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면제권
노인이 말을 마치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정말 시작을 하려나 봅니다.”
방진이 조주동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은 다 되었는데, 좀 이상하긴 하군.”
서유금이 의문스러운 듯이 말했다.
“서 공자, 무엇이 이상한가요?”
방진이 물었다.
“관전대 가운데에 놓인 세 돌의자를 보게. 이렇게 큰 축전이 열리는데다가 또 이 기회에 삼대 종족이 세력을 합치려는 목적을 두고 있는데 천봉, 반귀와 지룡 일족 족장들이 자리에 없네.”
서유금이 말했다.
“그러네요. 돌의자 세 개가 주좌 같은데 왜 아직도 비어있는 걸까요?”
방진이 놀라며 물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본격적으로 성녀 수임 축전을 거행하기 전에 여러 차례 대결을 걸쳐서 성녀의 쌍수 배필을 뽑을 예정입니다. 이번 대결을 치르는 건 중요한 일인데다가 여러분들 중에 적잖은 분들이 처음으로 주작성에 왔기에 아마 환경이 잘 적응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성녀는 여러분이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여 특별히 대결 시간을 한 시진 정도 뒤로 미루기로 결정을 내렸답니다.”
조주동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자 천갱 왼편에 서 있던 각 종족의 제자들 수십 명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팔괘 연무대를 익혀두시고 한 시진 뒤에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조주동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서 공자님, 이건…… 우리는 이제 어떡합니까?”
방진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삼대 족장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군. 그런데 석 형에게는 잘된 일이네.”
서유금이 웃으며 말했다.
방진도 서유금이 하는 말에 찬성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에 참여하는 제자들 수십 명은 대부분 어리둥절하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또한 그중 몇몇은 몸을 날려 팔괘 연무대로 올라와 무대를 둘러보았다.
* * *
파란 공간 모처에서 빛 한 갈래가 멀리서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빛은 석목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석목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동안 파란 공간을 벗어날 출구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유일하게 알아낸 점은 이 공간이 끝없이 넓다는 점이었다. 석목이 아무리 날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채아가 영수 주머니에서 날아 나왔다. 채아의 안색은 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채아는 주변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이 말했다.
“음, 여긴 어디야? 그 파란색 놈은 어디 있어? 석두, 네가 죽였구나.”
석목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으나 채아가 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석두, 역시 대단해!”
채아가 놀라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아부는 됐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나갈지 방법을 찾아야 해.”
석목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밖은 이미 날이 밝아 대결이 시작되었을 터였다.
“아까부터 이상했는데. 여긴 대체 어디야? 진법 금제 속은 아닌 것 같고.”
채아가 말했다.
“아마 어떤 법보 속 공간인 것 같아.”
석목이 말했다.
“뭐. 법보 속 공간?”
채아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알기로 영보급 법보 안에는 공간을 구축할 수 있어.”
석목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나가? 힘으로 터뜨려?”
채아가 물었다.
“이 법보를 쓰던 주인은 이미 내가 죽여 버렸어. 이제 법보에 걸린 핵심 금제를 찾아 약화시키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진법 금제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실은 매우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나에게 사령계면으로 소환해달라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바로 이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석목이 사령계면으로 소환되면 연나가 천하 성역에 표시해둔 공간 좌표가 사라진다. 나중에 다시 주작성으로 오려면 매우 번거로워질 터였다. 그러니 법보를 약화시키는 편이 훨씬 나았다.
“괜찮아. 시력은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잖아. 너는 찾지 못하지만 나는 찾을 수 있어.”
채아가 자신 있게 말하며 영목신통을 시전하여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럼 부탁해.”
석목이 말했다.
채아의 영목신통은 석목보다 뛰어났다. 둘이 힘을 합치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 * *
한 시진은 빠르게 흘러갔다.
돌기둥 관전대의 가운데에 놓인 세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이때, 천봉족 장로들이 금봉 할머니 주위로 모여 무엇인가 논의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조주동이라 불리는 붉은 머리 장로가 다시 앞으로 걸어 나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이번 대결이 곧 시작됩니다. 우선 대결을 치르며 알아야 할 자세한 내용들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주동이 말을 마치자, 현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은 가운데에 놓인 석대를 바라보았다.
서유금은 주변을 훑어보며 신식을 보내 사방팔방을 둘러본 후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뱉었다.
“한 시진이나 지연이 되었는데 석 형이 오지 않는 것을 보니 급한 일이 생긴 것 같군.”
방진이 서유금이 하는 말을 듣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선발에는 총 일흔네 명이 참여합니다. 그중 팔황고족의 제자, 그리고 천하 성역 명문 종족의 제자들 중에 자신이 갖춘 실력에 따라, 그리고 종족이 보낸 선물의 가치에 따라 열 명을 따로 뽑아 면제권을 두 차례 부여하겠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마지막에 치를 대결 두 차례로 넘어갑니다.”
조주동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마친 조주동이 손을 흔들자 허공에 금색 광막이 나타나더니 면제권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방진의 형인 방책도 있었으며 ‘용봉배(龍鳳配)’라 불리는 지룡족의 소주 적양(狄骧)도 있었다.
“뭐? 면제권?”
방진은 방책의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런 거대 종족의 제자들은 종족들에서 든든히 지원을 해주며 육성을 해 수련 경지를 빠르게 끌어 올릴 수 있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갖췄으니 천하 성역에서도 이름을 떨쳤을 테고. 천봉 일족을 비롯한 삼대 종족은 성녀 수임 축전을 명목으로 자원을 모으는 게 목적이니 이런 특권을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서유금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제 견식이 너무 짧았네요.”
방진이 말했다.
“후후, 너무 개의치 말게. 자네 정도 실력이라면 마지막 두 차례 대결까지 가는 건 문제가 없을 거야. 그때 다시 자네의 형과 대결을 치르면 되네.”
서유금이 말했다.
방진 말고도 조주동이 하는 말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그 불만은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장은 잠깐 북적거렸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을 석대로 불러 추첨하겠습니다.”
조주동이 말했다.
천갱 왼편에 있던 참여자 육십여 명은 분분히 몸을 날려 가운데에 자리한 관전대로 올라왔다.
조주동은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색이 살짝 이상해지는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조주동이 오른손을 들어 옷자락에서 빛을 뿜어내자 반짝이는 옥첨(玉籤) 수십 장이 날아 나와 참가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전부 어리둥절했다.
서유금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옥첨을 바라봤지만 화려한 빛이 나 눈이 부셔 글씨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이 옥첨에는 대결 순서와 연무대 위치가 적혀 있습니다. 같은 옥첨을 뽑은 사람들이 서로 대결을 치러 승자를 가리게 될 예정이죠. 자, 하나씩 뽑아보세요.”
조주동이 입을 열었다.
조주동이 말을 마치기 바쁘게 참여자들 육십 명이 전부 손을 뻗어 허공에서 옥첨을 하나씩 뽑았다.
모든 사람들이 옥첨을 하나씩 뽑았지만, 허공에는 여전히 옥첨이 하나 떠 있었다.
조주동이 하나 남은 옥첨을 바라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손을 흔들며 옥첨을 옷자락으로 거두어들였다.
서유금은 뽑은 옥첨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위에 글씨가 한 줄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차례 ‘진(震)’ 자대. 자네는 뭔가?”
서유금이 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 차례 ‘건(乾)’ 자대.”
방진이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총 네 차례에 걸쳐 여덟 연무대가 동시에 대결을 치르겠군.”
서유금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이때, 조주동이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첫 번째 대결, ‘건’자 석대 영부족의 한절 대 진해묵족의 수양서. ‘곤’자 석대 산괴족의 암골 대 진환등족의 목등…… ‘진’자 석대 비천서족의 서유금 대 진뢰돈족의 곽저…… 대결을 치를 분들은 각자 무대로 올라 준비를 하시죠.”
“내 예상이 맞았군. 먼저 가지.”
서유금이 방진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는 몸을 날려 허공에 선을 그으며 동쪽 돌기둥으로 향했다.
* * *
‘진’자 석대 위에 올라간 서유금은 힘껏 땅을 짚었다. 마치 대결을 치르기에 돌기둥이 단단하게 충분히 버틸 수 있는지 시험을 해보는 것 같았다.
이어서 보랏빛이 허공에서 빠르게 날아오더니 키가 훤칠한 보라색 사나이가 돌기둥으로 내려왔다.
서유금은 실눈을 뜨고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진뢰돈족에서 온 곽저(霍雎)였다. 눈과 눈썹이 쫙 뻗었으며 광대가 튀어나온데다가 입술이 살짝 밖으로 뒤집힌 걸 보니 충분히 거친 외모였다.
이와 동시에 천갱 주변에서 빛이 열 몇 갈래 여기저기 이동하며 각자 오를 연무대로 향했다. 이제 첫 번째 대결이 곧 시작할 터였다.
‘진’자 석대에서 서유금이 맞은편에 있는 곽저를 향해 인사를 했으며 상대도 서유금에게 인사를 했다.
예의를 갖췄으니 이제 쓸 때 없는 말은 건너뛰고 각자 몸에 빛을 밝혀 앞을 향해 덮쳤다.
곽저는 외모가 매우 거칠었지만, 성격은 거칠지 않았다. 곽저는 시험 삼아 서유금과 가볍게 부딪친 후에 곧장 뒤로 물러났다.
서유금이 지닌 힘이 그리 세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곽저는 몸을 흔들어 ‘칙칙’ 소리를 내떠니 커다란 번개를 몸에 감았다. 그리고 두 팔을 펼쳐 보라색 단창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단창이 나타나는 순간, 곽저는 거침없이 서유금을 덮쳤다.
서유금이 몸을 살짝 비틀어 잔영을 그리며 보라색 남자가 날린 공격을 피했다.
둘이 비껴가는 사이, 서유금은 오른팔을 들어 곽저의 뒷등을 힘껏 밀었다.
서유금이 오른쪽 검지에 낀 금색 반지가 빛을 반짝이더니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어 곽저를 찔렀다.
곽저는 공격이 허공에 닿는 순간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다시 막아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많이 늦었다.
“으악!”
곽저가 소리를 지르며 몸에 드리운 빛을 더 넓혀갔다. 원래 훤칠하던 키는 더 자랐으며 몸에서 굵고 뾰족한 검은 털도 자라났다. 그리고 얼굴도 앞으로 늘어나 입가에 하얗고 뾰족한 이가 드러났다.
곽저가 변신을 이제 막 끝났을 때, 서유금이 빚어낸 금빛이 때마침 곽저에게로 다가가 등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퍽!
굉음과 함께 보라색 번개가 터져버렸다.
서유금은 손이 마비되는 걸 느끼더니 몸이 흔들려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돌기둥 변두리까지 날아가서야 서유금은 간신히 몸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니 손바닥이 검게 타버렸으며 금색 반지는 이미 터져버렸다.
하지만 곽저도 불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굽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힘을 꽤나 소모한 것 같았다.
곽저의 등에서 검은 털이 벗겨져 피부가 훤히 보였으며, 드러난 피부에 뼈까지 보이는 깊은 상처가 하나 파여 있었다.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두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은 얼굴에 심각한 기색이 어렸다. 아무도 감히 상대를 가볍게 보지 못했다.
이때, 천갱 주변에서 격렬한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유금은 아직 대결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그 소리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북 방향에 자리한 ‘건’자 연무대에선 이미 승부가 갈렸다.
영부족에서 온 하얀 옷을 두른 청년 한절은 반다경도 안 되는 사이에 상대를 꺾어버리고서 다음 대결에 진입했다.
관전대에 있던 몇몇 장로들도 얼굴에 웃음기를 띄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절을 가리키며 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절도 매우 예의 바르게 관전대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다시 연무대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