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03화 (703/916)

703화. 금정염옥

“밤이 깊었는데 잠도 안 자고 나를 기다렸어?”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종수가 불그스름한 얼굴을 살짝 숙였다.

“내가 못 왔더라면 어쩔 뻔했어? 이렇게 밤새 앉아있었을 거야?”

석목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으나 아프기도 했다.

“오라버니가 올 줄 알았어요.”

종수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와르르 무너져버린 석목은 몸을 일으켜 종수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덥석 안았다.

“수아, 미안해. 그때는 내가 널 지키지 못했어.”

석목이 아래턱으로 수아의 머리카락을 비비며 안쓰러워했다.

“아녜요. 그때는 오라버니라도 절대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다행히 사부님이 저를 찾아서 종족으로 데려왔죠, 그리고 저는 살아남아서 이렇게 오라버니를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종수가 말했다.

“그 후엔? 어떻게 네가 천봉족의 신임 성녀가 된 거야?”

석목이 물었다.

“제 몸속에 흐르는 천봉 혈맥이 매우 순수하다는 걸 알아차린 사부님이 혈맥을 완전히 각성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혈맥을 각성한 후로 저는 종사(*宗祠: 사당의 일종)에서 봉황 성염의 세례를 받았고요. 밤낮없이 신성을 기르며…… 그리고 제 타고난 자질과 경지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장로들과 족장님이 저를 신임 성녀로 지정했어요.”

종수는 그간 겪은 일들을 자세하게 석목에게 말해주었다.

“수아, 그동안 많이 고생했어.”

조용히 종수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던 석목은 그녀가 말을 마치자 깊은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 오라버니는요? 어떻게 남해성에서 떠났고, 또 어떻게 미천거원 일족의 넷째 장로가 된 건가요?”

종수가 고개를 들어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말하자면 복잡해…… 그때 네가 떠난 후에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알지 못했어. 그래서 천오상회에……”

석목도 자신이 겪은 일을 일일이 종수에게 말해주었다.

종수가 겪었던 것보다 석목이 겪은 인생이 훨씬 굴곡졌다. 남해성을 떠나 청란성지로 들어간 후로 흑마족의 침입을 막으며 다시 이진종으로 잠입하기까지. 그리고 곤륜성허를 탐색한 후에 천정의 음모로 청란성지가 파멸했으며 다시 온갖 시련을 겪다가 천하 성역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던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으리라 짐작을 했던 종수마저 석목이 말을 하는 동안 긴장을 놓지 못한 채 석목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버려 간간히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 이미 두 시진이나 흘렀다.

“……이렇게 미천거원 일족의 장로가 되었고, 네 수임 축전에 참여하게 된 거야.”

석목이 말했다.

“석 오라버니. 이번 축전은 저를 위해 쌍수 배필을 선발하는 자리였지만, 저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부님과 종족 사람들이 그간 저에게 베푼 정과 성역이 처한 불리한 국면을 생각하니 절대 거절하지 못할 상황이었기에 죽을 만큼 고민한 끝에 꼭 저를 이겨야만 배필로 맞겠다 말한 거예요. 그리고 실은 속으로 오라버니가 꼭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제 마음을 알아봤는지 이렇게 오라버니가 나타났네요.”

종수가 깊은 숨을 내뱉고는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내가 못 왔더라면, 그리고 네가 대결에서 졌더라면 어쩌려고 그랬어?”

석목이 물었다.

“선기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종수가 말했다.

“선기? 그 천봉족 계집애?”

석목이 멈칫했다.

“맞아요.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계속 저를 보살펴줬던 언니예요. 만약 제가 지게 되더라도 저를 도와서 주작성을 빠져나가 남해성에서 오라버니를 찾도록 도와준다고 했어요.”

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가슴이 뜨거워져 종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종수는 석목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한참 후에야 석목은 다시 종수를 바라보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아, 다시는 너를 잃지 않을 거야.”

“네.”

종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아!”

석목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푸른색 팔찌를 꺼내며 종수에게 건넸다.

“이건…… 오라버니가 제게 준 팔찌잖아요. 원래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최근에 잃어버려서 속상했죠.”

종수가 놀라며 말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 또 잃어버리면 그때는 못 찾을지도 몰라.”

석목이 종수의 손을 살짝 당겨 팔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팔찌에 대한 의문스러운 점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수아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석 오라버니, 저도 선물할 게 있어요.”

종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소매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붉은 옥패 하나를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옥패를 자세히 바라보던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였다.

옥패는 피처럼 붉었으며 그 속에 금색 투명한 실들이 줄줄이 그어져 있었다. 매우 뜨거운 기운을 풍기고 있는 옥패는 불속성 본원의 물건이었다.

“이건 금정염옥인데 제가 막 종족에 돌아왔을 때 족장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에요. 그동안 계속 지니고 다니며 천봉 신혼과 제 몸을 따뜻하게 도와줬지요. 예전에 사부님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구전현공을 수련하려면 본원의 물건이 필요하다면서요? 석 오라버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일 거예요.”

종수가 말했다.

“안 돼. 수아, 이건 네게 너무 중요한 물건이야. 난 절대로 받아서는 안 돼.”

석목이 거절을 했다.

“석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제 부군으로 여기고 있어요. 오라버니도 저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는데 왜 네 것, 내 것을 따지셔요?”

종수가 조금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수아, 그거랑 달라. 이 금정염옥에는 매우 순수한 정화(情火)가 들어있어. 너도 품는 동안 성염을 많이 흡수했을 테니 계속 지니고 다닌다면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석목이 사양하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 오라버니만을 위한 일이 아녜요.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예요. 석 오라버니가 충분히 강해져야만 우리는 여러 방해와 고난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어요. 다시는 저를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종수가 진심으로 설득했다.

“그건……”

석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창가에서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들어왔다.

“석두, 네가 지금 우물쭈물할 때야? 이미 여섯 번째 단계 대원만을 이뤄서 때마침 일곱 번째 단계를 수련할 불속성 본원의 물건이 필요했잖아. 이렇게 중요한 물건이 눈앞에 있는데 왜 머뭇거려?”

채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망을 보라고 해잖아. 왜 들어왔어?”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됐고, 전에 조극이 너보다 한 발 앞서고 있다 했잖아? 지금이 따라잡을 기회라고.”

채아가 석목이 하는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알았어.”

석목은 잠깐 고민하고는 말했다.

종수가 기쁜 마음으로 석목에게 옥패를 건넸다.

“수아, 근처에 은밀한 장소가 있을까? 빨리 이 물건을 연화시켜서 구전현공의 일곱 번째 단계를 수련해야 할 것 같아.”

석목이 옥패를 꽉 쥐고는 그 속에 담긴 불속성 본원의 힘을 느끼며 말했다.

“있어요. 봉익성에서 서남쪽으로 오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염작산(炎灼山)이 있어요. 제가 수련할 때 찾는 장소인데 제 사부님과 몇몇 장로들 말곤 개미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지요. 거기서는 안심하고 수련해도 돼요.”

종수가 말했다.

“그럼 지금 가자.”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요.”

종수가 대답했다.

* * *

잠시 후에 둘은 어둠을 헤집으며 봉익성에서 나와 염작산으로 날아갔다.

약 반 시진 정도 날던 석목은 멀리 있던 어두운 하늘 아래 커다란 검은 건물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였으며 건물 꼭대기에선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염작산은 빈번히 불을 뿜는 화산이었다.

석목은 종수를 따라 산꼭대기와 가까운 곳에서 내린 후로 다시 백 장 정도 걸어가서야 화산 입구에 도착했다.

화산 입구의 내벽은 검게 탄 자국이 가득했으며, 바닥에서 들끓는 붉은 용암은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내벽에 부딪쳤다.

“지하에서 들끓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네. 이 안에 화정백이 있으려나. 너무 오랫동안 먹지 않았더니 자꾸 생각나네.”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서서 화산 입구 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는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석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서 수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몸을 날려 화산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채아가 다급하게 석목의 어깨에서 날아 종수의 오른쪽 어깨에 앉았다.

석목은 들끓는 용암 속으로 날아가다가 불에 닿기 직전에 빛을 밝히며 반투명한 광막을 펼쳐 몸을 보호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종수는 손에 빛을 반짝이며 붉은 옥빗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옥빗은 평범한 빗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종수가 화산의 입구 위로 날아가 옥빗으로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촘촘하고 규칙적인 붉은 그물이 허공에 나타나 화산의 입구를 덮어 석목이 풍기는 기운을 완벽하게 막았다.

종수는 다시 화산 입구 옆으로 내려와 몸을 숙여 석목을 내려다보았다.

석목은 붉은 반투명 광막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으며 금정염옥은 이미 몸 앞에 둥둥 떠 있었다.

석목은 입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외웠으며 왼손을 얇게 펴고는 살짝 들어 올려 금정염옥을 짚었다.

휙!

형태가 없는 기운 파동이 미세하게 주변으로 흘러갔고, 화산 입구에서 출렁이는 용암은 거세게 내벽에 부딪쳤다.

금정염옥에서 빛이 줄줄이 밝아지더니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쩍!

가벼운 소리와 함께 금정염옥은 찬란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부서져 버렸다.

반딧불처럼 흘러 다니는 붉은빛과 금빛이 모이고 모여 석목의 몸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석목은 곧장 눈을 감고는 손으로 법결을 짚으며 입으론 현묘한 법결을 외웠다.

주문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변에서 흩날리던 반딧불마저 어떤 힘에 이끌리듯이 석목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으아……”

석목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종수 누나, 석두 괜찮아?”

채아가 걱정이 되는지 물었다.

“괜찮아, 금정염옥 속에 내 천봉 성염이 들어있으니 열기가 엄청나서 오라버니는 아마 매우 고통스러울 거야. 하지만 참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종수가 눈에 빛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종수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금색 봉황 그림자가 석목의 몸을 감싸고돌더니 그를 덮어버렸다.

석목 아래에서 들끓던 용암은 마치 기이한 힘에 이끌리듯 조금씩 석목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용암은 점점 굵직한 화염 밧줄로 변하여 석목의 몸을 감고 또 감아 꼼꼼하게 감싸버렸다.

잠깐 사이에 석목은 마치 누에처럼 붉은 밧줄로 칭칭 감겼고, 한참 뒤에야 고치의 빛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검게 변하였다.

마치 용암이 갑자기 차가워지면서 검게 타버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검은색 고치 아래에는 팔뚝만 한 붉은빛이 용암 위에서 광막을 뚫으며 고치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채아가 어리둥절할 때, 검은 고치에서 다시 빛이 밝아지더니 무늬가 줄줄이 그어져 뜨거운 빛을 뿜어냈고, 커다란 고치가 마치 숨을 쉬듯 벌렁거리며 빛을 뿜어대자 채아가 다시 머리를 흔들며 한탄했다.

“석두가 또 얼마나 폐관을 할지 모르겠군……”

석목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종수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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