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미끼
“세 분 모두 통과하셨으니 축하주 한 잔 어떠세요?”
안화가 제안을 했다.
“좋아!”
방진은 애주가인데다가 마침 기분이 통쾌해서 거하게 한 잔을 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뜨겁게 달려 보자고.”
채아가 함께 떠들어댔다.
“석 형, 어떠세요?”
서유금이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다들 들떠있자 석목도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 일행이 이제 막 밖으로 나왔을 때, 선녀처럼 생긴 소녀가 천천히 걸어와 시선을 끌었다.
소녀를 본 석목은 동공이 수축했다.
어젯밤에 만났던 금색 피풍의를 두른 소녀였다.
오늘은 앵무새 동두가 보이지 않았다.
소녀와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석목은 피할 수도 없었다. 소녀는 석목을 알아차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은 전부 의아한 표정을 드러냈다. 천봉족 여인이 석목과 아는 사이라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석목 도우, 여기서 다 만나네요.”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네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석 형, 그럼 우리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바로 오세요.”
서유금은 석목과 소녀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황급하게 방진과 안화를 끌고는 날아가 버렸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멀어져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매우 차분했으며 여전히 미소가 어렸다.
“석 도우는 붙임성이 좋은가 보네요. 저 세 분은 염호 일족, 비천서 일족과 자정마우 일족이 맞지요?”
소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역시 모르시는 게 없군요.”
말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조금 놀랐다.
“이 세 종족은 전부 팔황고족이며 성향이 다소 괴팍하다 알고 있는데, 석 도우께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시다니. 정말 존경스럽네요.”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합이 잘 맞는 편입니다.”
석목이 말했다.
둘은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소녀가 물었으며 석목은 대충 대답만 했다.
잠시 후에 둘은 대화거리가 금방 사라져서 침묵이 흘렀다.
석목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소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은 아닌데 무엇 때문인지 이 소녀 앞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 아직 아씨의 성함도 모르는군요.”
석목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소녀는 성계 후기 강자로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아마 천봉 일족에서도 꽤 인정받는 사람일 터였다.
“조선기(趙璇玑)라고 해요. 석목 도우, 선기라고 불러주세요.”
소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기 아씨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선기는 미소를 띤 얼굴로 멀어져 가는 석목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석두, 왜 이렇게 빨리 가. 그 계집애 꽤 괜찮아 보이던데.”
채아가 재잘거렸다.
석목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인지 선기를 마주하면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다시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내고는 객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석목은 며칠 동안 외출하지 않았다. 열흘 뒤에 열리는 축전을 위해서 수련을 해야만 했다.
방진도 시간을 쪼개며 수련을 했다. 열흘 뒤에 열릴 축전은 방진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였다.
서유금도 같은 객잔에 묵었지만 매일 밖에서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종족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서유금은 상인이었다. 천하 성역에서 온 종족들이 모두 봉익성에 모였으니 여러 종족들과 두루두루 안면을 틀 흔치않은 기회였기에 최대한 시간을 잘 활용해야만 했다.
객잔에서 석목이 온몸에 빛을 번쩍이더니 몸에서 화염을 불러냈다.
한참 뒤에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는데 눈빛에서 화색이 돌았다.
석목은 구전현공 일곱 번째 단계를 꽤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았지만 화염 영기가 짙은 주작성에 온 후에야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시간을 들여 수련만 하면 아마 일곱 번째 단계에 입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련을 하려면 불속성 본원의 물건이 필요했다.
석목은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밖을 내다봤다.
깊은 밤이라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며 하늘에 뜬 별들만 반짝였다.
이미 아흐레나 지났으니 내일이면 대망의 축전이 열린다.
석목은 내성 방향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또다시 잠입을 하여 종수를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쉬-익’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먼 곳에서부터 석목을 향해 날아왔다.
석목이 안색을 바꾸며 파란빛을 되쳐 받아냈다.
푸른빛은 옥팔찌를 하나 감고 있었는데 푸른색과 하얀색이 교차되어 있었다.
옥팔찌는 법기가 아닌 매우 평범한 장신구였다.
“이건!”
석목은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이 옥팔찌는 예전에 창욱성에서 종수에게 사준 물건이었으며 종수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팔찌였다.
석목은 고개를 번쩍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백 장 밖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석목이 바라보자 그림자는 다시 반짝이며 먼 곳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날아가 그림자를 쫓아갔다.
“석두! 왜 그래? 누구야?”
채아가 방안에서 날아와 날아가는 석목의 어깨에 앉으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 채아는 졸고 있었던 터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석목이 옥팔찌를 꺼내 들었다.
“이건…… 네가 그때 종수 누나한테 사준 거잖아!”
채아도 이 팔찌를 본 적이 있었기에 깜짝 놀랐다.
석목은 옥팔지를 거두어들이고는 등 뒤로 흑백 날개를 펼쳐 빠른 속도로 앞선 그림자를 쫓아갔다.
그러자 앞에서 날아가던 검은 그림자도 속도를 더해 석목과 나는 속도가 비슷해졌다.
둘은 쫓고 쫓기며 순식간에 봉익성의 성벽에 도착했다.
“이제 도망갈 곳이 없겠지!”
석목이 흑백 날개를 펼쳐 더 빨리 날아갔다.
봉익성 주변은 매우 강력한 방어 금제가 감싸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성벽에 도착하자 검은색 단도를 꺼냈다. 단도에서 유유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림자가 단도를 들어 허공을 그었다.
찌직!
방어 금제 대진이 가볍게 찢어져 버렸다.
검은 그림자는 그 틈을 비집고 나가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석목이 뒤를 쫓아가려고 할 때 찢어진 틈은 다시 천천히 아물며 곧 완전히 붙어버리려고 했다.
석목은 망설이지 않고서 검은빛으로 변하여 틈을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채아.”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채아를 불렀다.
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에 칠색 빛을 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있어!”
채아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목은 날개를 펼쳐 채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성시를 나가면 석목은 더는 소심하게 쫓을 필요가 없었기에 곧바로 등 뒤에 달린 흑백 날개를 펼쳐 몇 배나 더 빨라진 속도로 빠르게 검은 그림자를 쫓아갔다.
“거기 서!”
석목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그림자를 내리쳤다.
석목의 손에서 파란빛이 뿜어져 나가며 파도를 말아 검은 그림자를 공격했다.
그림자는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똑같은 그림자 여러 개로 변하여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칙, 칙!
파란 파도가 그 중 세 그림자를 감아버렸다. 순간, 그림자 하나는 사라져 버렸으며 나머지 두 그림자는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져 빠르게 다른 방향으로 도망갔다.
석목은 다시 그림자를 쫓아가며 여의빈철곤을 꺼냈다.
곤봉 그림자가 겹겹이 나타나 앞에서 날아가는 그림자에게로 향했다.
그림자는 깜짝 놀라 비틀거리며 다시 환영 신통을 시전하여 도망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층층이 겹쳐진 채 다가오는 곤봉 그림자들은 조금 전에 날린 파도보다 훨씬 촘촘해서 모든 환영을 전부 안으로 감싸 버렸다.
퍽, 퍽!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환영이 부서져 버렸다.
곤봉 그림자 하나가 질기게 쫓아가 검은색 그림자를 내리쳤다.
펑!
검은색 그림자는 마치 떨어지는 운석처럼 땅에 박혀버려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꿈쩍도 않고 있었는데 이미 쓰러져버린 것 같았다.
석목은 번개 같은 속도로 그림자를 덮쳤다. 그리고 손에 빛을 번드리우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변하여 단번에 그림자를 덥석 잡았다.
“석두, 조심해!”
이때, 채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석목의 머리 위에서 하얀빛이 터지더니 파란색 바리때 모양 법보가 나타나 휙휙 바람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갔다.
석목이 깜짝 놀라 다른 수법을 부리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바리때 법보는 순식간에 수십 배로 불어나 뜨거운 빛을 뿜어내며 석목을 감쌌다.
사방이 꽉 막힌 것만 같은 중압감이 석목에게로 덮쳐 들어왔다.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며, 반격을 하려 할 때 조여오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석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변 풍경이 바뀌더니 석목은 한없이 넓은 바다에 놓여있었고, 커다란 손으로 잡고 있던 검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환경진법?”
석목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으며 경솔했던 행동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옥팔찌를 보는 순간, 온통 종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휩쓸려 이렇게 쉽게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었다.
쏴아!
순간, 평온하던 바다가 갑자기 파도를 감으며 하늘을 찌를 기세로 석목을 덮쳤다.
석목은 하늘로 날아올라 감겨오는 파도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석목이 움직이자 파도도 순식간에 수십 배나 커져서는 석목을 쫓아갔고, 파도는 마치 커다란 손처럼 하늘을 가리며 석목을 덮쳤다.
석목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금빛을 드리우더니 구룡쇄금갑을 둘렀다.
팍!
휘몰아치는 파도가 석목을 때렸는데 덮쳐올 때마다 마치 큰 바위에 맞는 것 같았다. 석목은 몸통이 파도에 묻혀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석목이 놀라서 소스라쳤고, 통증이 이렇게 생생한 걸 보니 절대 환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에 다시 금빛을 드리워 금색 비늘을 둘러 토템 변신을 완성하였다. 구룡쇄금갑에서도 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둥그런 보호막을 둘러 몸을 감쌌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끊임없이 둥그런 광막에 부딪혔지만, 광막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채아, 진실인지 환각인지 알 수 있어?”
석목이 어깨에 앉아있는 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봐볼게.”
채아가 눈에 칠색 빛을 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목은 두 눈을 꾹 감고는 빠르게 채아와 시선을 연결했다.
채아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주변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흉흉하게 몰아치는 파도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반짝였는데 마치 하늘에 뜬 별과 같았다.
이 빛들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허공에서 원을 그리기도 했으며 또 쏟아지듯이 떨어지기도 했다.
“아니야. 이건 환경(*幻景: 환각으로 이뤄진 풍경)이 아니야!”
석목의 안색이 바뀌었다.
채아의 시력은 환경을 꿰뚫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지금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이때, 파도가 말려들며 검은색 그림자 하나가 파도 속에서 튀어나왔다.
석목이 두른 금색 보호막에서 금룡 여섯 마리가 흉악하게 날뛰더니 끊임없이 헤엄쳐 다녔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눈이 충혈된 듯 붉은색으로 꽉 차있었으며 손에는 짐승 이빨 같은 기괴한 검을 한 자루 들고 있었다. 검에서 눈부신 파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번갯불 같은 속도로 석목이 두른 금색 광막을 자르려 했다.
그러자 금룡 여섯 마리가 앞으로 모여 눈에 불을 켜고는 입으로 불기둥을 뿜어내어 파란빛을 막아냈다.
‘쩌적!’
금룡 여섯 마리가 하나둘 터져버렸으며 금색 광막도 단숨에 박살났다.
파란색 괴이한 검광은 어두워졌지만,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은 채 석목을 향해 내리쳤고, 치솟는 기운의 압박에 석목은 숨이 막혔다.
“신경 강자!”
석목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검은색 그림자는 바로 석목을 이곳으로 유인한 사람이었으며 신경의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동안 석목을 유인하기 위해 실력을 감췄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