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화. 명성이 자자하다
“서 형이 아직 봉익성에 있나?”
석목이 확인을 하듯이 다시금 물었다.
“그렇죠. 그동안 계속 봉익성에서 머물며 비천서 일족이 일구는 장사를 이어나가고 계셨죠.”
안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다면 당연히 가봐야지. 서 형은 매우 신통하게 소식을 꿰고 있지 않나.”
석목이 침묵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 공자님,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안화가 석목을 안내했다.
* * *
잠시 후에 둘은 화려하고도 금빛 찬란한 오층 건물 앞에 내려왔다.
석목은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이 오 층짜리 건물은 얼핏 보면 평범한 상점 같았지만 먼 곳에서 내려다보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를 것만 같은 어떤 동물처럼 보였다.
일 층의 대문 앞에 사람들이 붐비는 모습을 보니 장사가 꽤 잘되는 모양이었다.
“공자님, 여긴 비천서 일족이 봉익성에서 운영하는 대형 상점이에요. 온갖 법보와 단약을 팔고 있죠. 때마침 천하 성역이 전란에 처해있어 이런 것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죠.”
안화가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상점으로 들어갔는데 일 층과 이 층엔 다양한 법보와 단약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걸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님들은 대부분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으며, 금색 옷을 입은 소년과 소녀들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손님들에게 물건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안화는 여기가 꽤 익숙한 듯이 보였다. 그는 일 층에 있는 집사와 인사를 나눈 후에 곧장 석목을 데리고 삼 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은 귀빈을 모시는 구역이라 일, 이 층보다 사람들이 훨씬 적었다. 하지만 여기를 오가는 손님들은 전부 수련 경지가 높거나 권위가 있는 자들이었다.
“음, 미천거원 일족의 넷째 장로인 석 장로님이 아니오? 여기서 만나다니. 영광이오.”
머리가 보라색에 얼굴이 길쭉하게 생긴 중년이 석목과 안화의 앞을 가로막으며 뜨겁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석목이 멈칫하며 물었다.
“뇌동(雷同)입니다. 뇌마 일족(雷馬壹族)의 장로지요. 예전에 천봉 일족의 성녀 축전 때 석 도우님께서 지닌 막강한 실력을 직접 봤소. 나는 보잘것없는 소인배라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오.”
중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제가 감히요. 뇌 형께서 갖추신 실력 또한 놀랍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성계 경지에 방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걸 보니 뇌마 일족에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석 형, 과찬이오.”
내뱉는 말과 달리 중년은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석 형, 이건 우리 뇌마 일족에서 내려오는 신물인 현마령이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언제든 우리 뇌마 일족에 들르시오.”
중년은 석목에게 보라색 영패를 건네며 말했다. 건네준 영패에는 말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환대였지만, 석목은 영패를 받는 걸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시답잖은 얘기를 두어 마디 더 주고받았다. 그리고 석목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눈치 챈 뇌동이 먼저 자리를 떴다.
석목은 현마령을 거두어들였다.
기분이 좀 묘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자.”
석목이 안화에게 말했다.
안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목을 데리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 단독 객실에 도착했다.
이 짧은 거리를 석목은 일각이나 걸려서야 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석목을 알아보고는 열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석목은 이들이 누군지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도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환대를 받는 사람이 되었는지 석목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공자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서 공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안화가 말했다.
“안화, 이런 회객청을 자네가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되나?”
석목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후후, 실은 삼 년 전부터 성시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 서 공자님을 도와 여기서 관사를 맡고 있었습죠.”
안화가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안화가 나가자 석목은 객실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채아가 두 날개를 펄럭이며 탁자 위로 날아올라 정신없이 다과를 주워 먹기 시작했다.
“그 쥐가 운영하는 상점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니.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 줄 알았더라면 매달 왔어야, 아니…… 매일 왔어야 하는데!”
석목은 채아가 하는 말이 어이없어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잠시 후에 객실의 문이 열리며 서유금과 안화가 걸어들어왔다.
서유금은 활짝 웃는 얼굴로 석목을 맞이했다.
“석 형, 드디어 출관하셨군요! 저는 석 형이 사랑의 보금자리에 빠져버려서 못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서 형, 그런 게 아니에요.”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눈치가 빠른 서유금은 석목의 표정을 살피고는 더 깊게 묻지 않고서 곧장 화제를 돌려 석목과 다른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석목을 더 화려한 귀빈실로 모시고는 영차(靈茶)를 올리라 지시를 내렸다.
“아, 안화에게 들었습니다. 석 형, 미천거원 일족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서유금이 말했다.
“네, 그러려던 참이었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천거원족은 영남성 근처에 은거하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천하 성역에서도 외진 곳인데다가 주작성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마 천하 성역을 반이나 가로질러야 할 텐데.”
서유금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요?”
석목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절로 쓴웃음이 났다.
서유금이 신통하게 정보를 구한다지만 천하 성역에는 서유금처럼 방대한 정보망을 갖춘 자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외람되지만 영남성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행성들은 대부분 이미 천정이 점령하고 있어요. 쉽지 않겠죠.”
서유금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지금 천하 성역이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석목이 다시 화두를 돌렸다.
“삼 년 전부터 천봉 일족을 비롯한 삼대 종족은 몇몇 중소 종족들과 본격적으로 연합을 맺어 천정과 싸우고 있어요. 하지만 다양한 연유로 연합은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곳곳이 천정의 통제를 받고 있죠. 이미 절반이 넘는 행성들이 천정의 손아귀에 들어갔어요.”
서유금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절반이 넘는 행성들이 함락되었다니요? 삼대 종족이 이미 연합을 맺은 게 아닙니까?”
석목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들을 탓할 수도 없죠. 종족의 전력중 단 삼 할 정도만 연합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천정은 그동안 많은 병력을 몰고서 천하 성역으로 왔지요. 그러니 연맹이 약세에 처한 건 당연한 결과예요.”
서유금이 말했다.
“고작 삼 할이라니요? 왜 삼 할만 투입한 겁니까?”
석목이 놀라며 물었다.
“삼 년 전에 천정이 봉익성을 습격하며 빚어낸 결과죠. 그때 전투를 치르며 천봉 일족을 비롯한 삼대 종족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원래 연합하기로 결정을 했던 종족들이 전부 물러났죠.”
서유금이 말했다.
“그렇군요.”
석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 일족을 포함한 삼대 종족의 위신은 크게 줄었지만 석 형 덕분에 미천거원 일족의 명성은 치솟았어요. 예전에 미천거원 일족에게 의지했던 종족들은 미천거원 일족이 다시 일어서서 종족들을 이끌고 천정을 공격하여 눈부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죠.”
서유금이 뜨거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으며 석목은 그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
석목은 그제야 조금 전에 삼 층에서 겪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천 년 전에 백원왕이 백족을 이끌고 천정과 싸웠던 광경이 여전히 눈앞에 선합니다. 많은 종족들이 진정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보며 존경하는 요족의 왕은 오로지 백원왕뿐이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요. 석 형이 이번에 미천거원 일족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장로님들에게 알려 다시 미천거원 일족이 일어서게 된다면, 우리 비천서 일족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서유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석목이 천천히 표정을 바꾸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 형, 이 말은 반드시 전달하여 꼭 일이 성사되도록 하겠습니다.”
천봉 일족과 연합을 하는 건 다양한 변수가 생겨 아마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석목은 종수가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몸속에 흐르는 미천거원의 혈맥도 각성을 했으니 종족으로 돌아가 족장의 신물을 꺼내고 정정당당하게 미천거원 일족을 거느리기만 하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서 종족의 안위와 흥망성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석목은 미양 성역이 처한 상황만 되짚어 봐도, 천하 성역에서 마저 백성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석 형이 한 말만 믿고서 기다리겠어요! 천하 성역이 처한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기울고 있으니, 아무도 앞장서지 않는다면 천정의 손아귀에서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겠죠.”
서유금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유금을 바라보는 석목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늘 돈 냄새만 맡으며 지위나 재산만 따지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런 큰 일 앞에서는 꽤 대범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 저와 나눈 얘기는 절대 삼대 종족이 알아서는 안돼요. 삼대 종족은 미천거원 일족이 돌아오는 걸 매우 배척해서 전말을 알게 되면 일만 번거로워질 거예요.”
서유금이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석목이 눈을 반짝였다.
천봉 일족이 온갖 수단을 부려 석목과 종수의 혼사를 말리는 걸 보니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을 법도 했다.
“그럼 석 형, 잠시만 기다리세요. 천하 성역 곳곳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돌아가는 길을 알아둘게요.”
서유금이 그리 말을 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유금이 나간 후로 석목은 더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안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화, 염호 일족이 처한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나? 천하 성역이 아수라장이 되었으니 너희 종족도 그 여파에 온전하지 않겠지?”
“공자님, 저는 종족에서 나온 뒤로 계속 돌아가지 않고서 봉익성에만 있었어요. 그러니 종족과 관련된 일은 잘 모르죠.”
안화가 고래를 흔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자님, 혹시 염호 일족과 연락을 취하여 함께 천정에 대항하려는 건가요? 외람된 말이지만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종족에 있는 늙은이들은 하나같이 고집불통이라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려는 마음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죠. 절대 말이 통하지 않는 양반들이에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도 종족에서 뛰쳐나오지는 않았겠죠.”
안화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안화가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천하 성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석목도 천하 성역의 역사를 알아봤다. 그리고 팔황고족 중에 하나인 염호 일족에 대해서도 꽤 많이 찾아봤다.
염호 일족은 미천거원만큼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용맹하고 전투를 즐기는 종족이었으며, 잔인한 수단으로 살육을 저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미천거원 일족만 움츠러들어 편안을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염호 일족도 은거하며 본성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곧바로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을 접어두었다. 어찌됐든 석목이 속한 미천거원 일족도 똑같이 답답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어떻게 미천거원 일족의 몇몇 장로들을 설득할지 고민했다.
석목이 침묵에 잠기자 안화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