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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01화 (701/916)

701화. 강력한 위압감

금봉 할머니 일행은 내성에 자리한 붉은 건물 앞으로 내려왔다.

대전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으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들은 하나같이 안색을 바꾸었다.

“이놈이 정말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진즉에 도망을 쳐버렸어. 봉익성에서 그놈 기운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구나.”

금봉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조 장로님께서 천봉 일족을 배신하고 천정에 빌붙기라도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금봉 할머니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때, 먼 곳에서부터 하늘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세 갈래 빛이 순식간에 봉익성의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세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가운데 서 있던 중년 남자는 붉은 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날렵한 콧대 위로 길게 찢어진 봉황 같은 눈에선 소름이 돋는 괴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왼편에는 체구가 거대하며 굳센 의지를 드러내는 사내가 서있었다. 사내는 얼굴에 철침처럼 짧은 수염이 잔뜩 났으며 몸에 어두운 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옷에 귀갑 무늬가 가득했다.

그리고 오른편은 쉰 살 정도 되는 남자가 서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잘 다듬은 몸을 드러냈다. 화려한 머리카락과 달리 얼굴로는 경건한 표정을 지었으며 보라색 피풍의에 금색 무늬가 가득 수놓아져 있어 매우 화려해 보였다.

세 사람이 풍기는 방대한 기운은 마치 높은 산과 한없이 넓은 바다와도 같아 금봉 할머니마저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을 기세였다.

“족장님!”

천봉, 지룡, 반귀 일족 사람들이 전부 하늘로 날아올라 허공에서 세 사람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석목을 비롯한 외부인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세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꽤 많이 있었다.

“이 세 분이……”

석목이 옆에 서 있는 서유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죠. 붉은 피풍의를 두른 채 가운데 계신 중년이 천봉 일족의 족장이신 조윤(趙胤), 왼쪽에 체구가 거대한 사내분이 반귀 일족의 족장이신 육규종(陸馗鍾), 오른쪽에서 보라색 피풍의를 두른 채 계신 분이 지룡 일족의 족장이신 적언(狄彥)이죠.”

서유금이 눈에 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익성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나?”

아수라장이 된 성시를 둘러보던 조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색과 말투는 담담했지만, 목소리에는 위엄과 분노가 가득 차있었다.

족장이 말을 하자 천봉 일족 사람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며 숨소리를 죽였다.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정 놈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금봉 할머니가 사건이 일어난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조거!”

조윤의 차가운 눈빛에서 미칠 듯한 위압이 풍겼다.

수련 경지가 약한 사람들은 밀려오는 압력 때문에 뒤로 밀려났으며 갑자기 머릿속이 흐릿해지더니 눈앞이 핑 돌았다.

“족장님. 왜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금봉 할머니가 물었다.

“전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도 놈들이 설치한 대진에 빠졌네. 보아하니 천정이 진즉에 덫을 놓은 것 같더군.”

조윤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마음이 침울했는데 축전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추후에 어찌 연합을 할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조윤이 침묵을 깨자 진 부인이 짧고 급하게 대답을 하더니 곧장 한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조윤이 육규종과 적언을 향해 말했다.

두 족장도 안색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셋은 아무 말 없이 아래에 자리한 한 대전으로 내려갔다.

* * *

봉익성 내성에 자리한 봉염전(鳳炎殿).

봉염전은 천봉족의 주전(主殿)으로 종족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이 시각, 봉염전에는 삼대 종족에서 중요한 일을 도맡아하는 장로들이 모두 모여 제법 시끌벅적했다.

투명한 난새 조각이 새겨진 대전의 주좌엔 조윤이 앉아있었으며 양쪽에 놓인 자단 나무 의자에는 각각 반귀 일족의 족장인 육규종과 지룡 일족의 족장인 적원이 앉아있었다.

“뭐라고 했나? 방천정(方天正)이 전사(戰死)했다고?”

조윤이 싸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예상치 못한 비보를 듣자 대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족장님,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뿐만 아니라 축전에 참여했던 작은 종족에서 온 족장들과 장로, 그리고 제자들까지 이번 전투를 치르며 전사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린 신경 초기 강자 두 명과 백 명이 넘는 성계 강자들을 잃었습니다.”

허리를 굽힌 채 고개마저 떨군 조주동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육규종과 적언도 안색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부상을 당한 인원을 빠르게 파악하여 우선 회복시키게. 축전에 참여했던 여러 종족을 필히 차질 없이 모시고, 심혈을 기울여 빠르게 회복하도록 도와야만 해. 그리고 주작성에 위치한 몇몇 요지를 철저히 감시해서 천정의 끄나풀들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조윤이 한 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조 형, 이게 동기가 될 수도 있소. 복수심이 불타오를 때 빠르게 연합을 도모해야 하오. 같은 적을 두게 되었으니 분명 더욱 끈끈해질 것이오.”

반귀족의 족장이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육 형이 품은 뜻은 잘 암니다만, 여러 종족과 세가들이 변고를 당했으니 우리 삼대 종족을 향한 믿음이 깨졌을 수도 있소. 마음이 쉽지 동하지 않을 것이오.”

지룡족의 족장인 적언은 반귀족의 족장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때, 닫혀있던 대전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조주명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왔다.

“족장님,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이 전사한 후로 손자인 방책이 홧김에 종족의 신물을 회수해 일족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 삼대 종족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조주명이 조윤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대전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여러 종족이 모여 연합을 도모하기 위해 수임 축전을 열었는데, 음모에 휘말려 다른 종족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으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구나. 우선 시국을 안정시키는 게 시급하다.”

조윤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한 쪽에 서 있던 조령롱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족장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성녀 수임과 관련된 일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변고로 축전이 중간에 끊겨버렸지만, 이 일은 천봉 일족의 흥망과도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의 사기도 북돋아 줄 일입니다. 빨리 축전을 끝내야 하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여쭤보겠습니다.”

“그 일은 우선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지금 천하 성역이 처한 국면을 진정시키는 걸 우선순위에 두어야하겠지. 천정이 주작성을 습격했으니 전투를 치르는 전방도 돌발 상황을 피치 못할 게다. 빨리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세를 안정시켜야하니 축전은 우선 미루자꾸나.”

조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조윤이 말을 마치기 바쁘게 장로 한 명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족장님, 전방에서 온 속보입니다. 고만족 병사들이 갑자기 두 배나 늘어 방어선이 밀리고 있답니다. 너무 압도적으로 밀린다고 하니 지원을 요청 드립니다.”

장로 한명이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몸을 굽히며 말했다.

“풍파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소. 조 형, 지금 어서 각 종족의 족장과 장로들에게 종족으로 돌아가서 전방으로 전력을 투입시키라고 전해야 하오.”

적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적 형, 말씀대로 하지요. 우리 천봉 일족도 전력을 다하겠소.”

조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언이 하는 말에 수긍했다.

“족장님, 성녀 수임 축전은 마무리를 짓지 못했지만 대결을 치르며 실력이 뛰어난 후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심혈을 기울인다면 크게 쓸 후배들입니다.”

금봉 할머니가 말했다.

“족장님, 대결을 하며 이미 성녀가 맞을 쌍수 배필을 뽑았습니다. 빨리 두 사람이 혼인을 하도록 한 후에 음양란봉비술을 수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두 사람의 실력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천거원 일족과 연맹을 맺어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조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주명이 입을 열었다.

“성녀가 아직 수임하기 전인데 이대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진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비상시기인 만큼 상식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리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지요. 성녀도 수련 경지가 대원만에 이르렀으니 음양란봉비술까지 익힌다면 곧장 신경에 도달할 겁니다. 이건 천봉 일족뿐만 아니라 천하 성역의 요족들에게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조주명이 대답했다.

조윤이 어두운 안색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석목이라는 자는 미천거원 일족을 대표하여 여기에 왔지만, 혼자서 온 게 아니오? 그렇다면 그 자의 신분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소.”

이때, 반귀족의 족장인 육규종이 갑자기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석목이 올 때, 미천거원 일족의 장로 영패를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백원왕의 혈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천봉 일족과 미천거원 일족이 연맹을 맺으며 나눈 신물인 ‘열반봉채’도 들고 왔습니다. 그러니 신분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변고에서 큰 공까지 세웠지요.”

조주명이 설명을 했다.

“그렇다 한들 고작 인족이니 백원왕의 혈맥을 받았다고 해도 순수한 혈맥은 아닐 것이오. 아마 신분이 성녀와 어울리지 않을 듯하오.”

육규종이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성녀는 마땅히 훌륭한 요족 청년과 연을 맺어야 하오. 하지만 결국 천봉 일족이 정할 일이니 조 형이 결정을 내리는 게 좋겠소.”

적언이 조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석목이라는 자와 령수, 그 계집애를 대전으로 부르게. 내가 직접 봐야겠군.”

“네.”

조주명이 대답을 하고는 빠르게 대전 밖으로 나갔다.

* * *

잠시 후에 석목과 종수가 대전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올린 후에 조령롱이 종수를 옆으로 끌어와 버렸기에 석목 혼자만 대전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반귀와 지룡 일족의 족장들은 석목이 인족이라는 사실이 몹시 껄끄러웠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강력한 위압감을 풍기며 석목을 압박했다.

허나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영압을 풍기지는 않았다.

만약 평범한 성계 제자였더라면 그 누구도 실력이 막강한 신경 두 명이 동시에 던지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영력 압박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해도 이미 시선 때문에 겁을 먹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게 뻔했다.

하지만 두 족장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석목은 성계 초기부터 신경들과 여러 번 전투를 펼쳤기에 영력 압박이 없이 단순히 기로 누르려는 시선만으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었다.

석목은 세 신경 강자들 앞에서도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강자들과 여유롭게 시선을 마주쳤다.

한참 동안 석목을 바라보던 조윤은 찌푸렸던 미간을 펼쳤는데 석목이 보여준 태도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석목, 주명 장로가 한 말을 듣자니 이번 변고에서 적잖이 공을 세웠다고 하더군.”

조윤이 입을 열었다.

“족장님, 우연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별로 보잘것없는 도움을 주었을 뿐이죠. 공을 세웠다기엔 과분합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진심 어린 태도로 대답했다.

조윤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전에 대결을 치르며 자네가 여러 종족에서 온 훌륭한 제자들을 꺾고, 수아의 배필이 될 자격을 얻었다고 전해 들었네. 좋은 일이긴 하다만 예상했던 기간 안에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

여기까지 말한 조윤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석목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는 조윤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봉익성이 습격을 당했네. 이제 천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겠지. 천하 성역에 있는 여러 종족들도 천정이 침략할 테니 자네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겠네.”

조윤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조윤이 ‘나중에 다시 치르겠네.’가 아니라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겠네.’라고 말을 하는 순간, 석목은 안색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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