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화. 신경의 일격
석목이 얼굴을 구기며 석대 위를 바라보았다.
순간, 허공이 일그러지며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걸어서 내려왔다.
하얗게 자라난 수염이 도톰하게 쌓여있었으며 수염과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또 불그스름했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노인은 가슴에 화염처럼 번지는 봉황 그림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노인은 삼엄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으며 의심하는 시선들을 잠재운 눈에는 맑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엄연히 천봉족의 신경 강자였다.
“주명 장로님.”
주명이 내려오자 두 천봉족은 앞으로 다가가 바른 자세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게냐?”
주명이 살짝 싸늘해진 낯빛으로 질책을 했다.
“장로님, 저 자는 인족인데 미천거원 일족의 대표라 주장을 하고 있어서 잠시 소란이 일었습니다. 바로 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얼굴이 각진 남자가 공손하게 말했다.
주명 장로는 석목이 있는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석대 뒤에 놓인 보라색 나무 의자로 걸어갔다.
“선물을 바치시면 됩니다.”
얼굴이 각진 남자가 다시 석목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석목은 남자 옆을 스쳐지나 용모가 준수한 청년에게로 다가가서는 선물을 바친 후에 안내를 따라 석대 한쪽에 자리한 빈 땅에 가서 기다렸다.
* * *
해가 하늘 높이 걸린 대낮이 되었을 때, 원래도 그리 넓지 않던 석대 옆 빈 땅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전부 신분에 흠이 없었으며 풍성한 축하 선물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석목과 서유금, 그리고 방진이 함께 한쪽에 서 있었으며 채아는 안화를 따라 외곽에 서서 점검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때, 주명 장로가 석대 가운데로 걸음을 옮겨, 점검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여러분, 저는 조주명(趙朱明)입니다. 천봉족의 장로라는 신분으로 여러분들을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점검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제 실력의 십 분의 일 정도 되는 위력을 한 번만 받아내면 천봉족 성녀의 배필을 뽑는 대결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명 장로의 우렁찬 목소리가 석대에서 울려 퍼졌다.
석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신경 강자가 날리는 일격을 받아내는 게 점검의 내용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십 분의 일의 위력을 받아내야 한다는 조건은 생각지도 못했다. 여기에 오기 전만해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신경 강자가 날리는 백 분의 일, 또는 그보다 더 적은 위력을 받아내는데 그치지는 않을까 지레짐작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장로님, 우리가 지닌 실력을 장로님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만약 지니신 위력 중 십분의 일에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어쩐답니까?”
드디어 누군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알아서 잘 조절할 테니, 혹시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은 삼가셔도 됩니다.”
조주명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대답했다.
그 말에 마음이 놓였는지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조주명이 큰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으며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귓속말만 주고받았다. 간간이 시선을 조주명에게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선 듯 발길을 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으실 겁니까?”
조주명이 참여자들을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때, 귀우족의 장청이 이를 악물고서 두 주먹을 꽉 쥔 채 석대 위로 올라갔다.
“장로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장청은 조주명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준비 자세를 취했다.
조주명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쳤다.
치솟은 손끝에서는 빛이 반짝였다.
하늘에서 둥둥 떠 있던 하얀 구름이 마치 소환된 듯이 모여들어 크기가 백 장에 이르는 커다란 손 모양으로 뭉쳐져 강력한 영력 압박을 풍겼다.
장청은 ‘구름 손’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일단 나서긴 했으나 신경 강자가 날리는 일격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준비하십시오.”
조주명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장청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부서질 듯이 꽉 쥔 주먹을 쥐어 짜내듯 힘을 가하였다. 몸에서 푸른빛이 맴돌았으며 외뿔에는 세 갈래 빛 고리가 나타났다. 열 장이나 커진 몸통 위에 얹어진 머리가 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두 주먹을 힘껏 들어 올려 커다란 구름 손을 받쳤다.
허공에서 푸른빛이 한 층, 한 층 용솟음치더니 커다란 허영 주먹으로 변하였고, 허영 주먹이 강력한 기세를 몰아치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조주명은 옷자락을 흔들며 손바닥을 아래로 밀었다.
용솟음치는 구름 속에서 커다란 손바닥이 뻗어 나와 태산압정의 기세로 아래를 짓눌렀다.
석대 위는 공기마저 전부 빨려 나간 듯이 조용했으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다가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실눈으로 석대 위를 바라보았는데 가볍고 얇은 먼지가 흩어지며 미세하게 흔들렸다. 먼지가 마치 형태가 없는 힘에 짓눌린 것 같았다.
이때, 장청의 주먹 그림자가 드디어 구름 손과 부딪쳤다.
퍽!
장청의 주먹 그림자가 구름 손에 닿는 순간, 틈이 줄줄이 갈라졌다. 그리고 균열이 뻗어나가기도 전에 터져버렸다.
장청은 이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엎드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후에 조주명은 천천히 손을 접어 장청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뒷짐을 쥐었다.
조주명의 구름 손은 여전히 높은 하늘에 걸려있었다.
이 광경을 본 석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도 첫 번째 도전자가 이렇게 가볍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참 후에 침묵이 깨지며 다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석 형, 장청은 성계 중기 실력 같던데 어쩜 이렇게 단숨에 무너진답니까?”
서유금이 전혀 믿기지 않는 듯이 물었다.
“장청은 실력이 절대 약한 편이 아닙니다. 이미 성계 후기 문턱까지 갔어요. 다만 공격이 너무 늦었죠. 주명 장로가 쓴 구름 손의 기압이 충분히 압축이 된 다음에야 공격을 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막아낼 수 없었지요.”
석목이 하늘에 걸린 커다란 구름 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공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선제공격을 하라는 뜻입니까?”
방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네. 장청이 시전한 공법은 공격을 하여 막아내는 공법이었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리고 올라가는 기세가 조금만 더 강력했더라면 간신히 구름 손을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 조건은 결국 장천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일세.”
석목이 설명을 했다.
석목이 하는 말을 들은 방진과 서유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두 번째로 시험을 치를 사람이 석대 위로 올라갔다.
이 사람은 키가 석 장이나 되었지만 몸은 삐쩍 말랐다. 사지는 세 뼘을 사이에 두고 굵은 관절이 튀어나와 있어 길고 얇은 대나무 같았다.
“염죽(蠊竹) 일족 같은데요. 이미 오래전부터 천하 성역에서 자취를 감춘 종족인데 여기서 다 보다니.”
서유금이 의외인 듯이 말했다.
순간, 대나무 같은 몸통에서 푸른빛이 밝아졌다.
푸른빛이 닿는 곳마다 머리카락 같은 촉수가 줄줄이 자라나 꿈틀거리며 석대 위에서 뻗어 나갔다.
푸른 촉수가 땅에 닿는 순간부터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석대를 뚫고서 들어갔다.
휙!
땅속을 뚫고 들어간 촉수가 흙에 닿자, 순식간에 덩치가 열 배 가까이 커져서 땅을 쩍쩍 갈라버리고는 몸이 다시 위를 찌르며 나왔다.
원래 석 장 정도 크기였던 염죽족의 몸통은 몇 배나 불어나 열 장 크기인 푸른 거인으로 변했다. 몸통 주변은 마치 대나무를 감은 것만 같았으며 얼굴도 대나무 마디로 덮였다.
조주명은 시선을 깔아 염죽족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아래로 밀었다. 그러자 조용하던 구름 손이 갑자기 용솟음치며 아래를 향해 짓눌렀다.
푸른 거인은 적극적으로 구름 손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릎을 반쯤 구부려 두 팔을 치켜들고는 무겁게 가라앉는 구름 손을 받쳤다.
격렬한 부딪침도 없었으며 요란한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푸른 거인이 두 손으로 구름 손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온 하늘을 밀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허공에서 ‘쩍, 쩍!’ 소리가 들리더니 거인이 몸통을 점점 굽혔다. 쭉 뻗었던 두 팔도 엄청난 압력을 받아 구부러졌다.
몸을 감고 있던 푸른색 대나무에서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염죽족은 결국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잠시 후에 ‘펑!’ 소리가 들렸다.
푸른 거인은 몸통이 터져버렸으며 푸른색 대나무는 산산조각이 났다. 염죽족이 흩날리는 대나무 조각 사이에서 튀어나와 석대 위에 ‘쿵!’ 떨어졌다.
잠깐 사이에 두 번째로 시험에 참여한 제자도 처참하게 패배를 당했다. 그 뒤로 석대에선 잠깐 공백이 이어지며 한참 동안 아무도 석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저는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도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전부 기권했다고 간주하겠습니다.”
조주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 번째 도전자가 석대 위로 올라갔다.
* * *
태양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석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놓았다. 반나절이나 지났지만, 단 한 명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니. 공자님, 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방진이 석목을 향해 손을 굽히며 말했다.
“그래.”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석대로 올라가 조주명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조주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손바닥을 아래로 뒤집었다.
방진은 하늘의 구름이 용솟음치는 모습을 보고는 두 눈과 몸에 보랏빛을 둘렀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방진의 탄탄한 근육이 툭툭 튀어나오더니 몸통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드러난 피부에서는 쇠침 같은 검은색 털이 튀어나왔는데 그 모습은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이 녀석 똑똑하네요. 바로 종족의 우마신공(牛魔神功)인 망곡신우(莽谷神牛)로 변신하다니.”
서유금이 웃으며 말했다.
“성계 후기이니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공법을 시전하지 않으면 아마 버틸 기회조차 없겠죠.”
석목이 말했다.
음메!
하늘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크기가 족히 오십 장은 되는 검은 소 한 마리가 석대에 나타났다. 소의 눈에서 보랏빛이 튀었으며 머리에 난 뾰족한 두 뿔은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 콧구멍에서 보라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방진은 몸을 뒤로 밀쳤다가 뒷다리에 힘을 잔뜩 주며 고개를 치켜들고는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펑!
검은 소머리에 자라난 뾰족한 뿔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구름 손을 찌르려했다.
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구름 손이 용솟음을 치며 강력한 압력을 몰고서 뾰족한 뿔을 짓눌렀다.
펑!
방진이 변신한 검은 소는 앞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버티다가 ‘쿵!’ 무릎을 꿇었다.
무릎으로 찍은 땅에서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갈라져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이때, 구름 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하여 들끓는 기운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쾅!’
커다란 석대가 순식간에 가라앉아 반 척 정도 땅 속으로 파묻혔다.
석대가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묻혔으며 방진의 거대한 체구가 점점 줄어들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버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서유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석목도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기척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그림자가 석대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녀석, 일어서다니.”
그 모습을 본 서유금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조주명은 담담한 눈빛으로 방진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통과.”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처음으로 통과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건 석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든 참여자들이 기뻐할 만한 좋은 일이었다.
점점 의욕을 잃어가던 사람들은 다시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