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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13화 (713/916)

713화. 축전에서 일어난 변고 (1)

시간이 일주향 지난 후, 영뢰골 밖에 자리한 무성한 숲속에서 노란빛을 반짝이며 석목이 나타났다.

“공자님!”

안화가 숲속에서 날아 나오며 석목을 불렀다.

“방진은 이미 구했네. 우선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해.”

석목이 다시 파란 바리때를 꺼내 안화도 안으로 집어넣고는 검은 그림자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영뢰골에서 보랏빛들이 날아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는데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것만 같았다.

석목은 족히 수만 리를 날아서 한 산봉우리 근처에 내려왔다.

그리고 파란 바리때를 꺼내 법결을 날리자 빛이 사라지며 방진과 안화가 안에서 날아 나왔다.

방진은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공자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진이 큰절을 올렸다.

“예의 차릴 필요 없네. 우린 다 벗이잖나. 벗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마땅히 구해야지.”

석목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방진은 감격스러운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봉익성을 떠난 건가? 그리고 왜 방책에게 잡힌 거야?”

석목이 물었다.

“봉익성에서 우연히 급한 소식을 전해 들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죠.”

방진이 말했다.

“무슨 일?”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방진은 눈에서 사나운 기색이 스치더니 어금니를 꽉 물었다.

“방책 이 자식이 진즉에 천정과 결탁해 종족을 배신하고서 천정에 빌붙었습니다!”

“뭐!”

석목과 안화는 둘 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깜짝 놀랐다.

석목은 눈에 경멸을 하는 기색이 스쳤다.

삼 년 전에 봉익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은 천정의 손아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방책 이놈이 천정에 빌붙는 걸 보니, 한낱 버러지 같은 놈에 불과해 보였다.

“그럼 어떻게 방책에게 잡힌 건가? 떠도는 소문에는 자네가 방책을 암살하려다가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닌 건가?”

석목이 물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후로 저는 곧바로 자전성으로 돌아와 방책이 하는 짓을 다른 장로님들에게 알리려 했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영뢰골에서 방책과 천정이 은밀하게 만나는 걸 봐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붙잡히게 되었죠. 그때 전투를 치르는 소리가 워낙 커서 종족의 장로님들이 전부 나오셨지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이미 그놈에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방진이 말했다.

“방책의 음모를 알았는데 왜 종족의 장로들에게 알리지 않았나?”

안화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연히 알렸지. 하지만 천정 놈은 이미 도망을 쳐서 내겐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았어. 게다가 종족 사람들은 방책에게 매수를 당해서 나는 족장의 자리를 탐내 방책을 암살하려던 비겁한 놈으로 내몰렸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

방진이 말했다.

안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묵에 잠겼다.

“그럼 이제 어쩔 계획이야?”

석목이 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책은 이미 자정마우 일족을 배신하고 천정에 빌붙었어요. 만약 그놈이 족장 자리를 물려 받으면 우리 자정마우 일족은 아마 그 자의 손아귀에서 멸망하겠죠. 어찌됐든 막아야 해요!”

방진이 잔뜩 화를 내며 말했다.

석목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찌할 건가? 삼 일 뒤면 축전인데.”

안화가 물었다.

방책이 이미 온 종족을 장악하고 있으니, 방진이 하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어찌됐든 말려야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방책의 민낯을 보여줘야 해!”

방진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눈에 결연한 기색을 내비쳤다.

“목숨도 개의치 않고 종족을 지키려 하다니. 진심으로 자네가 존경스럽군. 자네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면야 전혀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

석목이 갑자기 말했다.

“정말입니까? 공자님, 묘한 대책이라도 있나요?”

방진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계략이 하나 떠오르긴 했는데, 아마 될 성싶네……”

석목이 입가를 살짝 올려 의미심장한 웃음을 드러냈다.

* * *

며칠 뒤.

이른 아침부터 영뢰골엔 화려한 장식들이 걸렸다. 골짜기에 깔린 길 위로는 보라색과 금색 복띠가 걸려 있었으며 축제의 분위기가 짙게 묻어있었다.

자정마우족들은 아침 일찍부터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영뢰골로 향하는 드넓은 길을 따라 골짜기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 수임 축전은 이 골짜기에 놓인 계단 모양 제단에서 열린다.

지금 제단에선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제단의 동쪽에는 크기가 백 장이나 되는 검은 소 석상이 놓여 있었으며, 조각상 앞으로 긴 탁자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화초와 다과가 가득했다.

탁자 앞에는 자단 나무가 한 줄로 서 있었으며 그 위로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노인들은 전부 자정마우 일족의 복식을 입은 채 정정한 얼굴을 내비쳤다.

그리고 가운데에 놓인 한 의자에 얼굴이 각진 청년이 앉아있었는데 넓은 보라색 털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귀티가 흘렀다.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방진의 형인 방책이었다.

방책의 왼편에는 짧은 보라색 수염이 자라난 중년 남자가 앉아있었다. 남자는 온화한 시선으로 눈에 빛을 번쩍이는 걸 보니 엄연히 신경 강자였다.

방책의 오른편에는 몸집이 말랐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노인은 눈을 반쯤 뜬 채로 비스듬히 의자에 걸터앉았는데 주변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강력했으며, 짧은 수염이 난 남자와 풍기는 기운이 비슷했다.

계단 모양 제단 주변은 백석이 깔린 드넓은 광장이었고, 광장에는 사람들이 붐볐으며 구경을 온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곳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 길에도 끊임없이 인파가 몰려들었다.

아침 햇살이 검은 소 머리 위로 튀어나온 뾰족한 뿔 사이를 비추자, 자정마우 일족의 장로 한 명이 벌떡 일어서서는 축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하늘과 조상, 그리고 축전을 주관하는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대한 의식이 이어졌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축전은 드디어 막바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단계인 세례를 받고서 대관식을 치를 때가 다가왔다.

“신임 족장은 마우 신지(神祗)의 신광 세례를 받으십시오.”

조금 전에 제단 위로 올라갔던 장로가 큰소리로 선포했다.

중간에 앉아 있던 방책은 싱글벙글 웃으며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나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검은 석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단 밑에서 열렬한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검은 소의 눈알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금빛이 두 갈래 튀어나와 방책에게 쏟아졌다.

방책의 진지한 모습에 금빛이 드리워지자 더욱 신성하고도 장엄해보여 자금골에서 온 사람들은 더욱 소리를 높여 환호했다.

이때 두 눈을 감고서 이 특별한 날의 영광을 한껏 누리고 있던 방책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났다.

그림자가 검은 소 석상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전부 막아버려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금빛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누구냐? 감히……”

방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흉악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방책은 다시 스스로 말을 끊어버렸다.

검은 소 석상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햇살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었나.

그 큰손의 주인은 키가 수 백 장이나 되는 민머리 사내였으며, 사내는 검은 소 뒤에 우뚝 서 있었다.

황금색 피풍의를 반쯤 두르고 있는 사내는 몸에 온통 촘촘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얼굴은 매우 흉악해 보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몸집이 거대한 자가 마치 갑자기 나타난 듯 아무도 그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감히 우리 종족이 치르는 축전을 방해하다니.”

머리가 하얗게 센 신경 장로가 두 눈을 번쩍 뜨고는 민머리 사내를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빨리 물러나지 않겠느냐?”

짧은 수염이 가득 자라난 장로도 벌떡 일어서서는 소리를 질렀다.

* * *

자정마우족들은 전부 노발대발하며 고개를 들어 질책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이미 법보 병기를 꺼내들었으며, 방책이 명령을 내리기만하면 곧장 달려들어 저 악당 거인과 결투를 치를 기세였다.

“저건…… 고만족!”

자정마우 일족의 또 다른 장로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에 고만족이 웬 말이냐?”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방책은 안색이 매우 복잡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장로들이 던지는 의문스런 눈길에 다급하게 정신을 차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고만족! 감히 우리 자정마우 일족으로 쳐들어오다니. 빨리 물러서지 않겠느냐?”

방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고만족 사내를 향해 몰래 전음을 보냈다.

“달탄(達坦) 신장님, 신장님께서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종족 사람들을 데리고 천정에 귀속되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제게 시간을 주셔야지요!”

방책이 전음으로 매우 조급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고만족 사내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이고는 팔짱을 낀 채 곁눈질로 방책을 바라보며 질책했다.

“방책 네 이놈! 너희 종족이 지닌 자원 중에 삼분의 일을 바쳐야만 네가 종족을 거느리고 우리 천정으로 투항하는 걸 허락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직까지 자원을 보내지 않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봐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다.”

고만족 사내가 말을 꺼내자, 자정마우 일족은 난리법석이 되었다.

방책은 얼굴이 이미 시퍼렇게 변해버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장이라는 놈이 비밀리에 만났던 일을 이렇게 서슴없이 드러내다니.

“고만족!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훼방 놓지 마라!”

방책은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말투는 썩 자신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달탄 신장님.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 모두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우선 돌아가시죠. 그리고 자원을 드리기로 한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제가 순조롭게 족장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땐 절대 섭섭하지 않게 바치겠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천정은 너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와 협력하지 않지. 우리 또한 네가 자정마우 일족의 족장 자리를 차지하도록 도와주는 일도 없을 테지.”

달탄 신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방책이 전음으로 고만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방책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장로도 눈길이 방책에게 향했다.

순간, 방책은 크게 당황하며 더는 달탄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동족 여러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종족에서 나고 자란 놈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친히 정하신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제가 어째서 천정에 투항하며 적을 아버지로 모시겠습니까? 이간질을 하려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립시다.”

방책이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짧은 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장로를 바라보며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챈 장로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소리를 지르며 가장 먼저 달탄 신장에게로 향했다.

그 장로가 앞질러 가자 제단에 있던 모든 장로들이 분분히 법보를 꺼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장로는 다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달탄과 방책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단 밖에서 실력이 조금 받쳐주는 자정마우족들 수백 명이 전부 덤벼들어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동시에 달탄을 공격했다.

그런 기세를 보아도 달탄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달탄은 커다란 손바닥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위에서부터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기세로 아래를 짓눌렀다.

커다란 손바닥 아래에 선 자정마우 일족은 마치 우글거리는 개미들 같았다. 성계 후기 수 십 명이나 성계 정상 장로들을 뺀 나머지 자정마우족들은 휘몰아치는 강풍 때문에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본 자금골에서 온 구경꾼들은 골짜기 밖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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