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18화 (718/916)

718화. 황월 고정(荒月古井)

“그래, 그분은 성품이 어떤가?”

석목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악랄하기로 유명하죠. 미색을 즐겨 예쁘장한 후배 소녀들은 전부 그놈 때문에 몸을 버렸어요. 그밖에도 사람들이 아첨을 하며 높이 치켜세워주는 걸 몹시 좋아하죠. 매년마다 생일이 다가오면 종족에 명을 내려 잔치를 크게 벌여 사치와 호화로움을 만끽해요.”

안화가 내뱉는 말투는 담담했지만 얼굴로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족장이 되었나?”

석목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 옛날의 염호 일족을 잊으셔야 해요. 우리 종족에서 신경 강자 한 명이 나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종족의 모든 사람들을 꺾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 그 자가 하는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안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덕망도 능력도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족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종족에게는 엄청난 유독(*流毒:해로운 독)이겠군. 오늘까지 버텨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네.”

석목이 깊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매년 열리는 생일잔치만 해도 적잖이 지출을 하고 있어요. 잔치에 쓰이는 자원들은 전부 염호 일족에 의지하고 있는 작은 종족들이 지불하고 있지요. 그러니 염호 일족은 많은 결정을 내릴 때, 그 종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심지어 종족 안에서 정할 일들도 다른 종족에게 간섭을 받아야 할 때가 있지요.”

안화가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염호 일족은 명성을 어떻게 이어가는 건가? 이러고도 다른 종족들을 통치할 수 있는가?”

석목이 물었다.

“종족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폐단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도 감히 안일산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어요. 혹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 눈엣가시가 되면 끝이 좋지 못하겠지요.”

안화가 말했다.

“아, 조금 전에 숙부가 말씀하신 황월 고정은 또 뭐지?”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황월 고정은 호왕성에 자리 잡은 매우 신비스러운 곳이지요. 밤이 깊어지고 달이 떠오르면 황월 고정에서는 유월의 기운이 풍깁니다. 그 기운은 수련자에게 매우 유익한데, 특히 요족의 혈맥을 강화할 수 있는 신기한 효험을 지녔지요.”

안화가 답했다.

“석두, 네 미천거원 혈맥이 이제 막 각성했으니 황월 고정에 들어가면 아주 유익하겠어.”

채아가 전음으로 석목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황월 고정에 들어가서 수련하고 싶나?”

석목이 웃으며 안화에게 물었다.

“공자님, 저는 몇 년 전에 성계 정상에 도달했지만 도무지 깨달음을 얻지 못해 신경의 문턱만 바라보고 있어요. 황월 고정에 들어갈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지요. 다만 제가 내놓을 수 있는 보물로는 아마 턱없이 부족할 거예요.”

안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일 때 올리는 보물은 문제가 아니지. 내가 지원해주마.”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정말입니까?”

안화가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는 몸을 비틀어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정말이지. 다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나?”

석목도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공자님, 말씀하시지요.”

안화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올린 보물이 내족 족장의 마음에 들어 자네에게 수련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를 데리고 황월 고정에 들어가게. 어떤가?”

석목이 물었다.

그러자 안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에 잠겼는데 과연 가능한 일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부 사람이 황월 고정에 들어갔던 선례는 있습니다만 아마 우리가 꺼낸 보물이 안일산의 마음을 확 사로잡아야할 것 같아요. 그러면 공자님과 함께 황월 고정에 들어가는 것도 안 될 일은 아닐 듯하군요.”

안화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좋아, 그럼 약속했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

안화가 석목을 향해 인사를 하며 말했다.

둘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며 안화가 머무는 거처로 향했다. 안화의 거처는 매우 드넓은 정원이었으며 정원에 건물이 열 개가 넘게 있었는데 전부 꽤 넓었다. 또한 정원 바닥에는 낙엽이 수북이 깔려있었으며 장식들은 전부 낡아 보이긴 했으나 흥성거렸던 옛날 모습들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정원 안은 인적이 드물어 매우 고요했는데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자 그제야 몇몇 시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족장의 신물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느라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죠. 이런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하네요.”

안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석목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속은 뭉클했다.

안화는 석목을 데리고서 한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시종에게 정리를 하라고 말해두었어요. 공자님은 여기서 묵으세요.”

“그래.”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안화가 떠난 후에 석목은 건물 안에 자리한 침상에 올라가 반나절 동안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채아는 심심했는지 건물 안에서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 * *

날이 어두워졌다.

이때,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목이 눈을 번쩍 떴는데 눈에는 빛이 반짝였으며 기력이 차고 넘치는 것만 같았다.

채아는 곧바로 날개를 푸득대며 석목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석두, 왜? 이제 움직이려고?”

채아가 물었다.

“우리는 아는 게 너무 없어. 정보를 찾아다니지 않으면 결국 상황에 끌려 다니게 될 거야.”

석목이 입을 열었다.

“히히, 네가 저녁에 움직일 줄 알았지.”

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됐고. 빨리 가자.”

사람 한 명과 새 한 마리가 건물에서 나와 민첩하게 염호 일족의 곳곳으로 돌아다녔다.

석목과 채아는 수막으로 감싸고 있어 기운을 완벽하게 숨겼다.

어둠 속에서 석목은 낮에 걸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염호 내족이 머무는 거주지에 도착했다.

이제 막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마침 염호족의 수위 한 무리가 손에 병기를 든 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석목이 몰래 다가가 그 중 한 명을 낚아채려 할 때, 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수위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가 무리 속으로 합류하려 했다. 아마 어떤 연유로 대오에서 떨어진 사람 같았다.

“그래, 너다.”

석목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창 달려가던 수위 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쩍였으며 수위가 제대로 보기도 전에 검은 안개가 머리를 감싸더니 그는 정신이 흐릿해졌다.

수위의 앞에 나타난 것은 석목의 분신이었다.

고작 천위 수련 경지인 수위는 석목의 분신이 부린 미혼 최면술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너, 또는 네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천정과 결탁한 놈이 있는가?”

석목이 수위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없어…… 몰라……”

수위는 혼이 나간 것처럼 눈이 텅텅 비어있었으며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석목은 수위가 하는 말이 그리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네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행동거지가 이상하거나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가?”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안력(安力)…… 최근, 최근…… 종족 부지의 서쪽에서……”

수위가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급격하게 관심이 생겨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왜 가는 건가?”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곳에 과부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

수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석두, 이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채아가 말했다.

“괜찮아. 다른 녀석을 잡아보자.”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위의 기억을 지워버린 후에 석목은 채아와 분신을 데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밤새도록 석목은 염호족 백여 명에게 최면을 걸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

* * *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온 석목은 조용히 거처로 돌아가 낮 동안은 문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깊어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나와 어둠을 빌어 염호 일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이번에는 전날 밤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염호 외족을 염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똑같이 최면 비술로 정보를 얻어내려고 밤새 돌아 다녔지만 여전히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다.

석목은 점점 의문이 깊어졌다. 천정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날이 밝아졌으니 어쩔 수 없이 다시 거처로 돌아가야만 했다.

셋째 날은 내족 족장 안일산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안화는 석목이 있는 거처로 와서 함께 내족으로 향했다.

석목은 흔쾌히 잔치에 참여했다.

잔치는 내족의 주전에서 열렸다.

석목과 안화가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내전은 시끌벅적했다.

내전의 문을 통해 안쪽을 바라보니 드넓은 대전에는 다양한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밝은 분위기 아래 단장한 시종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대전을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잔치에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석목과 안화는 말을 주고받으며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목은 차분한 얼굴로 몰래 신식을 내보내면서 조심스럽게 사방을 훑으며 무리를 살폈다. 채아는 웬일인지 조용히 석목의 어깨에 앉아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둘이 대전의 문 앞에 도착하자 안도와 머리와 피부가 파란 청년이 나란히 걸으며 대전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이구, 이게 뉘신가? 안화 아닌가! 어쩐 일로 네가 우리 숙부님의 생신 잔치에 참여하는 거냐? 밖으로만 돌아다녀서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던 녀석인데.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안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놀란 척을 하며 말했다.

“안 형, 뻔한 게 아니겠습니까? 황월 고정에 들어가 수련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파란 머리 청년이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 안화가 얼마나 좋은 물건을 준비했는지 너무 궁금해지네? 외족의 조상님이 어떤 쓰레기를 남겼을까? 아니면 몇 년간 떠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워왔나? 하하하……”

안도가 머리를 흔들며 비아냥거리자 파란 머리 청년도 맞장구를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둘은 석목과 안화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염호 외족의 족장이 사망한 후로 외족은 수년 간 억압을 당해왔기에 자원이 부족하여 절대로 그럴싸한 선물을 내놓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안화도 황월 고정에서 수련을 할 자격을 노리고는 있었지만 기가 많이 꺾였다.

안화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두 주먹을 꽉 쥔 채 죽일듯한 눈빛으로 안도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도는 계속 비아냥거렸다.

“어쩐지 온통 이름도 없는 작은 종족들뿐이더군. 여기 머무는 주인은 폐품을 받아서 자기 생일을 축하하는 괴상한 취미를 즐기나보네!”

혀를 놀리는 일 만큼은 절대 질 수 없는 채아였다.

“뭐?”

그 말을 들은 안도는 화가 치밀어 올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파란 머리 청년도 안색이 굳어서는 화난 얼굴로 채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채아는 조금도 겁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석목의 어깨에 서서 가슴을 내밀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안도를 째려보았다.

석목은 웃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딱히 채아를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도가 기운을 터뜨리며 싸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석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순간, 안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마치 상대방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거만하던 기세가 자신도 모르게 꺾였다.

석목이 풍기는 기운은 성계 초기였지만 무엇 때문인지 뼛속 깊은 곳부터 두려움이 몰려와 기가 눌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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