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진(轸) 부인
붉은 머리 사나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저는 비록 종족을 떠났지만, 종족이 처한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다. 흥! 그럼 죽여 버리고 수혼을 하자. 석두, 내가 할게!”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제압당한 둘은 계속 살려달라고만 외쳤다.
“기다려봐.”
석목이 채아를 잡아당겼다.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냥 둬.”
석목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부족을 팔지 않는 이들을 보니 꽤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 형, 이 둘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서유금이 물었다.
석목의 실력을 여러 번 지켜보며 서유금은 점점 존경하는 투로 석목에게 말을 걸었다.
“데리고 다니죠.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석목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좋습니다,”
서유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눈동자가 보라색인 가진 청년을 묶었던 검은 밧줄 법보를 거두어들였다.
눈동자가 보라색인 청년은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도망가려 하지 않고는 조용히 자리에 서 있었다.
석목이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천정과 대항을 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는데 여러 종족, 특히 팔황고족과 연합을 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터였다.
염호 일족과 자정마우 일족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어디서 은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몰락한 황족이라 해도 아마 그 기반은 여전히 남아있을 터였다.
나중에 이 두 종족과 연합할 수도 있으니 둘을 살려두는 편이 좋을 터였다.
“이름이 뭐냐?”
석목이 물었다.
“저는 안화(安華)라고 합니다.”
붉은 머리 사나이가 답했다.
“방진(方臻)입니다.”
눈동자가 보라색인 청년이 말했다.
“좋아. 너희가 살고 싶으면 원신 중에 삼분의 일을 이 금신주(禁神珠)에 넣어라. 그리고 앞으로는 날 따라다니며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거야.”
석목이 하얀색 옥구슬 두 알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명월교의 금신주였다.
안화와 방진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죽는 길과 노예가 되는 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고민을 할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잠깐 망설이는 듯싶더니 각자 옥구슬을 하나씩 받았다.
주문을 외우고 있는 안화와 방진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의 머리에서 푸른빛이 한 덩이씩 튀어나와 하얀 옥구슬에 스며들었다.
석목이 다시 금신주 두 개를 받아들고서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화와 방진의 영해 속에 드리운 혼돈의 봉인을 거두어들였다.
“가자.”
석목이 손을 흔들어 용우비차를 꺼냈다. 안화와 방진이 비차 위에 올라탔으며 서유금도 자신의 비주를 불러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르신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안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공자(*公子:귀한 집안의 나이 어린 자제)라고 불러. 우리는 주작성으로 갈 거야.”
석목이 말했다.
안화와 방태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 두 사람도 천봉 일족이 벌이는 축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예의 신분이니 석목이 하는 말에 뭐라고 토씨를 달 수 없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 두 달이 지났다.
천봉일족의 주요 행성인 주작성.
주작성은 매우 크고 넓었으며 대륙이 총 세 개로 나뉘는데 각각 분황대륙, 운황대륙과 적염대륙이었다.
분황대륙은 세 대륙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컸으며, 대륙 서부에는 큰 성시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성시는 족히 수천 리까지 뻗어있었다. 성시 안에는 높은 건물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으며 거리가 종횡으로 길게 깔려있다.
이 성시는 이름이 봉익성(鳳翼城)이었다. 천봉 일족이 머무는 본부가 바로 이 성시에 있었다.
봉익성 가운데에 우뚝 선 큰 건물 안에는 전송진이 열 개가 넘게 나란히 놓여있으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송진들마다 빛이 반짝이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전송진 한 개가 번쩍이자 석목 일행 네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후…… 드디어 도착했군.”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석목 일행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금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 먼 길을 돌아와야 했기에 시간이 빠듯해 일행은 쉬지 않고서 달려왔다. 오는 동안 크고 작은 위험들을 막아내느라 네 사람은 적잖이 고생을 했다. 그래도 다행히 천봉 일족의 축전이 거행되기 전에 주작성에 도착했다.
“이곳이 주작성이구나…… 불속성 영기가 매우 짙군.”
석목은 극도로 짙은 화염의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공기에서 옅은 붉은빛이 풍길 정도였다.
서유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신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야. 빨리 전송진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붉은 피풍의를 두른 남자 한 명이 전송진 옆에서 짜증스러운 말투로 재촉을 했다.
“뭐야? 말투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채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붉은 피풍의를 두른 남자는 고작 천위 경지로 보였다.
“이제 막 주작성에 도착했으니 괜히 소란피우지 마.”
석목이 채아를 다독였다.
석목 일행은 전송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천봉 일족은 괜히 삼대 부족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 이 전송대전부터 매우 웅장했는데 온 벽을 천년화옥으로 빚었으며 천장은 높이가 족히 수십 장까지 치솟았다.
전송대전에는 인파가 가득했는데 요족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부 이번 축전을 위해 온 것 같았다.
석목 일행은 인파를 따라 밖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붉은색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었으며 울타리끝 쪽에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문 하나만 열려있었다.
붉은 전투 갑옷을 입은 사람 열 몇 명이 출입구에 서 있었는데 갑옷에 화봉(火鳳:불 봉황)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천봉 일족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이들은 전부 성계 후기 경지로 실력이 막강한 사람들이었다.
“주작성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 전송대전을 나가시려면 여러분들의 신분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계획을 도모하거나 잠입을 하려는 분들에게 절대 선처는 없으니 자중하십시오!”
붉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사나이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대전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주작성에 들어가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엄하게 수색을 하는 거야?”
“몰랐어? 천봉 일족이 성녀 수임 축전을 여는 진정한 목적은 여러 종족과 연합을 해서 함께 천정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잖아. 천정 놈들도 분명 이 일을 알고서 여기에 잠입해 축전을 망치려고 하겠지.”
“아, 그렇구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석목은 안색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이렇게 엄밀하게 확인을 한다면 진짜 신분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 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석목이 방진과 안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있습니다.”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석목이 대답했다.
대전 안에서 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는 순차적으로 작은 출입문을 지나며 확인을 받았다. 석목 일행도 줄을 섰다.
대전의 문 너머로 봉익성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건물이 숲을 이뤘으며 사람들이 빼곡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실로 시끌벅적했다.
종수가 이 성시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때, 앞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울리며 법력 파동이 전해졌다.
입구 근처에 붉은빛 고리가 나타나 몇몇 파란 갑옷을 두른 사람들을 안으로 가두었다.
“너희, 뭐 하는 거야? 우리는 육이성에서 온 남려 일족(藍蛎壹族)이야. 축전에 참가하려고 왔는데 이런 대우를 하다니. 천봉 일족의 장로는 나와라!”
더부룩한 수염이 자란 채 파란 갑옷을 두르고 있는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수염이 자란 남자 옆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도 전부 눈을 부라리며 천봉 일족을 노려보았다.
“천정의 한염궁(寒焰宮) 여러분, 연기가 너무 허접합니다. 보름 전에 너희가 남려 일족을 털끝도 하나 남기지 않고 죽여 버렸잖느냐. 천봉 일족이 그마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나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수염이 자란 남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소리를 지르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의 몸에서 눈부신 파란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다시 화염으로 뭉쳤고, 화염에서는 소름 돋게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
순간, 천정 놈들이 내뿜는 기운이 폭발하며 경지가 성계 정상까지 도달했다.
펑!
첩자들을 묶어버렸던 붉은색 광막이 단번에 터져버렸다. 그리고 첩자들은 지체 하지 않고서 몸을 날려 봉익성으로 향했다.
이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새소리가 울려 퍼지며 대전 밖 허공에 커다란 봉황의 허영이 하나 나타났는데 극도로 강력한 기운을 풍겼다.
그러자 수염이 난 남자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갈라져라!”
수염이 난 남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봉황의 허영이 차가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날개를 살짝 펄럭이자 붉은빛이 줄줄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커다란 육망성 도안을 만들어냈다.
방대한 흡입력이 육망성 도안에서 흘러나왔으며 수염이 난 남자를 비롯한 첩자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빨려 들어갔다.
봉황의 허영이 입을 크게 벌려 금색 화염을 뿜어내어 첩자 일행을 감아버렸다.
금색 화염 속에 갇힌 첩자들은 몸집이 순식간에 졸아들며 처참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 광경을 본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굳은 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봉황의 허영을 본 석목은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예전에 신비한 자가 종수를 데려갈 때 이런 금색 화염을 느낀 적이 있는데 석목은 자칫 그 화염 때문에 타버릴 뻔했었다.
비록 그때 석목은 혼미한 상태라 의식이 희미했지만, 이 금색 화염은 석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석목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종수가 실종된 건 정말 천봉 일족과 관련이 있었다.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난 사나이를 비롯한 첩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놀라운 광경을 보자 사람들은 전부 몸을 웅크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허공에 떠 있던 봉황의 허영이 반짝이며 금색 피풍의를 두른 채 머리에 풍의관(风仪冠)을 얹은 여자가 한 명 나타났다. 우아한 자태에 가지런한 눈썹이 돋보여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는데 여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였다.
“여러분 놀라지 마시지요. 저들은 천정에서 보낸 첩자들입니다. 우리 천봉일족이 성녀 수임 축전을 거행하는데 진심으로 축하를 하러 오신 분들을 저희는 기쁜 마음으로 영접할 거랍니다. 다만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조금 전에 봤던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겠지요.”
금색 피풍의를 두른 여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었으며 대전은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전부 금색 피풍의를 두른 여인을 바라보았으나 오래 보지는 못하고 바로 시선을 피했다.
“여러분, 천정 놈들 때문에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천봉 일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금색 피풍의를 두른 여인은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말을 마친 여인은 빛을 반짝이며 다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다.
금색 피풍의를 두른 여인이 풍기는 기운은 너무 강력하고도 무거웠기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압박을 받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대단한 여인이군.”
석목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석 형, 모르세요? 저 여자는 천봉일족에서도 유명한 칠대 신경 강자 중에 한 분인 진 부인입니다. 수련 경지가 이미 신경 중기에 이르렀대요.”
서유금이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