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87화 (687/916)

687화. 재주 피우려다 일을 망치다

금색 홍수는 한참 동안 들끓다가 파란색 공간에 짓눌려 부서져버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한없이 고요해진 공간에서 마른 청년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청년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파란 검이 변신한 구렁이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며 등 뒤에 돋았던 뱀 아홉 마리도 전부 흔적을 감추었다. 살짝 튀어나온 허영 뿌리만이 시퍼렇게 청년의 등 뒤에 박혀있었다.

청년이 두르고 있던 비늘은 전부 찢어져버렸으며, 이미 피범벅이 된 살에서 또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흥, 날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접어라! 이런 수준으로는 멀었어!”

청년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파란색 선급 영석을 손에 쥐었다.

순간, 청년의 몸에서 뿌연 빛이 한 층 나타나더니 찢어진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번천곤으로 날린 일격도 이놈을 죽이지 못했다.

석목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몸속 진기를 전부 써버려 번천곤도 다시 영해 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다급하게 선급 영석을 꺼내 영력을 흡수하며 빠르게 진기를 회복했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서로 원기를 회복하기에 바빴다.

* * *

잠시 후에 청년은 겉에 난 상처를 거의 다 회복한 것 같았다.

청년이 아무 말 없이 한 손을 흔들어 파란색 영선(*靈扇:영기 부채)을 꺼내 들었다.

석목의 시선이 파란색 영선으로 향했다.

이 부채는 어떤 영수의 깃털로 만든 것 같았으며 파란색 부문이 촘촘하게 번쩍이면서 주변으로 빛을 흩날렸다. 얼핏 보아도 뛰어난 영보였다.

석목은 한편으로 진기를 회복하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

청년이 소리를 질러 영선에 빛을 퍼트렸다. 그러자 부채의 깃털이 꼿꼿이 서며 파란색 문양이 내뿜는 빛이 넓게 퍼져서는 ‘칙칙’ 소리를 냈다.

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영선에서 투명한 빙염(氷炎)이 나타나 기이할 정도로 찬 기운을 풍겼다.

청년이 파란색 빙염을 대하는 태도 역시 신중해 보였다. 한 손으로 법결을 시전하자 영선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투명한 빛을 크게 불어냈다.

파란빛이 빙염을 감은 채로 튀어 나오자 빙염을 중심으로 파란색이 가운데로 모이더니 크기가 십 장 정도 되는 커다란 구체로 변하였다.

커다란 구체의 중심에서 빙염이 이리저리 튕기며 뼈를 찌르는 한기를 내뿜었다. 한기가 스친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으며, 구체는 석목과 점점 가까워졌다.

석목이 가볍게 숨을 내뱉었는데 몸속 진기를 드디어 완전히 회복했다는 표시였다. 석목이 손에서 금빛을 반짝이자 번천곤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석목은 하늘로 날아오르며 다가오는 파란색 구체를 바라보았는데 석목의 눈빛은 결연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안, 석목은 재빠르게 돌아서서 곤봉 그림자를 줄줄이 만들어 주변 수십 장에 전부 드리웠다.

눈부신 흑백 빛 두 갈래가 석목의 몸에서 점점 커지더니 석목을 안으로 묻어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흑백 태양 같았다.

“멸선곤법!”

흑백 빛이 터지자 하얀빛은 위로, 검은빛으로 아래로 갈라지며 순식간에 흑백 공간을 이뤄 청년과 파란 구체를 전부 안으로 가둬버렸다.

이번에 만든 흑백 공간은 예전에 시전한 멸선곤법보다 훨씬 안정되었으며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거센 공간의 힘이 흑백 공간 속에서 메아리쳤으며 파란색 구체는 공간의 힘에 묶여버려 앞으로 조금 날아가다가 멈춰버렸다.

그 광경을 본 청년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석목의 안색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번천곤을 시전하며 이미 진기를 전부 소진했던 터라 다시 멸선곤법을 시전한다는 건 몸속 진기를 눌러서 짜내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석목은 빠르게 선급 영석을 하나 꺼내서는 전력으로 진기를 보충하며 흑백 공간을 안정시켰다.

순간, 석목의 몸이 빙글빙글 돌다가 번천곤으로 마른 청년을 가리켰다.

흑백 공간이 순식간에 줄어들며 막강한 공간의 힘이 압박을 했고, 파란색 구체는 짓눌렸다.

둥근 파란색 구체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졌으며 빙염은 더 빠르게 튕겼다.

청년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청년이 주문을 외우자 손에 있던 영선에서 빛이 더 크게 번지더니 힘겹게 구체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구체는 여전히 멸선곤법의 흑백 공간에 갇혀있었으며 흑백 공간이 줄어들수록 공간의 힘은 점점 더 커졌다.

펑!

파란색 구체가 드디어 터져버렸고, 중간으로 짓눌렸던 빙염도 부서졌으며 사방팔방으로 흩날렸다.

때마침 파란색 구체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청년의 몸에 빙염 한 덩이가 떨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청년은 얼굴에 질겁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 한 덩이 빙염이 순식간에 파란색 얼음으로 변하자 전혀 막지 못한 청년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파란색 얼음에서 화염이 튕기더니 기이한 힘이 주변으로 퍼졌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청년이 재주를 부리다 일을 망쳐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시전한 화염의 힘에 묶여버렸다니.

석목이 빛을 반짝이며 파란 얼음 옆으로 다가가 번천곤을 들고는 얼음을 내리쳤다.

청년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어리더니 빛을 크게 뿜어내며 온 힘을 다해 얼음을 부숴버리려 했다. 청년의 몸에서 청색, 홍색, 자색, 백색을 비롯한 다양한 색이 번지더니 구수사영(*九首巳影: 머리 아홉 달린 뱀의 허영)을 만들었다.

스윽!

순간, 구수사영이 청년의 몸에서 분리되어 빠른 속도로 석목을 덮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자 석목은 안색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미처 피하기도 전에 뱀의 허영이 석목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석목은 몸이 굳어버렸으며 곤봉을 휘두르던 자세 그래도 멈춰버렸다.

석목은 몸이 굳어버렸지만, 번천곤이 손에서 튀어나와 파란 얼음을 내리쳤다.

“안 돼!”

청년은 목이 찢어질 듯이 소리를 질렀다.

쩍!

파란 얼음이 터져버리며 청년의 몸통도 산산조각이 났다.

번천곤이 금빛을 반짝이며 다시 석목의 영해 속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흑백 공간도 터져버렸다.

석목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신식의 세계에서는 천지가 뒤집혔다. 그때 커다란 구수사영 중에 한 마리가 나타나 포효하며 석목의 신혼을 덮쳤다.

석목은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석목이 흑마문의 제자였을 때, 찰고라는 지계 고만족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상대가 죽기 전에도 이런 공격을 시전했었다.

하지만 석목은 더 이상 그때처럼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석목의 신혼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팔수흉망(*八首凶蟒: 머리 아홉 달린 구렁이)이 나타났고, 팔수흉망은 구수사영보다 왜소해 보였지만 거침 없이 공격을 했다.

양쪽은 미친 듯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신식은 난장판이 되었으며 빛이 끊임없이 번쩍였다.

구수사영은 강력하기 그지없어 아홉 머리에서 다양한 빛을 내뿜으며 팔수흉망을 밀어냈다.

구수사영의 머리 아홉 개가 동시에 뽑혀나가더니 단숨에 팔수흉망의 몸을 물어뜯고는 동시에 굵직한 꼬리를 가로로 흔들며 팔수흉망을 멀리 날려버렸다.

이어서 구수사영은 눈에 살기를 피우며 석목을 덮쳤다.

석목은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차갑게 소리를 지르며 신혼에 하얀빛을 드리우며 하얀 백원으로 변하였다. 백원과 구수사영은 크기가 비슷했으며 붉은색 두 눈에서 포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백원이 큰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려 굵고 단단한 발로 구수사영의 몸을 덥석 잡았다.

구수사영은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는 다양한 빛을 뿜어내며 백원을 공격했다.

하지만 백원은 구수사영이 가하는 공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홉 머리로 날리는 공격은 마치 기둥에 잠자리가 살포시 내려앉는 듯이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백원은 아홉 머리가 달린 몸통을 꽉 잡고는 굵은 팔뚝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 모습은 마치 마신이 강림한 듯 매우 위엄이 있었다.

스윽!

백원의 팔뚝에서 힘줄이 튀어나오더니 구수사영의 몸통은 두 덩이로 갈라져 버렸다.

팔수흉망은 구수사영이 찢어지는 것을 보자 몸을 날려 입 여덟 개를 크게 벌렸다. 그리고 두 덩이로 갈라진 구수사영의 몸통을 물어뜯으며 빠르게 삼켜버렸다.

구수사영을 삼키는 순간, 팔수흉망의 몸에서 빛이 짙게 번지더니 아홉 번째 뱀 머리가 자라났다.

석목의 두 눈에 금빛이 흐르며 고개를 들어 큰소리를 쏟아냈다.

넓게 퍼진 빛이 석목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며 등 뒤에 희미하게 뭉치자 허공에 구수흉망의 허영이 나타났다. 아홉 뱀 머리는 몹시 포악스러웠으며 커다란 몸통은 마치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거센 기운 파동이 석목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이 순간, 석목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끝없이 높아져 신경에 가까워졌다.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가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등 뒤에 자란 구수흉망의 허영이 천천히 사라져버렸으며 토템 변신도 사라졌다.

석목의 눈에 큰 기쁨이 어렸다.

토템 비술이 드디어 원만에 이르러 구수(九首)에 도달한 것이었다.

예전에 금색 교룡인 오조를 죽여 버린 후로 석목은 오조의 신혼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폐관수련을 하며 오조의 신혼을 삼키려 했으나, 토템 비술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는 데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수혼의 힘이 필요했다. 게다가 석목의 신혼은 조금 파손된 상태였기에 토템 비술이 계속 원만에 이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우연히 신경 청년의 수혼(獸魂)을 삼켜 토템 비술이 드디어 대원만에 이르렀다.

몸속에 깃든 충만하고 강력한 토템의 힘이 예전보다 몇 배나 커졌다. 그로 인해 석목의 실력은 월등하게 늘어났으며 이제 토템 비술을 시전하고, 번천곤까지 합쳐서 쓰면 신경 중기라 해도 한 번 싸워볼 만했다.

강력하고도 생생한 힘이 토템 그림에서 용솟음치며 석목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어서 사지와 뼈 곳곳으로 힘이 스며들어 한참 동안 흐른 후에 다시 단전 속으로 모였다.

석목은 시원한 느낌이 몰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에 전투를 치르며 입은 상처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석목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선급 영석을 손에 쥐었다.

* * *

잠시 후에 석목은 낯빛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부서진 청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빛이 반짝이더니 석목이 청년의 머리통 곁에 나타났다.

청년의 머리통은 아직도 파란색 얼음이 감싸고 있었다. 놀라움이 가득한 눈도, 온통 내키지 않는 것만 같은 표정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얼굴에 빛깔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신경 강자라 해도 육신이 찢어지면 죽음에 이르렀다.

석목의 눈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다시 여의빈철곤을 꺼내 들었다.

곤봉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며 빈철곤이 얼음에 박혀버린 머리통을 세차게 내리쳤다.

펑!

여의빈철곤이 튕겨져 날아갔지만 파란색 얼음과 머리통은 그대로였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이 파란 얼음은 석목이 지닌 음의 힘으로 만들어낸 하얀 얼음보다 훨씬 단단했다.

“흥!”

석목이 콧방귀를 뀌며 여의빈철곤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손에 하얀빛을 크게 드리우더니 화염으로 파란색 얼음과 머리통을 감쌌다.

양의 기운이 담긴 화염이 활활 타오르자 파란 얼음은 그제야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이때, ‘스윽’ 소리와 함께 파란빛이 머리통에서 튀어나와 먼 곳으로 도망갔다.

“기다리고 있었어. 어딜 도망가!”

석목이 차갑게 웃으며 파란색 둥근 광막을 만들어냈다.

광막은 파란빛에 닿는 순간 ‘훅!’하며 멈춰 섰다. 마른 청년의 신혼은 그 광막 속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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