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화. 천하의 난
석목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금색 피풍의를 두른 외모가 뛰어난 소녀가 언제인지부터 모르게 석목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조선기였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는 앵무새 동두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석목을 바라보았지만 모처럼 재잘대지는 않았다.
“조 아씨.”
석목은 잔뜩 긴장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
“석 형, 수아를 만나러 가는 건가요?”
조선기가 턱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
“네, 물어볼 일이 좀 있어서.”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수아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석 형이 여기로 올 것이란 걸. 그래서 전해달래요. 만나지 않겠답니다.”
조선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석목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왜죠?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석목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다만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대요. 아마 석 형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천정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니 그 일에 집중해달라네요.”
조선기가 걸음을 멈추고는 별 같은 두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종수가 품은 깊은 뜻을 석목이 모를 리 없었다.
종수는 석목이 더는 천봉 일족과 그 어떠한 충돌도 빚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천봉 일족에는 신경 강자가 일고여덟 명이나 있었으니 석목 혼자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수아의 뜻이 그렇다면 잘 알겠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조선기를 향해 손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몸을 날려 검은 그림자로 변한 후에 밖으로 날아갔다.
조선기는 석목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번쩍이며 귀신처럼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 * *
검린성 밖, 서문설과 목천절은 여전히 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대치를 한 후에야 금색 폭풍이 휘몰아치는 속도가 드디어 느려졌으며 그 속에서 서문설의 잔영이 서서히 드러났다.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던 하얀 검광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목천절이 검결을 바꾸자 쏟아져 내리려던 하얀색 검광이 다시 방향을 틀어 금색 폭풍을 에돌아 뒤쪽으로 밀려갔다.
순간, 하얀색 검광은 다시 사라지더니 푸른 광막을 펼쳤으며 광막에는 검영이 가득 드리웠다.
검역이 다시 뭉치자 서문설은 안에 갇혔다.
금색 폭풍도 점점 기세가 줄어들다가 이내 멈춰버렸다.
그림자 열여섯 갈래는 전부 안색이 창백해졌는데 기력을 꽤 크게 소모한 모양이었다.
그림자에서 빛이 끊임없이 번쩍이며 하나하나 겹쳐지더니 드디어 완벽하게 하나로 변하였다.
“성계 정상 실력으로 내 축운검해 속에서 이렇게 오래 버티다니. 넌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되겠군.”
목철절은 매우 진지하게 말했는데 비아냥거림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과찬이시네요. 하지만 제자가 품은 목적은 선배님을 꺾는 것이었는데 보아하니 아직 많이 부족하군요.”
서문설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 검역에 갇힌 주제에 여전히 당당한 투로 말하는구나. 네 용기가 가상한 건지 자만심이 하늘까지 치솟은 건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군.”
목천절이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는 검끝을 아래로 찍어 앞쪽 허공을 찔렀다.
“만인산!(萬仞山)”
목천절이 낮게 소리를 치며 몸에 푸른빛을 두르자 강렬한 영력 파동이 검 끝에서 흘러나와 사방팔방으로 흘러갔다.
서문설은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았는데 발밑 허공에서 영력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광이 땅속에서 튀어나오더니 온갖 검끝이 서문설에게 향했다.
서문설이 눈썹을 치켜뜨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순간, 금빛 한 갈래가 나타나더니 둥그런 방패로 변하여 가시 같은 검날들을 막아냈다.
챙!
서문설이 검날에 튕겨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허공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검역은 검날들로 가득 차 발을 디딜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검날이 끊임없이 위로 밀려나와 서문설의 몸을 겨누고 있어서 곧 검날에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순간, 서문설이 둥그런 방패를 앞으로 던져버리고는 발로 방패를 밟고서 촘촘하게 뻗어 나온 검날 위에서 빠르게 미끄러져 나가 목천절에게로 향했다.
작게 뜬 서문설의 두 눈에선 빛이 반짝였으며 몸에 두른 금색 갑옷에 새겨진 정교한 꽃무늬가 전부 밝아지더니 뿜어내는 기세가 몇 배나 강해졌다.
서문설이 들고 있는 괴상한 병기에서도 금빛이 반짝이더니 기이한 꽃무늬가 나타났으며 꽃무늬 밑으로는 핏자국이 서서히 나타났다.
서문설이 낮게 소리를 지르며 병기를 치켜들고는 맹렬하게 목천절의 가슴으로 향했다.
“흥, 좋아!”
목천절이 몸을 날려 장검과 나란히 선 채 서문설을 찔렀다.
푸른빛과 금빛이 번쩍이며 서로 부딪쳤다.
쾅!
격렬하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갈래 빛이 동시에 흔들리더니 커다란 기운 파동을 만들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촘촘하게 펴진 검날들은 전부 끊어져버려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푸른색 검역도 더는 버텨내지 못하겠는 듯이 터져버렸다.
푸른 검역이 무너지던 순간, 두 사람이 터뜨린 기세가 주변으로 밀려갔다.
양쪽 전함 부대는 격하게 흔들렸으며 서로 심하게 부딪쳤다.
축운검파의 전함들은 이미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강한 힘을 받아 다시금 밀렸으니 몰골이 더욱 처참해졌다. 그 전함들 중에 두 척은 결국 부서져버렸다.
이진종의 전함들은 서로 거리가 가까웠지만 뒤에 서 있던 고만족이 움직이는 전함들이 사이를 막아 큰 손해를 입지는 않았다.
칙, 칙!
전투를 치르며 서문설이 쥔 병기와 목천절의 검이 끊임없이 부딪쳐 불빛이 튕겨져 나왔다. 주변의 허공은 줄줄이 찢어졌으며 결국 칠흑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서문설은 이를 꽉 깨물었으며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매우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목천절은 별달리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수월하게 전투에 임하는 것 같았다.
“신경과 성계 사이엔 뛰어넘을 수 없는 골짜기가 있지. 아마 이번 생에는 절대 뛰어넘지 못할 것 같구나.”
목천절이 말을 마치고는 눈에 빛을 반짝이며 몸에 깃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앞을 밀자, 푸른 장검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나가 서문설은 뒤로 밀려났다.
이때, 서문설의 눈에 결연한 기색이 스치며 입으로 난해한 주문을 읊어댔다. 서문설은 두 눈이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
“으아……”
서문설이 소리를 지르자 몸 주변으로 기이한 빛이 한 층 나타나더니 동시에 기운이 터져 나와 앞으로 공격을 날렸다.
그 힘은 매우 막강하여 목천절이 들고 있는 푸른 장검마저 힘에 밀려 구부러졌다.
탱!
청량한 소리와 함께 목천절이 쓰던 장검이 부러져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진종의 제자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문설은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심각해졌다.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붙이는 이유가 뭔가!”
목천절은 단정하게 빗어 올렸던 머리가 전부 흐트러져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 목천절의 가슴에서 하얀빛이 밝아지더니 몸이 점점 희미해지며 빛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목천절이 사라져버리자 남아있는 건 하얗고 커다란 검광뿐이었는데 그 기세나 날카로움은 전보다 백 배나 더 강력했다.
서문설은 이 막강한 공격을 감당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광이 반짝이며 서문설의 몸에 얇은 칼자국을 수도 없이 그어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서문설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치자 순식간에 붉게 물든 두 눈에서 금빛이 번졌다.
금빛이 밝아지자, 고통은 전부 사라졌으며 극도로 차가운 기운만 남았다. 심지어 서문설이 풍기던 기운마저 바뀌어버렸다.
서문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서문설의 몸에서 금빛이 맴돌더니 키가 훤칠한 금색 갑옷 허영이 나타나 몸을 감싸버렸다.
갑옷 허영이 서문설의 금색 병기를 꽉 쥐었다.
순간, 금색 병기에서 찬란한 금빛이 번지더니 단번에 목천절이 변신한 하얀 검광을 삼켜버렸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며 하얀 검광이 터져버리자 검광은 다시 빛나는 수많은 점들로 변하여 흩어졌다.
서문설은 자세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몸에 감돌던 빛들도 사라졌다. 이때 이진종의 장로가 서문설을 재빨리 전함으로 데려갔다.
“성주님……”
축운검파의 제자들은 처참하게 울부짖으며 정신없이 이진종을 향해 덮쳤다.
육양리는 코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죽여! 단 한놈도 남겨서는 안 돼!”
이진종의 전함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날아 나와 단번에 축운검파의 남은 제자들을 몰살했다.
* * *
봉익성.
길거리에서 그림자가 반짝이더니 석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두, 종수 누나가 왜 갑자기 너를 만나지 않는 거야?”
채아가 석목을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날 위해서야.”
석목이 말했다.
“그럼…… 종수 누나는 어떻게 해? 정말 찾아가지 않을 거야?”
채아가 또 물었다.
“그래도 천하 성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천봉 일족이잖아. 수아가 거기 있으니 아마 당분간은 아무 일 없을 거야. 미천거원 일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뭔가 불안해.”
석목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 * *
이 시각, 사령계면.
황량한 붉은 산맥 위엔 온통 촘촘하게 널브러진 사령 생물들 뿐이었다. 그 숫자는 아주 방대했으며 이동하는 속도도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사령 생물들은 아마 도망을 치는 중인 것 같았다.
대오 가장 앞쪽에는 연나가 은색 갑옷을 두른 채 손에 칠보묘수를 들고는 크기가 백 장이나 되는 하얀색 코뿔소의 머리 위에 서서는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사령 대군을 이끌며 빠르게 움직였다.
사령 대군 주변에는 그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무리가 둘 있었는데, 두 무리는 사령 대군의 양쪽에서 나란히 달리며 앞길을 서서히 막았다.
연나가 두르고 있는 은색 갑옷은 이미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으며 연나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연나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이미 두 무리가 점차 하나로 뭉쳐지며 사령 대군이 진출할 길을 가로막았다.
“공격!”
연나가 칠보묘수를 흔들며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타고 있던 코뿔소가 순식간에 힘을 터뜨리며 앞으로 찔러갔다.
그 뒤로 검고 흰 해골 두 구가 날아올라 뒤로 수많은 대군을 이끌며 격렬한 전투를 펼쳤다.
* * *
이튿날 아침 일찍, 석목은 객잔을 떠나 봉익성 밖에 자리한 전송대전으로 갔다.
“공자님!”
전송진법에 도착하기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사내는 안화였다.
“안화?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석목이 놀라며 물었다.
석목은 삼 년 동안 폐관 수련을 하며 안화를 비롯한 사람들과 연락이 끊겨서 그들이 이미 주작성을 떠난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자님을 따르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당연히 이곳에서 기다려야지요. 공자님이 천봉 일족에서 폐관수련을 하시는 동안 저는 봉익성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죠.”
안화가 기뻐하며 말했다.
석목은 감동이 밀려왔는데 안화가 이 정도로 충심을 보일지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방진도 여기 있나?”
석목이 물었다.
“방 형은…… 얼마 전에 여길 떠났어요.”
안화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석목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진은 자정마우 일족의 적계 후손이라 고작 시종 노릇이나 하며 석목의 옆에 있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공자님, 이제 봉익성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안화가 물었다.
“미천거원 일족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석목이 말했다.
“공자님, 지금 천하 성역은 예전과 달리 천정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성역 곳곳에서 전쟁의 불길이 끊이질 않죠. 각지로 가는 전송진법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니 성역을 가로지르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안화가 다급하게 말했다.
석목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천정이 이미 전면적으로 천하 성역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혼란스러울 줄은 몰랐다.
“공자님, 지금 서 공자님도 봉익성에 계십니다. 그리고 서 공자님께서 지니신 정보가 훨씬 많을 테니 우선 함께 논의해서 안전한 길을 찾는 편이 좋을듯해요.”
석목이 망설이는 모습을 본 안화가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