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06화 (706/916)

706화. 또 미루다

“석목, 내게 적의를 품은 것 같은데 혹시 예전 일 때문에 그런가?”

조령롱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때 저는 지계 밖에 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놈이었지요. 어찌 제가 감히 신분이 고귀한 수아와 함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장로님께서 선배로서 저를 단숨에 죽여 버리려고 했던 건 너무 지당한 일이었죠. 그런데 다행히 목숨 하나는 끈질겨 기어코 살아남았지 뭡니까.”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종수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다급하게 석목의 옷자락을 끌었다.

조령롱은 조용히 석목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나 석목이 하는 말이 크게 불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세상의 법칙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나? 강자가 약자의 운명을 결정내릴 수 있지. 그런데 자네가 내 현강금염에 죽지 않았으니 지금 수아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지 않았네.”

조령롱이 말했다.

“그렇군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겠네요.”

석목이 말했다.

조령롱이 코웃음을 치더니 물었다.

“그래서 왜 날 찾아 온 건가?”

석목이 곧바로 온몸에 하얀빛을 드리우며 뒤에 거원의 허영을 드러냈다.

“이미 미천거원의 혈맥을 각성했습니다. 약속대로 수아를 아내로 맞겠어요.”

조령롱은 석목의 뒤에 나타난 거원의 허영을 바라보며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미천거원 일족 혈맥의 힘을 각성했다니!”

조령롱은 눈에 난감한 기색이 어린 채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혈맥의 힘을 각성한 건 맞지만 자네가 보여준 거원의 허영은 정통 미천거원과 차이가 있네. 그리고 기운도 매우 약해서 온전하지 않은 듯하군.”

“조 장로님,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종수도 안색이 어두워졌으며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조령롱이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며 미안한 기색을 비쳤다가 곧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우 미안하지만, 석목. 지금은 수아와 혼사를 맺을 수 없네.”

“어째서죠? 천봉 일족의 조윤 족장님이 친히 약속한 일입니다. 제가 혈맥의 힘을 각성하기만 하면 수아와의 혼사를 성사시켜준다고요. 앞뒤가 맞지 않잖습니까?”

석목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종수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아니야. 이 시국은 자네가 가장 잘 알겠지. 천정이 점점 더 많은 병력을 전방으로 보내고 있네. 이제 곧 대규모 공세를 취하겠지. 우리 종족은 천정과 맞서기도 벅찬데 너희를 위해 쌍수 축전이나 열 때가 아니야.”

이때,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의 허공에서 울려 퍼지며 조주동이 나타났다.

조주동을 바라보는 석목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간략하게 진행해도 괜찮아요. 겉치레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흥! 우리 종족의 성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더럽히자는 뜻인가? 쌍수 축전을 어떻게 대충해. 너 같은 인족 따위가 알 리가 없지!”

조주동이 피식 웃으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석목이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다. 그러자 몸에서 붉은색 화염이 넓게 퍼지더니 두려운 기운이 폭발하였다.

대전이 격하게 흔들리며 바닥에 커다란 균열이 벌어지더니 석목이 밟고 있는 흙이 가볍게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조주동을 바라보는 석목의 눈에는 싸늘한 빛이 스쳤으며 손에서는 금빛이 반짝였다.

수련 경지가 성계 후기에 도달했으며 또 미천거원의 혈맥을 각성하여 석목은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번천곤까지 꺼내든다면 조주동은 아마 석목이 날리는 공격을 받아내지 못할 터였다.

조주동은 문득 이성을 잃은 흉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으며 곧 자신이 흉수에게 삼켜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주동은 순간 소름이 돋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석 도우, 노여워 말게나.”

허공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석목과 조주동 사이에 조주명이 나타났다.

“오라버니.”

종수도 석목의 손을 잡았다.

석목이 눈빛을 반짝이며 풍기던 기운을 거두었다.

석목을 바라보는 조령롱은 아주 놀란 눈치였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석목이 터뜨린 기운은 이미 조령통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신경 중기 강자도 비빌 수 없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령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놀라운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깊은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석목을 완벽하게 꿰뚫어볼 수는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마치 운무와도 같아 진정한 실력을 알 수가 없었다.

“석목, 여긴 우리 천봉 일족의 땅이야. 네가 감히 여기서 행패를 부리다니! 우리 천봉족과 원수가 되자는 건가!”

석목이 내뿜은 기운에 놀라 정신을 못 차리던 조주동이 뒤늦게 화를 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차갑게 웃으며 조주동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시선을 조주명에게로 돌렸다.

“석목 도우, 우리 종족의 몇몇 장로들이 논의를 거쳐 성녀와 쌍수 축전을 치르는 건 뒤로 좀 미루기로 결정했네. 천정 놈들이 기세가 등등하여 전혀 인원을 뺄 수가 없네. 그리고 족장께서 성녀가 빨리 종족의 비경으로 들어가 폐관을 하며 수련 경지를 신경으로 끌어올려야만 천정과 맞설 수 있으리라고 말했네.”

조주명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안색을 바꾸었다.

석목도 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최근에 전해들은 소식에 의하면 천정은 이제 곧 미천거원 일족을 향해 움직일 것이라 했네. 이런 상황에서 석 도우도 쌍수 축전을 치를 여유는 없으리라 생각하네.”

조주명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 급할 필요 없지. 급한 불부터 끄고 때가 되면 내가 미천거원 일족의 백박 장로에게 둘을 위해서 쌍수 축전을 열자고 청하겠네.”

조령롱이 말했다.

세 사람이 연이은 설득을 해도 석목은 마음이 서늘하기만 했다.

많은 이유를 가져다 붙였지만 석목이 보기에 이 모든 게 핑계일 뿐이었다.

천봉 일족에게 품었던 마지막 호감마저 사라져버렸다.

천봉일족이 뱉었던 말을 거듭 번복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석목이 인족 나부랭이였기 때문이었다.

팔황고족은 그러니까 미천거원 일족까지 포함해 전부 고집불통인 종족들이라 그들만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 자부하며 다른 종족들을 절대 눈에도 두지 않는 자들이었다.

석목은 정이 떨어져 단 한 순간도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며 당장이라도 종수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봉 일족이 머무는 영역인지라 혼자라면 어떻게든 봉익성을 나갈 수야 있겠지만 종수를 데리고 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력! 내겐 더 막강한 실력이 필요해!’

석목의 맘속 깊은 곳에서는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다짐이 벅차올랐다.

“장로님들께서 품으신 뜻은 잘 알겠습니다. 우선 천정을 물리치고 난 후에 쌍수 축전을 거행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종수가 갑자기 말했다.

“수아!”

석목이 고개를 획 돌리며 종수를 바라보았다.

“석 오라버니. 명분은 충분해졌어요. 그리고 제 마음은 온전히 오라버니의 것이에요. 축전은 그저 의식일 뿐이잖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종수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종수는 깊은 눈으로 석목을 한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붉은빛으로 변하여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져가는 종수의 뒷모습을 넋이 나간 듯이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석목은 싸늘한 눈빛으로 조주명을 비롯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저도 더는 머물지 않겠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하얀빛으로 변하여 성시 밖으로 날아갔다.

조주명과 조령롱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석목, 외진 성역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결코 쉬운 녀석은 아니겠지! 어쩌면 상상도 못할 실력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지!”

조주동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조령롱은 천천히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 족장님께서 내린 지시대로 일을 처리하긴 했으나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소.”

조주명이 한숨을 쉬며 대전 밖으로 나갔다.

* * *

석목은 빠르게 내성에서 벗어나 외성으로 날아가 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석목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안색은 어두웠다.

“천봉 일족 놈들은 일처리가 어째서 이 모양이야. 뱉은 말도 지키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찍찍 내뱉다니. 소인배들.”

채아가 화난 얼굴로 재잘댔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석두,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

채아가 석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채아가 묻자 석목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내성을 바라보니 마치 자욱한 안개 속에 묻힌 산이나 숲 같았다.

석목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

“수아가 갑자기 떠나간 게 마음에 걸려. 저녁에 몰래 잠입해서 들어가 보자.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좋아!”

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묵을 곳부터 찾자.”

석목은 앞으로 한참 걸어가다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 * *

미양 성역의 천은성.

이진종의 양극봉 주전 속, 푸른색 옷을 입은 신도남이 깃털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대전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도남의 옆에선 팔괘 도복을 입은 채 하얀 수염을 드리운 빼빼마른 노인이 손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노인의 움직임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성주님, 축운검파를 공격하는 일은 꽤 큰일인데 서문 관주에게 혼자 짊어지라고 하신 건 너무 경솔한 결정을 내리신 게 아닌지요? 나이도 워낙 어리니 영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요.”

노인이 신도남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말했다.

“은 장로, 서문설이 병사를 이끌고 축운검파를 정벌하게 된 건 내 뜻이 아니네. 그러니 더는 묻지 말게. 서문설은 창태 신장의 의발을 들었으니 실력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네. 또한 고만족 대군이 뒤에서 밀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신도남이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목천절은 신경 강자라. 그래도 성주님께서 나서시지 않으시면……”

은 장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도남이 말을 끊어버렸다.

“위선일세.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네. 아마 이쯤 되었으면 목천절 그 노인네가 머무는 케케묵은 거처로 들이닥쳤겠지. 소식을 기다려 보세.”

신도남은 여전히 먼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 * *

검린성 밖, 어두운 천막 속에서 커다란 폭발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더니 불꽃이 온 별하늘로 번졌다.

하늘에서는 부공 전함 수백 척이 거대한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또 다른 규모가 작은 전함 부대가 반원형 진법으로 맞섰다.

규모가 작은 전함 부대는 고작 백여 척이었으며 그마저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보기에 매우 처참했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전함 한 대에서 키가 훤칠하고 마른 중년이 날아 나왔다. 중년은 이목구비가 매우 훌륭했으며 꼿꼿이 세운 등 뒤로 푸른 장검을 메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목천절이었다.

분노로 가득 찬 목천절이 상대 전함을 훑어보았다.

“신도남, 그 늙은 놈은 어디 갔나? 왜 여기 없는 거야! 또 뒤에 숨어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가?”

목천절이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목 선배님. 우리 성주님은 이제 이진종뿐만 아니라 온 미양 성역을 다스리셔서 아주 바쁘시죠.”

도포를 입은 건천관의 관주 육양리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그 개자식이 없단 말이지? 그럼 지금 네놈들의 우두머리는 누구냐?”

목천절이 물었다.

“목 선배님, 인사드리겠습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 뒤로 금색 갑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전함에서 날아 나와 허공에 서서는 목천절에게 인사를 올렸다.

수려한 눈썹 아래로 달 같은 눈을 떴으며 하얀 피부에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금색 갑옷에 새겨진 화려한 꽃무늬가 그녀의 몸을 꽉 조이고 있어서 아름다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누구냐?”

목천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자, 서문설입니다. 이진종 이화관의 관주지요.”

젊은 여인이 대답했다.

“흥, 신도남 그 개자식이 계집을 보냈구나. 그래, 역시 한결같이 야비한 놈이군. 나도 그 능구렁이 같은 자식한테 홀려 청란성지를 공격했으니. 축운검파가 처한 상황도 그 시절 청란성지와 별 다를 바가 없구나.”

목천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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