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기회
사타봉에 자리한 비밀 석실 안, 석목은 여전히 돌침상에 가부좌를 틀고서 앉아있었지만 분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석목은 지금 온몸에 찬란한 하얀빛을 두른 채로 두 눈을 꾹 감고 있었으며 이마엔 힘줄이 툭툭 튀어나와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석목 아래에 돌을 빚어 만든 검은 침상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침상에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훅!’ 소리와 함께 돌침상에서 붉은 화염이 활활 타오르더니 곧바로 석목을 삼켜버렸다.
거센 불길이 제멋대로 흔들리며 석목의 몸을 달구었고, 석목이 두르고 있던 하얀빛은 화염이 타오르자 붉은색으로 변하였다.
“으아……”
석목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큰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붉은 화염이 석목의 입에서 뿜어져 나와 비밀 석실의 천장을 검게 태워버렸다.
우르릉!
이때, 구름 속에서 오랫동안 눌려있던 짐승이 드디어 하늘을 울리는 소리를 냈고, 굵기가 백 장 정도 되는 커다란 번개 기둥이 먹구름 속에서 쏟아지며 사타봉을 ‘쿵!’ 내리쳤다.
쾅, 쾅!
터지는 소리와 강력한 진동이 비경에 울려 퍼져 거원 일족들은 놀라서 떠들썩해졌다.
수많은 그림자가 사타봉 방향으로 우르르 모여들어 빛기둥이 쏟아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타봉은 윗부분이 무너졌으며 부서진 암석들이 석목 주변을 전부 묻어버렸고, 돌들이 쌓여있는 자리엔 얇은 번개와 붉은 화염이 섞여있었다.
둘째 장로 백장이 가장 먼저 사타봉에 도착했는데 나이가 든 얼굴에는 온통 놀라서 믿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금빛 털이 화염에 비쳐 파르르 흔들렸다.
백장 뒤로 갑옷을 입은 백홍이 두 망치로 땅을 짚고서는 사타봉 방향을 바라보았다. 백홍은 안색이 복잡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셋째 장로 백비도 다급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미리 도착한 둘과 달리 백비의 얼굴에선 걱정스러운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매우 좋아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습니까? 제가 가짜라고 했잖습니까. 안 믿으시더니. 저기를 보시지요. 저 멍청이가 고작 인족의 육신으로 대범진무진경을 강제로 익히더니, 지금쯤 아마 번개에 맞고서 불에 타버려 시체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백비가 고소해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백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장은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어렸고, 몸도 조금 처진 것 같았다.
“상황도 제대로 파악치 못하는 인족놈에게 희망을 거는 것보다 백홍에게 기대를 해보는 편이 더 좋을 겁니다. 저는 백홍이 근 천 년이래 우리 종족에서 백공 족장의 의발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백장은 몸이 조금 굳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백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백홍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백비를 향해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백공의 갑옷과 번천곤은 귀한 보물이라 절대로 훼손되지 않았을 게다. 빨리 가서 가져와라.”
백비가 말했다.
“네.”
백홍이 대답을 하더니 사타봉이 무너진 폐허 속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철원령도 잊지 말고.”
백비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백홍은 조급한 마음에 대충 대답을 하고는 큰 걸음으로 폐허 속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커다란 돌들을 옮겼다.
하지만 돌을 다시 내려놓기도 전에 갑자기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칙, 칙, 칙!
돌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수많은 돌조각이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자 돌아가려던 둘째 장로가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사타봉을 바라보았고, 폐허 속에서 눈부신 금빛이 밝아지며 밤하늘을 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백홍은 이미 폐허에서 뒤로 물러나 폐허를 바라보았다. 백홍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때, 커다란 손바닥이 폐허 속을 뚫고서 나왔다.
이어서 돌더미 속에서 ‘와르르!’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돌들이 주변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또 다른 커다란 손이 하나 뻗어 나왔다.
두 손이 땅을 짚자 어마어마한 몸집 하나가 폐허 속에서 일어섰다.
웅장한 몸에 근육을 휘감았으며 몸에 두른 금색 갑옷은 가슴 부위에 용 아홉 마리가 요동을 치고 있었는데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엔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이 거인은 석목이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백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석목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백장은 눈에서 다양한 빛을 번쩍이며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는지 하하 웃기 시작했다.
“백공의 영혼이 살아있어. 우리 종족에겐 행운이군.”
그리고 멀리 있는 대전 앞에 서 있던 대장로는 눈에서 기쁜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대장로는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더니 돌아서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으 - 아……”
석목은 처음으로 거인의 몸으로 변했기 때문에 몸속에 담긴 터질 것만 같은 힘을 느끼며 더 이상 기쁨을 숨길 수 없어서 통쾌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석목 주변에 드리운 공기가 마구 흔들렸다.
* * *
잠시 후에 석목은 빛을 반짝이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석목이 변신한 거인은 미천거원 일족처럼 육체의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은 같았지만 본질은 달랐다.
미천거원 일족이 백 장, 심지어 천 장까지 커질 수 있는 이유는 몸속에 흐르는 천수혈맥을 시전했기 때문이었지만 석목이 변한 거인은 공법을 기반으로 방대한 영력을 써서 몸을 지탱해야만 했다.
시간이 채 일주향도 지나기 전에 석목의 몸에 깃든 영기는 거의 절반이나 소모되었다.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 앞에서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원래 몸으로 돌아왔다.
석목은 혼자서 생각했다. 거인이 되어 번천곤을 소환하면 단 한 방만으로도 신경 초기 강자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려 신경 중기 강자 앞에서도 목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 *
며칠 뒤, 사타봉 옆에 동가 하나가 새롭게 생겼다. 푸른색 피풍의를 입은 석목이 몸에 화려한 빛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석목의 가슴에 그려진 세 가마가 각각 푸른빛, 노란빛, 금빛을 뿜어내며 서로 호응하면서 정(鼎: 세 발 달린 솥, 제례를 할 때 사용한다.) 모양을 이루었다.
“역시, 앞서 수련한 속성의 힘이 몸속에서 평형을 이뤄야만 구전현공의 다음 단계를 수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때가 되는군.”
석목이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혼잣말을 했다.
지금 석목은 몸속에 깃든 영력이 원래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돈다는 걸 느꼈다.
순간, 석목의 가슴에 나타난 가마 허영이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실에서 나와 동부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첩첩산중은 온통 푸른색이었으며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녔고,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평온한 경치였다.
이때, 석목의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보이는 평온한 광경이 옛 청란성지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 고요와 평온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석목이 동부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는 동안 채아는 열심히 밖을 돌아다니며 석목을 위해 정보를 모았다.
비록 채아는 물과 불, 두 가지 본원의 물건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소식을 가져왔다.
천정은 천하 성역에 공격을 퍼부으며 점점 적들을 조였다. 적잖은 행성들이 몰락하였으며 미천거원 일족을 지켜보는 첩자들도 점점 많아졌다. 첩자들은 각별히 조심하며 다가왔지만 채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긴 천하성역에서도 변두리라 당분간 천정이 대놓고 쳐들어올 일은 없었다.
이때,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먼 곳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영롱한 광점 하나가 먼 곳에 나타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다가왔다. 그 광점은 채아였다.
“석두, 드디어 나왔구나! 계속 폐관수련을 했더라도 내가 널 불러 냈을 거야.”
채아가 석목의 어깨로 날아왔다.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석목이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랫동안 고생스럽게 행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큰 사건을 두 가지 알아냈어! 하나는 천정과 관련된 사건이고, 또 하나는 천봉 일족과 관련된 일이야. 어떤 것부터 들을래?”
채아가 야박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말이나 해.”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손가락으로 채아의 머리를 튕기며 말했다.
“아야, 아파! 그래, 그럼 천정과 관련된 일부터 알려줄게. 보름 전에 무슨 일인지 천정이 근처 행성들로 보냈던 놈들을 전부 다시 데려갔어. 미천거원 일족을 지켜보던 놈들도 전부 사라졌지.”
채아가 머리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지?”
석목은 의아했다. 천정이 한결 같이 부리던 수작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모르지. 천정이 큰일을 하나 벌이려고 하는데 인원이 부족해 전부 불러들였다고 누군가 그러더라고.”
채아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 천봉 일족과 관련된 일은 뭐야? 수아와 관련된 소식이 있어?”
석목은 조급히 물었다.
천하 성역에 온 이후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종수였다.
아쉽게도 천봉 일족은 거원 일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천하 성역은 지금 매우 혼잡하여 종수가 천봉 일족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찾아갈 수도 없었다.
거원 일족이 지지도 하지 않았으며 여길 떠날 정당한 이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봉 일족에는 많은 신경 고수들이 있어서 종수를 찾는다고 해도 쉽게 데려올 수 없을 터였다.
그리하여 채아에게 종수의 행적을 알아봐달라고 했지만……
“아니. 정보를 사고파는 세력에게 일을 맡겼는데 종수의 소식은 알아내지 못했어.”
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석목은 이미 짐작을 했지만 실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 일은 종수와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천봉 일족에겐 큰일이야.”
채아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
석목이 미간을 치켜뜨며 물었다.
“천봉 일족에서 새로운 성녀가 각성을 해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주는 축전을 거행할 거래. 천봉 일족이 천하 성역에 있는 세력들을 대부분 초대했어.”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안색이 바뀌었다.
물론 석목은 성녀 대전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정정당당하게 천봉 일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네가 이 기회에 종수를 찾으러 갈 줄 알았어. 그래서 소식을 알자마자 곧바로 날아온 게 아니겠어.”
채아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선급 영석을 하나 줄게!”
석목이 말했다.
“정말이지? 거짓말하면 안 돼.”
채아가 난리법석을 떨며 말했다.
“그럼.”
석목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더니 그는 몸을 날려 멀리 날아갔다.
* * *
잠시 후에 석목은 회색 산봉우리로 내려왔다.
산봉우리에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궁전이 하나 있었는데 궁전에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전 입구에는 미천거원 일족 문지기가 두 명 서 있었다.
“넷째 장로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이 석목을 보더니 인사를 올렸다.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대장로님은 안에 계시냐?”
석목이 물었다.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바로 통보하겠습니다.”
미천거원이 말을 하고는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들어갔던 미천거원이 다시 돌아오며 말했다.
“넷째 장로님, 대장로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전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