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화. 봉명골
석목은 청년의 신혼을 잡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해! 푸른색 팔찌는 왜 네가 갖고 있는 거냐? 왜 나를 성 밖으로 유인했지?”
석목이 차갑게 물었다.
작은 사람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으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빨리 말해! 내가 힘을 주면 너는 혼비백산할 거야!”
석목이 손에 힘을 주자 작은 사람은 일그러졌다.
“날 죽이면 너는 영원히 여기에 갇히게 될 거야.”
작은 사람은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지만, 웃음과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환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아래쪽 바다에서도 여전히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
석목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딘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흥! 너는 지금 내 손아귀에 있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수혼을 하면 다 알아낼 수 있으니까.”
석목이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손에 검은빛을 터뜨려 파란 사람의 몸속으로 불어넣었다.
“너…… 아……”
작은 사람은 몸에 파란색을 번쩍이며 검은빛이 스며드는 걸 막으려 했다.
신경 존재가 지닌 육신이 아무리 강력하다해도 원신만 남은 상황에서 석목이 쓰는 신식의 힘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는 온 힘을 다해 수혼 비술을 시전하여 작은 사람의 기억을 더듬었다.
“꿈 깨!”
작은 사람은 이를 악물며 얼굴에 결연한 기색을 내비쳤다.
순간 작은 사람은 눈에서 빛을 반짝이더니 파란빛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석목이 깜짝 놀라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파란 사람은 빛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석목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파란빛을 날려 옆에 떨어져 있는 영선을 감았다.
부채 손잡이에서 소름 돋는 한기가 전해졌다.
석목은 눈이 맑아졌다.
영선은 물속성 영보라 석목에게 매우 어울렸다.
청년이 시전한 파란색 빙염 비술은 실로 대단했다. 이 영선 또한 제련을 거치면 석목은 실력이 또 크게 늘 터였다.
석목은 영선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영선 겉에 그려진 문양이 줄줄이 밝아지며 파란빛을 뿜어냈다.
영선 중간에 박혀있는 파란색 수정 하나가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수정에서 화염 같은 파란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석목은 눈을 반짝였다. 이 파란색 수정이 기이한 빙염을 머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신경 존재마저 자칫 잘못하면 묶여버리게 되는 위력을 본 석목은 반드시 조심해서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연구할 때가 아니라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서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무슨 이변이 생길지 모른다.
석목은 영선을 거두어들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을 날려 청년의 부러진 팔로 다가갔다.
손가락에 파란색 저장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팔도 파란색 얼음으로 뒤덮여있었다.
석목의 왼손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더니 양의 화염이 나타나 청년의 팔을 녹였다.
잠시 후에 얼음이 녹아버리자 석목이 파란색 반지를 빼내어 신식으로 들여다보았다.
신경 청년이 쓰던 저장 반지에는 귀한 물건들이 적잖게 있었으며 심지어 선급 영석도 꽤 들어있었다.
석목은 싱글벙글하며 영석을 챙겼다.
순간, 석목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영패를 하나 꺼내 들었고, 영패에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금룡 한 마리가 구름 속에서 꿀렁거리며 하늘을 누비고 다녔다.
영패의 다른 한쪽 면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예무(銳武)”
석목은 영패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금룡이 새겨진 영패는 예전에 몇몇 천정의 신장들을 죽이면서 본 적이 있었다.
이 청년은 정말 천정에서 보낸 놈일까?
진즉에 추측은 했었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필시 이곳은 천하 성역에서도 전방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천봉 일족의 주요 행성이라 수비도 매우 삼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신경 존재도 주둔하고 있었기에 천정의 세력이 침투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영패와 반지를 거두어들였다.
쫓기고 또 싸움을 치르는 사이에 날은 이미 밝았다. 축전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석목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아래에 있는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몸을 날려 왔던 길로 빠르게 날아갔다.
* * *
이 시각.
서유금을 비롯한 일행들은 이미 봉익성의 남문을 벗어났다. 서유금은 파란색 비주를 꺼냈으며 세 사람은 함께 비주에 올라탔다. 비주가 파란빛으로 변하여 남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성문에서는 다양한 빛들이 날아다녔다.
모든 사람이 향하는 목적지는 남쪽 수 백 리 밖에 자리한 붉은 구름이 드리워진 산골짜기인 봉명골이었다.
봉명골은 천봉 일족의 성지이며 종족의 금지였다. 평시 봉명골은 늘 폐쇄되어 있으며 매우 엄하게 수비를 했다. 외부인이 이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만 해도 죽을 위험이 있었기에 들어간다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녀 수임 축전은 천봉 일족이 치르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기에 봉명골에서 진행이 될 터였다. 그리하여 전례를 깨뜨리고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도록 잠시만 금제를 해제했다.
세 사람은 남쪽으로 약 삼천 리 정도 날아서야 끊이지 않고서 이어진 산맥 위 허공에 나타났다.
하늘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뚝 솟은 두 산봉우리 사이에 붉은색 깊은 골짜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기가 봉명골이군. 가자.”
서유금이 말을 하며 비주를 몰아 골짜기 입구까지 내려왔다.
산골짜기 입구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입구에 높은 붉은색 패루가 서 있었으며 그 위에 커다란 편액이 하나 걸려있었다. 편액에는 ‘봉명골’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온 산골짜기가 붉은 광막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공기에 뜨거운 기운이 자욱하게 넘쳐흘렀다.
“봉명골은 매우 대단한 금제로 드리워져 있군요. 눈앞에 선 이 패루 말고 다른 입구가 없네요.”
방진이 산골짜기를 훑어보며 말했다.
“여긴 천봉 일족의 성지로 중요한 제사나 축전은 전부 여기서 치르네. 이 정도 방호가 이상한 것도 아니지.”
서유금이 말했다.
셋은 인파를 따라 패루 앞으로 다가와 그곳에서 신분 검사를 통과한 후에야 골짜기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 *
산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 세 사람은 눈앞에 놓인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산골짜기 안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 오동나무는 수십 장까지 뻗었으며 나뭇가지에는 무늬가 줄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을 감은 기둥 같았다.
오동나무 꼭대기에는 붉은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려 산골짜기가 마치 망망한 불바다 같았다.
서유금 일행 세 사람은 골짜기 깊은 곳으로 몇 리 정도 더 걸어갔다. 줄줄이 이어진 건물들을 지나 드디어 골짜기 깊은 곳에 도착하자 그곳은 자연스레 형성된 천갱(*天坑:석회암이 침전되어 나타나는 지형) 절경이었다.
서유금은 눈에 금빛을 뿜으며 천갱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지름이 족히 천 장이나 되는 커다란 웅덩이였으며 웅덩이는 깊이가 백 장이었다. 웅덩이 속에는 돌기둥이 아홉 개 우뚝 솟아 있었으며 돌기둥들은 천갱 위로 한 장 정도 더 뻗어 나와 있었다.
그중 여덟 돌기둥은 가운데에 자리한 가장 높은 돌기둥을 에둘러 싸고 있었으며 놓인 위치는 팔괘와 같았다.
여덟 돌기둥 위에는 드넓은 편대가 올라가 있었으며 족히 그 크기가 백 장은 되어 보였다. 아마 대결할 때 쓰이는 연무대일 터였다.
천갱 외곽은 축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 수십 명은 이번 대결에 참여하는 각 종족에서 온 제자들이었으며 천갱 왼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서유금과 방진은 천갱 왼편으로 걸어갔으며 안화는 자리에 서서 대결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방진은 계속해서 천갱의 돌기둥들을 훑어보았다. 팔괘 기둥 가운데 놓인 돌기둥 위에 보라색 나무 의자가 수십 개 놓여있었으며 의자 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채워졌다.
“서 형, 저곳은 관전대죠?”
방진이 한 손으로 가운데에 놓인 돌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 그런데 이번 축전은 정말 엄청나군. 지룡, 반귀 두 종족의 장로들까지 보내다니.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던 실력이 대단한 종족들도 전부 이곳에 모였단 뜻이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지룡 일족은 이번 축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고 들었네. 종족을 이어받을 소주들도 직접 대결에 참여 한다던데 아주 이목을 끄는 자들이더군.”
서유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진은 한쪽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는 관전대 오른쪽 의자에 앉아있는 눈썹이 하얀 노인을 바라보았다.
“저분이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인가?”
서유금이 방진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며 물었다.
방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구경을 나온 사람들과 심지어 천갱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 관전대 가운데로 향했다.
그곳에는 푸른색 옷을 입고서 면사포를 쓰고 있는 젊은 여인이 앉아있었는데 바로 천봉 일족의 신임 성녀인 조령수였다.
조령수의 오른쪽에는 금색 피풍의를 두른 조선기가 앉아있었다. 피부는 하얗고 얼굴에서는 빛이 났으며 몸을 살짝 비틀어 조령롱을 향해 귓속말을 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가까워 보였다.
조령롱은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따금 미간을 찌푸리며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비록 성녀는 얼굴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지만, 면사포 사이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눈빛에 푹 빠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성녀의 왼쪽에는 머리에 봉관을 올렸으며 칠색 깃털 옷을 두른 여인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표정이 매우 엄숙했으며 옆에 앉은 두 여인이 나누는 담소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걸 보고는 가볍게 한 마디를 일깨워주었다.
그러자 두 여인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단정하게 앉았다.
이 밖에도 천봉 일족의 금봉 할머니, 진 부인, 반귀 일족의 장로 무운, 그리고 지룡 일족의 신경 강자인 적봉도 각자 자리에 앉았다.
“서 공자님,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석 공자님은 못 올 것 같네요.”
방진이 고개를 들어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석 형은 늘 시간을 잘 지켰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놓칠 리 없으니 아마 곧 오겠지.”
서유금은 비록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했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석목은 이른 아침부터 종적을 감추고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반 시진 후, 서유금과 방진은 여전히 석목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석 형에게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으니 우리는 여기서 최선을 다하자고.”
서유금이 석대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
방진이 대답했다.
이때, 관전대에서 드디어 피풍의를 두른 머리가 붉은 노인이 일어서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 종족에서 여는 성녀 수임 축전을 위해 자리를 빛내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 조주동(赵朱同)은 천봉 일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머리가 붉은 노인은 매우 정정했으며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또한 풍기는 기운도 매우 강력했는데 엄연히 신경 초기 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