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04화 (704/916)

704화. 종수의 결정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종수는 간간히 채아를 데리고 몰래 염작산에 왔다.

석목은 삼 년 전과 똑같이 검은 고치 속에 있었다.

종수는 올 때마다 화산 입구 옆에 앉아 석목에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석목이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검은 고치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여전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 붉은빛만 뿜어냈다.

종수가 시도 때도 없이 염작산을 드나드는데다가 석목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니 더는 아무도 속일 수 없었다. 심지어 천봉 일족의 장로들이 근처로 정찰을 나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종수와 석목이 평범하지 않은 사이라는 소문이 천봉 일족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천봉족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확연히 갈렸다. 누군가는 절대 쉽지 않은 감정을 이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안쓰러워했으나 또 누군가는 종수가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고 질책을 했다.

하지만 조령롱이라는 근엄한 사람이 종족에 있으니 아무도 앞에서 그 일을 떠들어대지는 못했다.

종수는 떠도는 소문에 지쳐버려 아예 화산 입구 근처에 동부를 지은 후에 거기서 나날을 보냈다.

이날 종수는 임시로 만든 동부에서 수련을 하던 중에 바닥이 울리는 걸 느꼈다.

때문에 잠시 멈칫하던 종수는 동부에서 날아가 화산 입구로 향했다.

화산 입구에서 용암이 들끓더니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검은 고치를 완전히 묻어버렸다.

순간, 화산 입구에서 무엇인가 터져버린 듯이 ‘펑!’ 소리가 울려 퍼졌고, 화산의 입구 안에서부터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짙은 연기를 하늘로 퍼뜨리며 날려버렸다.

연기가 흩어지자 석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수는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가 다시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석목이 몸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채 강건한 육신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근육은 마치 칼로 조각을 한 것처럼 선이 뚜렷했으며 용암의 불빛이 비춰 심장이 고동칠만 한 야성미를 풍겼다.

단 한 번 봤을 뿐인데 종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오른 듯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석목은 수련에 푹 빠져있어 자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석목의 가슴과 복부에 불 모양 무늬가 뭉치더니 작은 붉은색 가마 그림자가 나타났다.

구전현공 일곱 번째 단계가 모양을 갖추려는 징조였다.

이때, 석목의 몸 아래에서 들끓던 용암이 기이한 빛을 흘리며 눈부신 화염을 태우다가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듯이 붉은 광막을 뚫고서 곧장 석목의 가슴에 나타난 작은 가마로 모였다.

후후훅!

이어 뜨겁고 밝은 불덩이가 작은 가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더니 눈부신 빛 열 몇 갈래가 석목의 가슴을 뚫고는 곧장 몸속으로 찔러 들어갔다.

석목의 주변에서 번지던 빛은 점점 옅어지더니 투명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마에서는 콩알 같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렸으며 미간을 찌푸린 얼굴에서는 고통이 전해졌다.

석목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느낀 종수가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지 망설이고 있을 때, 화산 입구에서 또다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

종수는 부끄러울 새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석목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석목의 몸은 반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변했으며 몸속의 뼈와 혈맥이 뚜렷이 드러났다.

“이건 지화령백(地火靈魄).”

종수는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며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지화령백은 대지에 흐르는 화맥이 빚어낸 고급 정백이었다. 그 안에는 포악하고도 강렬한 화염의 힘이 담겨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전부 석목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지화령백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자 석목의 혈관 속에서 붉은빛들이 끊임없이 들끓으며 점점 밝아졌는데 곧 혈관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붉은 광막이 정신없이 번쩍이며 용암도 제멋대로 들끓어 여기저기 커다란 기포를 만들었다.

석목의 이목구비는 기이한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석목이 눈을 번쩍 뜨자 동공이 붉게 물들어 곧 화염을 뿜어낼 것만 같았다.

“석 오라버니……”

종수가 깜짝 놀라 석목을 불렀다.

하지만 석목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석목은 그저 이를 악물고서 두 눈은 동그랗게 뜬 채 고통을 끝까지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종수는 마음이 매우 조급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종수 누나, 석두 왜 그래?”

이때, 외출했던 채아가 연결된 신혼으로 석목이 달라진 걸 알아차리고는 다급하게 돌아왔다.

“석 오라버니가 구전현공을 일곱 번째 단계까지 마쳤는데 마지막 시점에서 무엇 때문인지 지화령백을 흡수했어. 그래서 화염의 힘이 미친 듯이 오라버니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 몸이 흡수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었을 거야. 이러다가는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터져 버릴 거야.”

종수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그럼 어떻게 해? 지화령백을 막을 방법이나 몸속에 깃든 불의 정화를 끌어낼 방법은 없어?”

채아도 조급했다.

“내겐 그런 법보가 없어. 종족으로 돌아가서 도움을 청하기엔 이미 늦었고.”

종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석두가 죽어?”

채아가 몹시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꺼내는 방법, 이끄는 방법……”

종수가 눈물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에 종수가 갑자기 냉정을 되찾으며 무엇인가 결정을 내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 말고는 없어.”

“뭐? 종수 누나, 석두를 구할 수 있는 거야?”

채아는 눈에 빛을 밝히며 물었다.

순간, 종수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를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어. 채아, 그동안 우리를 위해 호법을 서줘. 여길 봉인할 거야, 절대 아무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알았어. 그럼 석두를 잘 부탁할게.”

채아는 종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그녀가 하는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종수는 손에서 빛을 반짝이며 계란처럼 생긴 둥그런 법보를 하나 꺼내고는 입으로 법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란 모양 법보에서 빛이 한 줄기 그어지며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양쪽으로 뻗어나가다가 순식간에 법보를 두 덩이로 나뉘었다.

두 덩이로 갈라진 법보가 종수의 손바닥으로 튀어나와 위아래로 떠다니며 커다란 집만큼이나 커졌다.

법보의 겉에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화봉 그림이 나타났다.

화봉이 나타나자 종수는 서슴없이 몸을 날려 아래에 있는 계란 모양 법보 반쪽 속으로 날아갔다.

종수가 다시 손을 흔들자, 두 법보가 화산 입구 속으로 내려가더니 석목의 옆으로 다가왔다.

수염이 얼기설기 얽혀서 난 석목의 얼굴을 본 종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종수는 “석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손을 뻗어 석목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손끝이 석목의 몸에 닿는 순간 종수는 화들짝 놀랐다.

“앗, 뜨거워.”

석목의 몸은 마치 불로 달군 용암 같았다.

종수가 다시 손에 붉은빛을 감고는 석목의 팔로 손을 뻗었다.

쫑수가 석목의 팔을 끌어당기자 석목의 몸통은 가볍게 떠오르더니 계란 모양 법보 반쪽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종수가 법결을 바꾸자, 위에 떠 있던 계란 모양 법보 반쪽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아래에 있던 반쪽과 합쳐졌다.

푹!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 개로 갈라졌던 계란 모양 법보가 다시 꽉 조여지며 석목과 종수를 안으로 가둬버렸다.

계란 모양 법보 껍데기가 다시 붙어버리자 얼마 남지 않은 용암 속에 깃든 지화령백이 한참동안 붉은 광막 근처에서 맴돌다가 다시 용암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 * *

계란 껍데기 속에서 석목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으며, 종수는 석목 옆에 서서 얼굴이 붉게 물든 채 바라보았다.

“석 오라버니, 오라버니 몸속에 자리한 불속성 본원의 힘에 지화령백이 끊이질 않고 흘러들어와서 차고 넘치고 있어요. 적당한 그릇으로 담아내야 오라버니의 육신을 지킬 수 있을 텐데 제겐 그럴만한 법보가 없어요. 하지만 제 혈맥이 그 그릇을 대신할 수 있어서……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어요.”

종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종수가 그렇게 말을 하며 옷깃을 더듬거렸다.

석목은 크게 뜬 눈이 핏빛으로 뒤덮여 종수가 하는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석 오라버니……”

종수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석목을 불렀다.

그리고 잡고 있던 옷깃을 힘껏 아래로 끌어내렸다.

스르륵!

종수가 입은 푸른색 옷자락이 전부 벗겨져 영롱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무것도 걸친 게 없는 종수는 순간 수줍음이 몰려와 무심결에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너무 맑아서 투명에 가까울 정도인 하얀 두 다리도 살짝 비틀거렸다.

종수는 뜨겁게 타오르는 온도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붉은 핏방울이 입술에 맺혔다.

“으아……”

이때, 석목은 목젖을 흔들며 또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눈가의 핏줄은 이미 터져버려 얇은 핏자국이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그 모습은 매우 흉악했다.

그와 동시에 몸에서 ‘퍽, 퍽’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곧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소리였다.

이렇게 내버려 뒀다가는 아마 온몸의 근맥이 터져버려 석목이 죽음은 면한다 해도 이룬 수련 경지 중에 팔, 구 할 정도는 사라져 버릴 게 뻔했다.

단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종수의 눈에 결연한 기색이 스쳤으며, 순식간에 종수는 몸을 석목의 옆으로 날렸다.

하지만 종수는 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처녀였기에 막상 상황에 부딪치자 어찔할 바를 몰라서 한참 동안 헤맸다.

게다가 석목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종수는 마음이 초조해져 콩알만 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뚝!

맑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딱 맞게 석목의 눈으로 떨어졌다.

석목은 깊은 화염지옥에 빠져버려 눈앞이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에 곧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종수의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 석목은 눈이 시원해져 들끓던 화염이 조금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으며 붉게 물들었던 두 눈도 조금은 빛이 옅어졌다.

석목은 희미한 얼룩 사이로 투명하고 깨끗한 몸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걸 느꼈다. 그건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석목은 무심결에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눈앞에 선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바라보려고 애를 썼다.

눈앞에 선 여인의 어여쁜 두 눈에는 핏기가 살짝 어렸으며 오뚝 솟은 코와 붉게 물든 입술이 보였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선 눈물이 흘렀으며 힘듦과 안쓰러움이 절반씩 섞인 표정은 귀여운데다가 또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수아……”

석목은 종수를 알아보고는 간신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석목의 목소리를 듣자 종수는 기뻐하며 내려와 하얀 두 팔로 석목을 품에 꼭 안았다.

석목은 풍성한 무엇인가에 파묻혔다. 마치 푹신한 솜에 얼굴을 묻은 것만 같았지만 또 그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다른지는 석목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눈앞에 선 그녀를 꽉 안고 싶었을 뿐이었으며 더욱 가까이 끌어당겨 자신의 몸으로 녹여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석목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낀 종수는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어떻게 석목에게 맞춰줘야 할지 몰라 석목이 안고 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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