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다시 만나다
두 사람을 불러 어떻게 혼사를 맺을지 논의를 하는 자리인 줄 알았던 종수는 혼사를 미루려는 기미가 보이자 순식간에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성큼성큼 대전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종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석목이 먼저 말을 던졌다. 그렇게 힘 있게 뱉은 말 한마디는 매우 단호했다.
그 한마디 말이 울려 퍼지자 대전은 왁자지껄 난리가 났다.
까마득한 먼 옛날부터 이렇게 조윤에게 반대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엄하다!”
조령롱이 호통을 쳤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느냐?”
조윤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석목, 이런 태도로 족장님과 말을 하면 통하지 않을 걸세.”
조주명이 긴장한 얼굴로 다급하게 전음을 보내 석목을 일깨워주었다.
“족장님, 만약 전쟁이라는 연유로 저와 수아의 혼사를 미루시는 거라면, 저는 백 번도 더 수긍하며 절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만약 다른 연유로 번복을 하시는 거라면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석목이 단호하게 말했다.
“석목, 자네는 고작 인족에 불과하지. 게다가 혈맥마저 성녀보다 한참 뒤떨어졌으니 분수를 지키는 것이 좋을 걸세. 만약 자네가 기꺼이 포기를 한다면 우리 삼대 종족이 자네에게 충분히 보상을 해주겠네.”
육규종이 곁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설득했다.
“석목, 자네가 갖춘 뛰어난 자질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일세. 그러니 우리 삼대 종족이 뒤에서 밀어주면 백 년 안에 거뜬히 신경에 도달할 걸세.”
적언도 웃는 얼굴로 달랬다.
천봉 일족이 처리할 일에 끼어드는 두 족장들을 지켜보던 조윤은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족장님께서 써주신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후한 대접은 종족의 후배들에게나 베풀어주시죠.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아와 혼인을 맺을 사람은 꼭 저여야 하며, 그 누구도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을 겁니다.”
석목이 세 족장을 바라보며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조윤은 얼굴에서 화가 가시더니 오히려 석목이 마음에 드는 눈치를 내비쳤다.
석목이 그리 말하자 종수는 얼굴이 붉어졌으며 심장이 놀란 망아지처럼 정신없이 뛰었다.
“저는 미천거원 일족을 대표하는 자로서, 그리고 백원왕의 후손으로서 대결을 치르며 온전히 제 실력으로 일 등을 쟁취했어요. 그리고 저와 수아는 뜻이 맞아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어째서 다들 말리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까?”
석목이 되물었다.
그러자 반귀, 지룡 일족의 족장들은 한참 동안 어안이 벙벙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목, 두 족장님이 품으신 뜻을 오해하지 말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지.”
조윤이 말했다.
“혹시 어떤 부분을 염려하고 계시는지요?”
석목이 물었다.
“자네는 백원왕의 정혈을 물려받았지만, 몸속에 깃든 미천거원 일족의 혈맥은 아직 각성되지 않았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혈맥이 아주 미약해 보이지. 만약 자네가 수아와 함께하여 음양란봉비술을 수련하게 된다면 수아가 얻을 수 있는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겠지. 허나 만약 자네가 미천거원 일족의 혈맥을 각성하게 된다면 그때는 흔쾌히 혼사를 맺어주겠네.”
조윤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한참 동안 침묵에 빠졌다.
이때, 석목의 귓전에서 조주명이 보내는 전음이 울려 퍼졌다.
“석목, 다른 두 족장님들이 낸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족장님도 난처한 상황이네. 두 족장님들 뒤에는 수많은 천하 성역의 종족들이 줄지어 있으니, 자네가 강제로 밀어붙인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걸세. 이 일은 조급히 굴어선 안 될 일이네.”
석목이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그럼 그때 또 다른 이유를 들어 혼사를 막으시진 않길 바라겠습니다.”
“물론이네.”
조윤이 대답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주명이 지시한 대로 한쪽에 서 있었다.
이 일은 이렇게 한 단락 마무리 지었다.
그 뒤로 조윤과 두 족장은 천정의 기습과 관련된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였다.
* * *
봉염전에서 나온 석목과 서유금은 대결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몇몇 제자들과 함께 시종들이 안내하는 대로 봉익성 내성에 자리한 편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초저녁, 석목은 채아를 데리고 천봉족이 마련해준 거처로 돌아갔다.
문을 여는 순간, 채아는 식탁에 놓인 감칠맛 나는 음식들을 보았다.
순간, 채아는 두 눈에서 빛을 반짝이며 다급하게 석목의 어깨에서 날아 내려가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두…… 천봉족이 해주는 대우가 아주…… 후하네.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가득하다니.”
채아가 음식을 우물우물 삼키며 말했다.
“먹보야, 그렇게 많은 영재를 씹어 먹고도 이런 흔한 음식들이 눈에 들어와?”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석두, 그건 아니지. 영재는 영재만의 맛이 있고, 이 다과는 또 다과만의 맛이 있다고. 굳이 편식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영재도 질리는지 요즘에는 이런 다과가 더 맛있어.”
채아가 고개를 들고는 정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먹어, 그래 먹어라. 이따가 더 줄게.”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더 줘? 뭘 더 줘?”
채아는 더 준다는 말을 듣자 몹시 흥분했다.
“밤에 천봉족의 감시를 뚫고서 수아가 머무는 거처를 찾아내면 선급 영석을 한 알 줄 게, 어때?”
석목이 물었다.
“아…… 각시를 찾으러 가겠다고. 그럼 당당하게 가서 찾으면 되잖아?”
채아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천봉 일족의 장로들은 이미 나와 수아의 관계를 눈치 챈 것 같아. 그래서 일부러 만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어. 오늘 봉염전에서 논의를 마친 후에 수아를 만나려고 했는데, 이미 내성으로 데려갔더라고.”
석목이 말했다.
“흥! 이 답답한 놈들……”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씩씩거렸다.
“우리가 머무는 구역은 봉염전과 봉염전 뒤편에 자리한 천봉 일족의 주요 지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오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는데 백 장마다 보초가 서 있더라고. 그 밖에도 보이지 않는 보초들이 있으니 꽤나 경계가 삼엄한 편이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채아가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부탁해.”
석목이 웃으며 선급 영석을 채아에게 던져주고는 침상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채아는 영석을 씹어 삼키며 만족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마에 자라난 깃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깊은 밤, 달의 그림자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석목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옆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채아를 깨웠다.
“일어나. 이제 가야지.”
석목이 말했다.
채아는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채아를 집어 어깨 위에 얹었다.
사람 한 명과 새 한 마리가 어둠 속을 헤집고 나와 천천히 문을 걸어 잠그더니 몸을 날렸다.
석목이 명수결로 수막을 만들어 채아와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갔다.
“석두, 맛있어…… 정말 맛있다니까……”
채아는 꿈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석목은 곧바로 채아의 입을 틀어막고는 이마를 튕겼다.
“음……”
채아가 아프다고 소리를 쳤지만 입을 막고 있었기에 ‘웅, 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채아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빨리 봐봐.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돼?”
석목이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채아에게 물었다.
“흥, 잘난 네가 알겠지. 저 녀석들에게도 꿀밤이나 한 대씩 날리고서 가면 되잖아.”
채아가 툴툴거렸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최상급 영석 몇 개를 꺼내 채아의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토라져 있던 채아가 갑자기 화색을 드러내며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이쪽이야.”
채아가 단번에 영석을 삼켜버리고는 몸을 날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에 석목의 귓가에 채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두, 따라와.”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아무 말 없이 채아가 향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채아에게 안내를 받으며 석목은 보초들이 지켜보는 시선을 피해 빠르게 봉염전을 지나 천봉 일족이 머무는 핵심 구역에 도착했다.
“수아가 정말 여기에 있어?”
석목이 금색 대전의 지붕에 선 채로 주변에 둘러싸인 낮은 산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종수 누나의 기운을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런데 저 낮은 산을 결계로 덮은 것 같아. 그냥 가면 들켜버릴 게 뻔해.”
채아가 말했다.
“그래? 그럼 진안을 찾을 수 있겠어?”
석목이 물었다.
“있어.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채아가 말했다.
그리고 빛을 반짝이며 낮게 늘어선 산들을 자세히 훑었다.
“진안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결계 서북쪽에 숨겨진 문이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면 들키지 않을 거야.”
잠시 후에 채아가 좋아하며 소리쳤다.
그 말을 듣자 석목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산의 서북쪽으로 날아가 숨겨진 문을 열고서 걸어 들어갔다.
* * *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관목 숲을 지나서야 석목은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나무들이 드리워진 산꼭대기에 높이가 삼 층인 건물이 홀로 서 있었는데 거기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건물 아래로 천봉 일족의 경비병 몇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종수의 기운을 느낀 석목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려 건물 꼭대기 층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종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밤이 깊었는데 종수는 혼자서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수는 슬픔과 원망이 가득 찬 눈빛을 내비쳤다.
이때, 종수는 마치 무엇인가 느낀 듯,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창을 사이 두고서 석목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종수는 흠칫 놀라더니 눈에 기쁨을 가득 내비쳤다. 그러나 눈빛에는 착잡한 감정도 섞여 있었다.
둘은 멍하니 서로의 그림자만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밤새도록 보고만 있을 거야?”
채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종수는 ‘풋!’하고 웃음이 터져서 일어선 후에 창을 열었다.
“석…… 석 오라버니, 빨…… 빨리 들어와요.”
얼굴이 분홍빛으로 발그레한 종수는 몹시 예뻤다.
석목은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날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채아도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석목이 곧바로 창을 닫으며 채아를 밀어냈다.
“채아, 너는 망을 보고 있어.”
석목이 말했다.
“석두! 이 미색에 빠져서 우정은 저버린 놈아, 배은망덕한 놈……”
채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짓누르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 그래도……”
종수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괜찮아.”
석목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야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석 오라버니, 꼭 다시 나타나실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잠시 후에 종수가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깼다.
“수아, 헤어질 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볼 수 없을지 몰랐어…… 아, 결계에 숨겨진 문은 네가 일부러 남긴 거야?”
수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