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67화 (667/916)

667화. 두 갈래의 길

잠시 후에 대전에는 석목과 백장, 대장로만 남았다.

“석 장로. 너무 미안하오. 일족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투지를 잃어 더는 다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 같소. 나는 명색이 대장로라 일족사람들이 품은 뜻을 차마 거역할 수는 없소.”

대장로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드러냈다. 대장로가 이미 언질을 해줬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걸 두고서 크게 놀라진 않았다.

“대장로님, 일족사람들이 축전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저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볼 겁니다. 가서 천봉 일족을 비롯한 세 종족들과 천정의 상황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석목이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네.”

백장이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대장로도 석목이 하는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두 장로님, 걱정마시지요. 이번엔 제 사사로운 명분으로 갈 겁니다. 저는 인족이라 절대 미천거원 일족을 노출시키지 않을 겁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석목, 자네 수련 경지는 이미 성계 중기에 도달했지만 지금 천하 성역은 전란에 빠져있네. 이렇게 종족을 떠나면 너무 위험해.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 자네는 특별한 신분이니……”

백장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백장 장로님, 말리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선택은 지금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결과가 어찌되든 시도는 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요.”

석목이 백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나? 꼭 가야겠소?”

이때, 옆에 있던 대장로가 하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네, 대장로님. 혹시 축전과 관련된 정보를 주실 수 있나요?”

석목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두를 돌렸다.

“그렇다면 알겠네! 천봉 일족은 천하 성역 남부에 자리한 주요 행성인 주작성(朱雀星)에 있네. 이 축전은 세 달 뒤에 천봉 일족의 성지인 봉명골(鳳鳴谷)에서 거행될 걸세.”

대장로가 침묵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석목이 몸을 굽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백장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석목을 더 말려보려 했지만 석목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백장은 석목과 대장로에게 손을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석목도 백장을 뒤따라 돌아가려했다. 하지만 대전의 문을 넘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대장로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석목, 기다려보게.”

“대장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석목이 뒤돌아 다시 대전 가운데로 걸어들어와서는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

“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대장로가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왜 기어코 천봉 일족으로 가려는지 궁금하신 겁니까?”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대장로는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대장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천봉 일족에게 가려는 이유는 미천거원 일족을 위해 길을 찾기 위해섭니다. 하지만 그밖에도 해결해야만 하는 사사로운 일도 있습니다. 다만 저도 추측만 할 뿐이라 아직 대장로님께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전부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석목이 침묵을 하더니 말했다.

“한 차례 큰 전쟁을 치르면서 종족이 지닌 원기가 처참하게 훼손되어 천 년이 지나도록 회복하지 못했네. 그리하여 많은 일족사람들이 이미 투지를 잃었네. 똑같은 비극이 또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지. 대장로라는 무거운 자리에 앉았으니 나 또한 일족사람들이 품은 뜻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많이 이해해주게.”

대장로 백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는 아픔과 부득이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난감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석목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백박이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허공에 짚자 지팡이 끝에서 빛이 밝아지더니 붉은 옥비녀 하나가 나타나 석목에게 날아갔다.

석목은 멈칫하더니 옥비녀를 받아들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옥비녀는 끝단이 봉황 모양이었으며 매우 생생하게 각인이 되어있었는데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각인 위에 붉은색 줄기가 줄줄이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핏자국처럼 매우 기이한 모양이었다.

“대장로님, 이것은?”

석목이 고개를 들어 백박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 봉혈옥채(鳳血玉钗)는 ‘열반(*涅槃:해탈의 최고조의 경지)’이라 불리네. 첫 천봉 일족의 족장이 열반에 올라 환생을 할 때 응결하여 만든 보물이지. 옥채 속에는 매우 순수한 천봉혈맥이 깃들어 있네. 그리고 천봉 일족에서 내려오던 성스러운 물건 중의 하나로, 천봉 일족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물건이지.”

백박이 말했다.

“천봉족의 성물(聖物)이 어찌 미천거원 일족에게 있나요?”

석목이 의문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건 예전에 천봉 일족과 미천거원 일족이 연합을 했을 때 천봉족에서 보내준 신물일세. 이 물건을 가져가게나.”

백박이 침묵을 하더니 추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봉쇄를 하며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어. 그러다보니 이번에 천봉 일족이 벌이는 성녀 수임 축전의 초대장마저 받지 못했네. 만약 이 봉채가 없다면 어떻게 천봉 일족으로 들어갈 겐가?”

백박이 석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봉혈옥채를 챙겨 넣고는 백박에게 손을 굽혀 감사 인사를 올렸다.

“후후, 그럴 필요는 없네. 이미 우리 종족의 넷째 장로니 자네는 우리 미천거원 일족을 대표하네. 꼭 기억하게나. 비록 우리 종족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지만, 다른 종족 앞에서는 절대 그 위풍을 잃어서는 안 되네.”

백박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로님, 걱정 마십시오. 종족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장로님이 계속해서 신경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천정의 첩자들이 잠시 철수를 했으나 절대 이대로 포기할 놈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종족 안에도 암울한 기운이 흘러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석목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 일은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나. 천정의 첩자들이 또 나타나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걸세. 종족사람들을 너무 탓하진 말게나. 무탈하게 살고 싶은 생각과 조용히 때를 기다리겠다는 생각만 하며 살았던 터라 스스로를 속여 가며 미천거원 일족이 처한 위험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

백박이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 길을 떠나는데다가 또 성역이 혼란스럽네.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겠지. 더 필요한 게 있나? 할 수 있는 만큼 들어주겠네.”

백박이 말했다.

“아, 대장로님, 혹시 여기에서 주작성까지 어떻게 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석목이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 주작성에 가려면 고림성(苦林星)을 지나야 하네.”

백박이 말했다.

“고림성이요?”

석목이 물었다.

“그렇네. 천하 성역은 길쭉한 모양일세. 고림성은 성역에서도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지. 꼭 지나야하는 별이네. 고림성에서 다른 소식들도 알아볼 수 있을 걸세.”

백박이 말했다.

“고림성? 귀에 익은 곳인데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딘가에서 그 행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은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후후, 이 고림성은 천하성역에서도 내력이 대단한 곳일세. 거긴 팔황고족 중 하나였던 비천서족이 머물던 주요 행성이었지.”

백박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비천서족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건 확실치 않네. 비천서족은 팔황고족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고도 넉넉했던 종족이네. 이족이었지. 매우 약삭빠른 종족이라 아마 우리 미천거원 일족처럼 은거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네.”

백박이 말했다.

“그럼 고림성으로 간 이후엔 어찌합니까?”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물었다.

“고림성에 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날 걸세. 그 중 한 갈래는 거리가 가까워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네. 다만 그 길은 여러 행성에 전송진법을 둬서 연이은 전란 때문에 망가졌을 가능성이 크네. 그리하여 가는 길에 전함으로 갈아타야할 수도 있네. 하지만 전란이 벌어져 별바다에 수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니 안전한 길은 아닐세.”

백박이 말했다.

“그럼 또 다른 길은요?”

석목이 물었다.

“또 다른 길은 멀리 돌아서 가야하는데 훨씬 긴 시간이 걸릴 걸세. 한 달은 넘게 걸리지만 안전한 길일세. 천봉 일족의 축전이 열리기 전까지 아직 세 달이나 남아 있으니 이쪽 길로 가도 시간이 충분할 걸세. 이 두 가지 길을 골라서 가면 되네.”

백박이 말을 하며 품에서 옥간을 하나 꺼내들어 이마에 짚었다가 다시 석목에게 던져주었다.

“대장로님, 감사합니다.”

석목이 옥간을 받아들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말했다.

“꼭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안전하게 돌아 와야 하네.”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박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백박은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 * *

석목이 대전에서 나오자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석두, 안에서 뭘 했어? 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다른 원숭이들은 진즉에 나오던데.”

채아가 물었다.

“돌아가서 얘기하자.”

석목이 대답을 하며 용우비차를 소환하여 채아를 데리고서 동부로 향했다.

원래 머물던 동부는 이미 무너졌다. 그리하여 옆에 새 동부를 하나 장만했는데 거긴 커다란 동굴이었다. 동부가 동굴로 바뀐 후부터 백요와 백풍은 더 이상 석목의 시중을 들지 않고서 돌아갔다.

동굴로 들어온 석목이 채아에게 말했다.

“빨리 준비해서 여길 떠날 거야.”

“떠난다고? 어딜 가?”

채아가 놀라며 물었다.

“주작성, 천봉 일족.”

석목이 말했다.

“좋아. 석두, 우리는 이제 네 각시를 찾으러 가는 거야……”

채아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동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허공이 일렁이며 자태가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연나?”

석목이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얼굴로 연나를 바라보았다.

은색 갑옷이 연나의 아리따운 몸매와 어우러져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여쁜 두 눈이 채아에게 향했는데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채아는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곧바로 석목의 어깨로 날아와서는 귀에다가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두, 네가 소환을 할 때는 꿈쩍도 안하다니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혹시……”

“시끄러워. 가서 문이나 지켜.”

석목이 채아의 머리를 튕기며 말했다.

연나의 안색을 보니 무엇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채아는 말이 많았지만 눈치는 매우 빠른 편이라 상황이 심각한 걸 인지하고는 곧바로 밖으로 날아갔다.

채아를 내쫓고 나서야 석목은 연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연나는 안색이 창백했으며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매우 불안했다.

“연나, 무슨 일이야. 꽤 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석목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 일은 신경 쓰지 마. 천하 성역은 지금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러 왔어. 그리고 아마 한동안은 너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조심해서 다녀.”

연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석목이 입을 벌려 무엇인가를 더 물어보려다가 끝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연나가 신경을 쓰지 말라 했으니 연나의 성격에 비춰보건대 석목이 아무리 물어도 아마 대답해주지 않을 터였다.

“채아가 한 말은…… 무슨 뜻이야?”

연나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천봉 일족이 있는 주작성으로 갈 거야. 종수가 거기 있는 것 같아.”

석목이 멈칫하더니 채아가 한 말을 알아차리고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연나는 턱을 살짝 들더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조심해.”라는 말만 던지고는 빛으로 변하여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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