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성녀축전
대전은 매우 간단한 장식만 있었으며 양쪽에 커다란 돌기둥이 열 몇 개 서 있었다. 대전 가운데에는 크기가 십 장 정도 되는 석대가 하나 있었다.
석대 위에는 부문들이 줄줄이 새겨져 진법을 하나 이루었다. 진법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림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수많은 광점들이 찬란한 은하수를 만들었다.
대장로는 석대 옆에 서서 은하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막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만 같았다. 석목이 들어왔는데도 대장로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대장로님.”
석목이 대장로를 불렀다.
“석 장로군. 어서 앉게나.”
대장로가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서 석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서 앉았다.
“후후, 나이를 먹으니 넋을 놓는 게 일상이 되었군.”
대장로가 자리에 앉으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대장로님은 이미 신경에 도달하셨고 연세도 많으시니 심려치 마시지요.”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십 년 동안 석목은 시간을 들여 미천거원 일족과 관련된 전집들을 읽으면서 미천거원 일족에 대해 알아보았다.
미천거원 일족은 혈맥이 매우 순수한 천수 종족으로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었다.
대장로는 겉보기에는 비틀거리며 힘이 없어 보였지만 앞으로 천 년은 더 문제 없이 살 수 있었다.
“석 장로, 고작 몇 년 사이에 신공을 깨닫고서 수련 경지가 한 단계 더 올라갔군.”
대장로가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석목이 말했다.
“후후, 겸손할 필요 없네. 실력이 성계쯤 되면 언제 경지를 돌파해도 결코 쉬운 게 아니네. 낮은 경지를 돌파하는 쪽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역시 우리 족장이 당신을 후손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어.”
대장로가 말했다.
석목은 웃기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 장로,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편하게 말해보게.”
대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네, 대장로님 혹시 천봉 일족이 새로운 성녀가 난 걸 기리는 축전을 치르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석목이 눈빛을 반짝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석 장로, 생각보다 소식이 빠르군. 이미 천하 성역에 퍼진 소식이니 나도 전해 듣긴 했네. 그런데 그 일은 왜 꺼내는 건가?”
대장로가 눈을 반짝이며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대장로님, 최근 몇 년 동안, 천정의 세력이 천하 성역으로 침투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특히 최근 삼 년 동안 천하 성역에 있는 행성들이 서른 개나 고만족에게 무너졌지요.”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장로는 침묵만 지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이 잠깐 멈칫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비록 우리가 성역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면 천봉, 지룡, 반귀 일족이 버텨내지 못할 때, 여기도 분명 재난이 닥칠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 열리는 천봉 일족의 축전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석 장로는 천봉 일족과 연합을 하겠다는 뜻인가?”
대장로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 종족은 안팎으로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만약 천봉 일족과 연맹을 맺어서 함께 천정을 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 장로가 한 말은 일리가 있지만 아마 뜻대로 되지 않을 걸세.”
대장로가 침묵하더니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우리 종족에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네. 아마 백장 장로도 찬성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이렇게 하지. 잠시 후에 사람들을 모아 함께 이 일을 의논해보게.”
대장로가 말했다.
“좋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없느냐.”
대장로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전 밖에 있던 미천거원이 걸어들어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대장로님.”
“장로들과 동주들을 소집해라. 반 시진 뒤에 여기서 종족 대회를 열 테니.”
대장로가 지시를 내렸다.
“네!”
미천거원은 곧바로 대답을 하고는 빠르게 걸어 나갔다.
대전 안에서 석목과 대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각자 고민을 하는 듯했다. 대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 * *
잠시 후에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줄줄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백장과 백비가 가장 먼저 들어왔는데 석목이 대전에 있는 것을 보자 백장은 웃음을 지으며 석목에게 걸어왔다.
“석 장로, 십 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더니 수련 경지가 성계 중기에 올랐군. 축하하네.”
백장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비가 석목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백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한쪽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어 두 사람 뒤로 색깔이 전부 다른 미천거원 여덟 명이 들어왔다. 수련 경지는 전부 성계였다.
석목이 시선을 돌려 일족들을 훑어보았다.
미천거원 일족에는 동이 총 여덟 개 있는데 각 동을 한 명이 책임을 지고서 다스렸다.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에 들어와 넷째 장로가 된지 한참이 지났지만 처음으로 종족 대회에 참석했다. 종족에 대해 알고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앞에 선 여덟 명이 동주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낯이 익은 백홍도 자리하고 있었다.
석목이 일족을 훑어보자 백홍도 석목을 바라봤는데 눈에는 차가운 기색이 어렸다.
곧이어 모두 순서대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대장로님, 무슨 일로 저희를 소집하셨습니까?”
백비가 가장 먼저 입을 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는 최근 천하 성역에서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장로가 곧바로 대회 주제를 꺼냈다.
대장로가 하는 말을 듣고서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대장로를 바라봤다.
“천봉 일족이 새로운 성녀를 선발하여 이제 곧 수임 축전을 거행할 겁니다. 때문에 천봉 일족이 천하성역에 있는 많은 세력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자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놀라는 걸 보니 이 소식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석목은 일족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눈빛을 봤을 때 대장로가 하는 말에 놀라긴 했으나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 그 일이군요. 저도 조금 전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장로님께서는 어째서 이 일을 말하시는 겁니까? 혹시 이번 축전에 참여할 사람을 보내고자 하는 건지요?”
백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팔동의 동주들이 일제히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대장로님.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이렇게 오랫동안 은거를 하며 간신히 천정을 피해 다녔습니다. 게다가 지금 천하 성역은 정세가 기울어 세 일족과 천정이 불같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우리가 나타난다면 천정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할 겁니다!”
회색 털이 난 거원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백거(白巨) 동주가 하신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천봉 일족과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사이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을 보내 축전에 참가한다면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백홍이 큰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대장로님, 간신히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중을 기해주십시오!”
다른 동주들도 전부 한 마디씩 보태며 반대했다. 단 한 동주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대장로가 석목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안쓰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여러분, 이 일은 대장로님께서 품으신 뜻이 아닙니다. 천봉 일족이 여는 축전에 참가를 하자고 말한 사람은 접니다.”
석목이 침묵을 한 후에 일어서서 말했다.
그러자 동주들이 모두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십 년 전에 미천거원 일족으로 들어온 후부터 오랜 시간 동안 폐관수련을 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다들 석목이 넷째 장로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석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석목이 일어서니 동주들은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대장로의 표정을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로님들, 그리고 여러 동주님들. 제 말을 한 번 들어보시지요. 그동안 천정은 더욱 빠르게 천하 성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비록 천봉, 지룡, 반귀 일족이 전방에서 막고 있긴 하지만 천정이 갖춘 실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바를 초월합니다. 세 종족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붙을 곳이 없다는 말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천정과 미천거원 일족은 깊은 원한을 맺어 절대 화합하며 지낼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일한 방법은 천하 성역에 남은 모든 종족 세력과 연합하여 천정을 천하 성역에서 내쫓아버리는 것뿐입니다.”
석목은 백비를 신경 쓰지 않고서 말했다.
“천정과 싸우다니?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가? 자네가 천정이 갖춘 실력을 얼마나 알고 있나? 이렇게 큰소리를 치다니. 지금은 이미 천 년 전의 판국과 확연히 다르네. 우리 미천거원 일족이 갖춘 실력은 옛날과 비교도 할 수 없지. 천정과 맞선다는 건 목숨을 바치는 짓이나 다름없어.”
백비가 차갑게 말했다.
“셋째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천봉 일족은 세력이 번성해 이번에 성녀 수임 축전을 벌여 다른 두 종족과 연합을 한 후에 주변에 있는 다른 종족들을 소집하여 함께 전쟁을 치르려는 게 뻔합니다. 우리가 그 불구덩이에 끼어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백홍이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초청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즉, 우리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동주 한 명이 말을 보탰다.
“그러니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여기 숨어있어야 안전하겠죠. 천정놈들이 우리를 찾아낼 수도 없을 테니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실력을 키워 다시 천정과 싸워도 늦지 않을 겁니다.”
한 뚱뚱한 동주가 말했다.
“여러 동주님들 이미 천정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휴식이나 취하며 실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겠습니까?”
석목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석목 장로님, 일부러 과격한 말을 하여 자극을 하는 게 아니신지요? 우리는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천정놈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하셨는데 증거라도 있습니까?”
뚱뚱한 동주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고만족을 몇 명 죽였습니다. 대장로님과 많은 분들이 직접 본 사실입니다.”
석목은 가까운 곳에 있는 장로 셋을 보며 말했다.
“그건 우연이었겠죠. 그동안 사람들을 보내 근처를 순찰하도록 시켰으나 천정놈들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뚱뚱한 동주는 몸을 한 번 파르르 떨더니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억지를 부렸다.
석목은 뚱뚱한 동주가 보이는 행동과 말에 언짢았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속이며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 다 있었다니.
“됐습니다. 다들 그만합시다. 논의를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각자 표결하도록 합시다.”
대장로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 일족에게 가서 축전에 참여하겠다는 분들은 일어서시지요.”
대장로가 천천히 말했다.
석목이 일어서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백장 장로가 천천히 일어섰다.
백장이 일어서자 계속 침묵만 지키던 동주 두 명이 서로 눈을 마주보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심지어 대장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예측한 결과였지만 석목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사 대 팔. 석목 장로, 미안하네.”
대장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이 깊은 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흔들며 앉았다.
“결정이 났으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백비가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드러내며 일어서서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주들도 뿔뿔이 몸을 일으키며 대장로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