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화. 낙해명정
석목 일행은 속도를 내며 반나절 만에 영뢰골에 도착했다.
하늘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영뢰골은 자연스레 만들어진 커다란 산골짜기였다. 구름을 찌르는 커다란 산 두 곳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산골짜기의 하늘은 먹구름이 낮게 깔려있어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먹구름 속에는 간간이 커다란 소용돌이가 나타났는데 소용돌이에선 번개가 뱀처럼 헤엄쳐 다녔다. 그 뱀들은 곧장 쏟아질 것만 같은 기세를 풍겼다.
산골짜기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숲을 이루었으며, 전부 자정마우 일족이 머무는 거처였다.
석목은 산골짜기 바깥쪽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봉익성처럼 커다란 진법 금제를 드리우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숨어있는 경비병들이 가득했다.
경비병들은 비록 꽁꽁 숨어 있었지만 채아의 투시 능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제 막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니 움직이기가 더 수월해질 거예요. 공자님, 곧바로 잠입해서 들어가죠.”
안화가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화, 자네 실력은 뛰어나지만 쉽게 잠입하지는 못할 거야. 나와 채아가 함께 들어가서 방진을 구해 올 테니 자네는 입구에서 망을 봐주게. 같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석목이 말했다.
“하지만…… 알겠어요.”
안화가 표정을 바꾸며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걱정 마. 바로 데리고 나올게. 천봉 일족에도 잠입했었는데 자정마우 일족은 더 쉽겠지.”
석목이 담담하게 웃으며 노란빛을 반짝이고는 땅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안화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석목은 마치 수많은 비술을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으며 그 끝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안화도 눈에 기이한 빛이 스치더니 등 뒤에 자리한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석목은 땅속으로 수 십 장 정도를 파고들어가서는 천천히 산골짜기 방향으로 향했다.
* * *
석목이 갖춘 뛰어난 실력에 토둔지술(土遁之術)까지 합해지니 크게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가볍게 골짜기를 둘러싼 감시와 금제를 뚫고서 영뢰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산골짜기에 선 건물 뒤편에서 그림자가 반짝이더니 석목과 채아가 땅속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석목은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명수결의 은신술을 시전하여 희미한 그림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암벽에 딱 붙은 채 골짜기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일각 후에 석목이 멈춰 섰다.
산골짜기가 너무 컸는데 대놓고 신식을 날려 찾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일히 찾다가는 어느 세월에 방진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석목은 천봉 일족에서 부렸던 수단을 한 번 더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반짝였다.
석목은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날려 회색 건물로 날아가더니 단번에 건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건물 속엔 머리가 보라색인 한 청년이 몸에 번개를 감고는 가부좌를 틀고서 앉아있었다. 몸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을 보니 매우 뛰어난 공법을 수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수련을 하는 청년의 경지는 천위 중기였다.
이때, 청년의 앞에 난데없이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머리가 보라색인 청년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검은 안개가 그림자의 손에서 날아 나와 청년의 머리를 감싸버렸다.
청년은 머릿속에서 희미한 빛이 번지더니 흐리멍덩해졌으며 두 눈은 넋이 나간 듯이 텅 비어있었다.
이때, 허공에서 빛을 반짝이며 석목이 나타났다.
“방진이 아직 살아있는지 말해줘. 어디에 갇혀있어?”
석목이 물었다.
“살아 있다…… 흑옥봉(黑獄峰)……”
청년이 희미한 눈빛으로 우물우물 대답했다.
방진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석목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흑옥봉의 위치를 물어본 후에 다시 청년의 기억을 지운 다음, 석목은 다시 유유히 사라졌다.
* * *
영뢰골 안에 자리한 흑옥봉은 산봉우리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으며 산꼭대기는 일 년 내내 검은 안개로 자욱했다. 그리고 음산한 바람이 산꼭대기를 감싸고 있어 그리 세게 불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기운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산봉우리는 자정마우 일족이 죄수를 가두는 흑옥봉이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한 검은 동굴이 바로 감옥이 있는 곳으로 음산한 바람은 전부 그 동굴에서 불어오는 것이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여전히 동굴 입구를 보라색 갑옷을 입은 두 사나이가 지키고 있었다.
둘은 엄연히 성계 경지였으며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주위를 주시했다.
석목이 검은 그림자로 변하여 살며시 다가가 산봉우리에서 수십 장 떨어져 있는 곳에서 멈췄다.
“채아, 방진이 안에 있는지 봐줘.”
석목이 전음으로 채아에게 물었다.
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칠색 빛을 뿜으면서 동굴을 바라보았다.
석목이 시선을 공유하자, 동굴 안이 훤하게 보였다.
방진은 동굴 속에 솟은 보라색 돌기둥에 묶여 있었으며, 온몸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해 매우 처량해보였다.
방진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석목은 다시 눈길을 두 성계 경비병들에게 돌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계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법력 파동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면 큰일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석목은 눈을 번쩍 떴다.
입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자 석목의 몸에서 또 뼈가 다시 ‘쩍, 쩍!’ 소리를 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가 보라색인 젊은 청년으로 변했는데 외모와 풍기는 기운이 방책과 똑같았다.
“석두, 너……”
채아가 말했다.
“영수 주머니로 돌아가.”
석목이 웃는 얼굴로 채아를 영수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몸을 날려 당당히 산꼭대기로 날아가 입구에서 내려왔다.
보라색 갑옷을 입은 사나이들은 석목을 보자 흠칫 놀랐다.
수임 축전이 열리기 직전이라 다른 일로 정신이 없을 터인데 방책이 여기엔 웬일로 왔는가?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나이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급하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소주님, 인사드립니다.”
“방진은 어떤가?”
석목이 물었다.
“소주님, 방괴(方魁) 장로님이 봉인을 덧대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옆에 있던 짧은 머리 사내가 말했다.
“그래. 지키느라 고생이 많군. 인사치레는 됐네.”
석목이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서는 둘을 일으켜 세웠다.
칼자국이 난 사나이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방책이라는 녀석은 이렇게 자상한 놈이 아니었는데?
이때, 칼자국이 난 사나이의 눈앞에서 하얀빛이 번지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목덜미를 내리쳤다.
사나이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몸을 뒤로 날려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짧은 머리 사내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단번에 석목이 목숨을 거둬버린 것이었다.
칼자국이 난 사내가 한 장 정도 물러나 소리를 지르려 할 때,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붉은 단검이 가슴을 찔러 순식간에 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검은색 손바닥이 사내의 머리를 쥐어 잡고는 힘껏 비틀어 머리와 몸을 나누었다.
칼자국이 난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검은 기운을 풍기는 그림자였으며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그림자는 석목의 분신이었다.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으며 시체 두 구를 거두어들이고는 빠르게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기에 빠르게 깊은 곳까지 도착했다.
이때, 석목의 앞에 나타난 건 길이가 무려 백 여장이나 되는 얼음 동굴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얼음은 온통 검은색이었으며 공기는 뼈를 찌르는 듯한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얼음 동굴 가운데는 보라색 돌기둥이 서 있었으며 그 위에 현묘한 부문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어 옅은 보라색을 뿜어냈다.
돌기둥에는 보랏빛 눈을 드러내며 상의를 벗은 한 청년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쇠사슬에서는 옅은 파란빛이 흘러 나와 마치 어떤 금제의 힘이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청년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약간 숨도 차 보였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청년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다가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눈에서 분노를 활활 태웠다.
“방책! 네놈이 여긴 왜 왔느냐!”
청년의 목소리가 얼음 동굴에서 울려 퍼졌다.
“난 방책이 아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파란빛을 뿜어내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공자님!”
방진이 깜짝 놀라 실성한 듯이 석목을 불렀다.
“우선 여기서 나가자.”
석목이 손을 흔들어 금색 검으로 파란 쇠사슬을 내리쳤다.
탱!
쇠사슬은 전혀 끊어지지 않았다.
“공자님, 이 쇠사슬은 낙해명정으로 만든 거예요. 단단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라 평범한 무기로는 절대 자를 수 없죠.”
방진이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뭐! 낙해명정!”
석목은 오히려 좋아했다.
공수자가 구룡쇄금갑의 등급을 올릴 때 필요한 최상급 영재들을 거의 다 모았는데 낙해명정 하나만은 아무리 공을 들여서 찾아봐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구해냈다니.
이때, 석목의 분신이 나타나 손에서 단검에 빛을 크게 드리웠다. 그러자 붉은 부문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쇠사슬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끊어지자, 방진의 몸이 기둥으로 떨어졌다.
석목이 손을 흔들어 하얀빛으로 방진의 몸을 받쳐 들고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파란 쇠사슬을 챙겼다.
이때, 보라색 기둥에서 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큰일이에요. 장로님이 기둥에 금제를 설치해서 제가 도망가면 경보가 울릴 거예요!”
방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자!”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파란 바리때 법보를 꺼내 파란빛을 날려서 방진의 몸을 감쌌다.
파란빛이 반짝이며 방진은 바리때 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바리때를 들고서 노란빛을 반짝이며 다시 땅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석목이 이제 막 사라지자, 화가 잔뜩 난 신식이 강력하게 다가와 순식간에 흑옥봉을 감싸고는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석목은 노란색을 뒤집어쓴 채 주변의 흙과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신식이 석목의 몸을 여러 번 스쳐 지났지만 발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나 질기던지 포기하지 않고서 신식으로 주변을 몇 번 더 훑었으며,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제야 내키지 않은 듯이 거두어들였다.
석목은 한참 더 기다리다가 더는 신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골짜기 밖으로 몰래 나갔다.
* * *
흑옥봉의 얼음 동굴 속, 몇 갈래 빛이 날아왔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방책과 보라색 짧은 수염이 난 중년 남자였다.
짧은 수염이 난 남자와 방책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는데 둘은 엄연히 신경 강자였다.
두 사람 뒤에는 보라색 도복을 입은 성계 수련자 둘이 서 있었다.
넷은 텅 비어있는 돌기둥을 바라보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방진! 네가 감히 도망을 가! 죽일 놈! 아마 멀리 못 갔을 거다. 빨리 모든 자호위(紫虎衛)들을 보내서 어떻게 해서든 잡아오라고 해!”
방책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방책의 목소리가 얼음 동굴에서 울려 퍼지며 한참동안 흔들렸다. 그러자 수많은 얼음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네!”
두 성계 수련자가 대답을 하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소주님, 밖에 있던 성계 호위병 둘이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잠입해서 죽인 것 같군요. 실력이 범상치 않은 놈일 겁니다. 방진이 기둥에서 벗어난 이후로 제가 곧바로 신식을 드리웠으나,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죠. 이렇게 신통한 걸 보니 아마 신경 강자일 것 같습니다. 자호위들은 이 놈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설사 찾는다 해도 방진을 데려오지도 못하겠죠.”
짧은 수염이 난 사내가 말했다.
“신경!”
방책은 안색이 변했다.
“소주님, 방책 그놈은 크게 신경 쓰지 마시죠. 소주님은 지금 족장의 자리를 이어받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도망간 대로 내버려 두시죠. 어차피 한낱 혼자서 수행을 하는 놈에 불과합니다.”
짧은 수염이 난 남자가 말했다.
방책이 그 말을 듣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네요. 하지만 이 일을 꼭 제대로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방진을 데려간 놈이 신경 강자라면 나중에 장로님이 직접 처리하시죠.”
“물론입니다. 소주님, 걱정 마시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책은 눈에서 빛을 반짝이며 텅텅 비어있는 얼음 동굴을 한번 둘러보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