 옮기고 바다를 통제하는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제목이 연마(衍魔)였다. 세 단락은 각각 신경과 같았는데 세 번째 단계까지 수련을 하면 진정한 신마의 육신을 지니게 된 셈이나 다름없다.
묘사에 따르면 신경 초기 수련자는 천지의 도를 깨우쳐 단번에 천장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신경 중기일 때는 신혼이 허(虛)로 변할 수 있어서 수련자는 머리 하나와 팔 두 개가 더 자라날 터였다. 신경 후기에 도달하면 수련자는 머리 하나와 팔 한 쌍이 더 생겨나 결국 머리가 세 개 달렸으며 팔이 여섯 개 달린 반무신구(盤武神軀)가 된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석목은 책자에서 시선을 옮기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읽은 석목은 꿈에서 백원왕과 천정이 다투던 광경이 떠올랐다. 키가 천 장, 심지어 만 장이나 되는 거인이 구름과 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놀라운 모습을 석목은 꿈에서 마저 동경했다.
석목이 처음 백원왕을 봤을 때, 백원왕은 머리가 세 개 달렸으며 팔이 여섯 개였다. 석목은 산처럼 거대한 몸집을 보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던 그 위압감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마치 가볍게 팔만 들어 올려도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메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석목은 지금 그런 공법을 손에 넣었다. 이제 이 공법을 잘 수련해서 구전현공과 결합시키면 석목도 막강한 실력에 오를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석목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서둘러 수련을 시작하지 않았다.
석목은 책자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몸에서 빛을 반짝이자 분신이 나오더니 아무 말 없이 석목의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천하 성역에 자리한 이 행성엔 적잖은 마기가 내재되어 있어 이 기회에 분신은 홍루마조의 사체로 얻은 힘을 제대로 깨우칠 수 있을 터였다.
분신은 팔짱을 끼고는 손가락을 짚으며 어려운 법결을 시전하였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분신의 가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붉은빛이 한 덩이 나타나 가슴의 혈맥과 근육을 붉게 물들여 놓았고, 시뻘건 심장이 가슴에서 힘차게 쿵쾅거렸다.
이어서 사지 곳곳에 붉은빛이 밝게 번지더니 근육 안쪽에 자리 잡은 흰 뼈가 훤히 드러났다.
공기 속에 섞여있는 마기가 분신에게 몰리더니 잠깐 사이에 안개 같은 마기가 뭉친 구체로 변하여 분신을 완전히 감싸버렸다.
한참을 앉아있던 석목은 일어나서 비밀 석실 곳곳에 부문이 가득 적힌 흰색 뼛조각과 작은 깃발들을 꽂았다. 그리고는 다시 돌침상 위에 앉아《대범반무진경》을 펼쳐 들었다.
책자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작은 글씨들이 나타났다.
석목은 첫 단락에 적힌 공법 구결 첫 번째 단계를 외우며 오른쪽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책자에 적힌 대로 현묘한 법결을 시전하였다.
석목이 입을 파르르 움직이자 비밀 석실에서 현묘한 주문을 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경을 읽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변에 드리운 영기가 전부 석목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기존에 하던 수련과 다르게 영력이 모여들어 석목의 몸속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어가는 게 아니라 몸에 쌓이고 쌓여서 조금씩 스며들어가는 정도였다.
“후우.”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영력을 흡수해 시원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몸 위에 영기가 두텁게 쌓여 모공마다 영력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마치 수많은 바늘이 피부를 찔러 몸속으로 비집으며 들어가는 느낌인지라 말도 안 되게 고통스러웠다.
* * *
대략 반시진 후에 석목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도록 찡그렸다.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혔고, 표정도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전혀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석목의 몸에서 희미하고도 하얀빛이 번쩍였는데 마치 피부가 호흡이라도 하는 듯이 불어났다, 줄어들었다 반복을 했다. 매우 기이하며 신비스러운 일이었다.
“후……”
석목은 또 다시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제 막 적응이 되었는지 안색이 조금 전보다는 편안해 보였다.
석목이 다시 법결을 바꾸자 주변에 드리운 천지영기가 더욱 빠르게 흘러들어 석목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분신은 석목과 가까이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 석실에 드리운 천지원기가 뚜렷하게 갈렸다. 영력은 대부분 석목에게로 몰려갔으며 마기는 분신에게로 빨려들었다.
비밀 석실 안에서 하얀빛과 검은빛이 정확하게 나뉘었는데 그 모습이 조화를 이루었다.
* * *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석목은 비밀 석실에서 십 년이나 수련을 하였다.
깊은 밤, 별들이 반짝이던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어 사타봉으로 쏟아진 별빛을 모두 삼켜버렸다.
온 사타봉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미천거원 일족이 머무는 비경은 매우 광활하여 아무도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알아챈 원숭이가 있었는데 바로 푸른 원숭이였다.
십 년 동안 사타봉에선 일정한 주기마다 기이한 현상이 한 번씩 일어났는데 늙은 푸른 원숭이는 매번 먼 곳에서 사타봉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푸른 원숭이는 드넓은 대전 앞 광장에 홀로 서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며 눈에서 기이한 빛을 뿜으며 어둠 속을 뚫고선 사타봉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우르릉!”
막혀있는 것만 같은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먹구름에서 하얀빛이 줄줄이 밝아졌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천천히 눈을 뜨며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고작 성계인데 이런 위력을 내뿜다니, 뇌수를 깨어나게 한 건가. 예전 백공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매우 놀랍군.”
푸른 원숭이가 허리를 굽히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이때, 푸른 원숭이는 안색이 갑자기 바뀌더니 이내 믿기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이건……”
사타봉 중턱에서 붉은빛이 밝아지며 화려한 연꽃이 활짝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