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19화 (719/916)

719화. 수연(寿宴)

“안 형, 이 거지 같은 놈이랑 엮일 필요는 없죠.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 있잖습니까?”

파란 머리 청년은 자칫 잘못하면 큰 코를 다치리라 생각했는지 눈치 빠르게 안도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안도는 내키지 않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파란 머리 청년과 밖으로 나갔다.

안화의 안색은 곧 폭발하기 직전 같았지만 화를 억누르며 간신히 참아냈다. 안화보다 오히려 채아가 더 내키지 않은 듯이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안도 옆에 있는 청년은 누군가? 안도보다는 침착해 보이는군.”

석목은 떠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옥(蓝玉)이라 불리는 사람이에요. 남정 일족의 소주죠.”

안화가 숨을 길게 내뱉고는 짧게 대답했다.

“남정 일족?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

석목은 한참 동안 기억을 되짚었지만 그 종족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모르시겠죠. 이류(二流) 부족이라 천하 성역의 백족들 중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종족이지요. 하지만 우리 염호 일족을 따르는 종족들 중엔 가장 큰 편이지요. 실력도 꽤 강하며 진기와 진반을 제련하는 기술이 뛰어나 적잖은 부를 축적했어요. 자원만 놓고 봤을 때, 우리 염호 일족보다 더 부유할지도 모르겠네요.”

안화가 계속해서 말했다.

“진기와 진반을 제련하는데 능하면 생계를 꾸리는 데는 문제가 없겠군.”

석목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종족이 다루는 진법은 전부 남정 일족이 제련한 거예요. 심지어 종족 내부에 있는 수많은 방어 대진도 남정 일족이 도맡아 설치했지요. 유지보수 또한 저들이 책임지고 있어요.”

안화가 말했다.

“종족의 안전을 다른 종족에게 맡긴다고?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엔 종족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대진들은 사람들을 보내서 지키도록 했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외족의 힘이 약해면서 대진은 방치되었어요. 게다가 안일산은 남정 일족의 족장과 관계가 매우 돈독한 편이라 경계가 느슨해졌죠.”

안화가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이 생각에 잠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시지요.”

안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화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 * *

대전 안을 채운 장식들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투명한 유백색 설유석(雪乳石)을 마루에 깔았는데, 설유석은 매우 귀하여 최상급 영기를 제련할 때 쓰는 고급 재료였다. 그런데 이렇게 바닥에 깔아놓는 걸 보니 정말 사치스럽기가 비할 데가 없었다.

벽에도 화려한 보석들이 잔뜩 박혀있어 환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빛들이 반짝였다.

천정에 그려진 벽화와 대전 안에 솟은 돌기둥, 그리고 주변을 꾸민 수많은 장식들은 전부 섬세하게 설계되어 온 대전이 눈부시게 빛났다.

석목은 이렇게 도처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이 불편했는지 계속 미간만 찌푸렸다. 석목은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는 장식들이 딱 질색이었다.

“석두, 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아.”

채아가 낮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석목이 채아를 째려보자 채아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대전 곳곳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있었는데 곧 생일잔치가 열릴 것이라 사람들이 하나둘 착석했다.

양쪽에 앉은 사람들은 복식이 전부 달랐으며 수련 경지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천위 경지도 있었는데 염호 일족을 따르는 부속 종족인 것 같았다.

안화가 들어오자 부속 종족 사람들 몇몇과 친하게 지내는 외부 종족 사람들이 일어서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염호 일족은 내족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 데다가 내족과 외족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부속 종족들이 굳이 안화와 친한 척을 하다가는 내족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었다.

안화는 그런 것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며 석목과 곧장 앞으로 걸어가서는 염호 일족의 내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석목과 안화가 가장 앞자리로 다가가자 자리는 세 개 뿐이었으며 안도와 남옥이 이미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화와 석목은 세 번째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안도와 남옥 옆에는 아첨을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어 안화와 석목의 주위는 유독 썰렁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모든 사람들이 착석했으며 대전의 옆문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자 대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노인은 몸이 약간 오그라들었으며 얼굴에는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데다가 눈두덩이 아래가 축 처져있어 마치 과음을 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노인이 풍기는 기운은 신경이긴 했지만 신경 초기였다.

석목은 의식을 하며 노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숙부님, 만수무강하십시오!”

안도가 가장 먼저 일어서서 큰소리로 축하하는 말을 전했다.

“족장님, 만수무강하시고 영원한 선복을 누리십시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서는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축하하는 말을 전했다.

안일산을 활짝 웃는 얼굴로 주좌로 걸어가 앉고는 푸근한 인상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 자리에 함께해줘서 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소! 다들 예의는 차리지 말게! 좋은 날이니 편안하게 앉게!”

이어서 속살이 드러난 복식을 입은 여인 두 명이 걸어 나와 안일산의 양옆에 앉더니 품에 안겼다.

일어섰던 사람들도 손을 굽히며 앉았다. 그리고 입에 꿀을 바르고서 아부를 떨어대기 시작하자 안일산은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두 여인을 끌어안고는 끊임없이 박장대소했다.

“아, 안화도 왔구나.”

안일산은 한참 뒤에야 앉아있는 안화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충 한 마디를 내던졌다.

“며칠 전에 돌아왔습니다. 족장님, 만수무강하십시오.”

안화가 일어서서는 손을 굽히며 말했다.

“그래, 애썼다.”

안일산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의식을 하더니 석목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안화는 다시 자리에 앉아 침묵만 지켰다.

이때, 대전에서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미모가 뛰어난 무희(舞姬)들이 대전의 양옆에서 가운데로 다가와 옷을 나풀거리며 춤을 췄으며 대전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그 광경을 본 채아는 두 눈에서 빛을 뿜으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석목은 눈앞에 펼치진 광경에 한숨만 나왔다.

잔치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수련자였기에 가무를 즐기는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잔치에 참여한 목적은 황월 고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먼저 나서서 선물을 올리지 않았다.

안일산은 술에 취해 눈이 풀렸으며 두 여인을 안은 채 아래에 있는 무리를 보자 형언할 수 없는 기쁜 감정이 벅차올랐다.

모두가 안일산의 발아래에 엎드린 채 존경과 부러움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일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는 더없이 통쾌해하며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천하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소인은 청랑족(青狼族)의 언산(彦山)입니다. 족장님이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라며 이 ‘현몽단(玄夢丹)’을 선물로 올리겠습니다!”

푸른 피풍의를 두른 사내가 가장 먼저 일어서서 선물을 올렸다.

시종 한 명이 하얀색 옥병을 안일산 앞으로 가져갔다.

사내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안일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청랑족의 성의를 내 기꺼이 받아들이지.”

안일산을 하얀색 옥병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썹을 치켜뜬 채 담백하게 말했다.

미적지근한 안일산의 표정을 본 사내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누군가가 시작하자 사람들이 줄줄이 선물을 올렸다.

“소인 타망족(咤蟒族)의 주성(周成)입니다. 자전주(紫電珠)를 축하 선물로 올립니다. 족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먼산을 한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이 옥합을 받아 안일산 앞으로 가져갔다.

옥합을 열자, 보라색 구슬 한 알이 번개를 감싸고 있는 게 비범한 물건 같아 보였다.

안일산은 여전히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보라색 옷을 입은 청년도 계면쩍게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축하 선물을 올렸다. 하지만 안일산은 그들이 올린 선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충 한번 쳐다보거나 심지어 이름만 듣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잠시 후에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줄줄이 선물을 올릴 때마다 안일산은 유유자적한 얼굴로 자상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안일산의 눈빛 깊은 곳에는 탐탁지 않은 낌새가 어렸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세 사람 남옥, 안도, 안화에게로 향했다.

셋만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일산도 천천히 시선을 돌려 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기대하는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허허, 다들 선물을 올린 것 같은데, 저도 뒤쳐질 수는 없지요. 여봐라, 내 선물을 올리거라.”

남옥이 안도와 안화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장 먼저 일어섰다.

몇몇 시종이 사람만한 쟁반을 받쳐 들고서 걸어 들어왔다.

쟁반은 넓은 붉은색 천으로 덮여있었으며 붉은 천 위에는 금제가 드리워져있어 신식으로도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안에 든 물건이 보이지 않자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어 사람들이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남옥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붉은 천을 걷자 그 속에는 사람만한 붉은색 산호수(珊瑚樹)가 들어있었다.

붉은색 산호수에서 옅은 핏빛이 뿜어져 나왔으며 시원한 향기가 코끝으로 몰려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호수의 나뭇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壽)’자가 새겨져있는데 매우 훌륭한 조예 기술이 돋보였다.

“이건…… 만 년 산호혈옥(珊瑚血玉)!”

대전에 있던 누군가가 산호수를 알아보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도 눈을 반짝였는데 만년 산호혈옥은 매우 귀한 재료로 혈옥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또한 기혈을 보충하는 효험이 있어 몇 가지 귀한 단약을 제련할 때 쓰였다.

이 산호혈옥은 크기만 놓고 봐도 꽤 큰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으며 지금까지 올린 선물들 중에 가장 귀한 것이었다.

게다가 산호수의 모양이 ‘수(壽)’자를 그리고 있어 축하 선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좋아, 좋아! 남옥 조카, 애썼네. 이 선물이 매우 마음에 드네.”

안일산이 손을 흔들어 옆에 앉아있던 두 여인에게 물러나라고 한 후, 일어서서는 반짝이는 눈으로 산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좋다.’라는 말만 내뱉었다.

“백부(伯父)님이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남옥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굽혀 인사를 올린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석목은 남옥의 침착한 표정을 바라보며 눈에서 의아한 빛이 스쳤다.

“남옥 형, 이렇게 귀한 선물을 올리시다니. 제 선물이 많이 보잘것없어 보이네요. 그래도 준비해왔으니 올리겠습니다.”

안도가 일어서서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붉은 동상이 허공에 나타났는데 족히 높이가 칠팔 장이나 되는 동상이었다. 동상은 안일산의 모습이었으며 실물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동상의 등에는 작은 글씨가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씨는 안일산이 그간 염호 일족을 위해 세운 공을 줄줄이 나열해 놓은 것이었다.

안일산은 동상을 보자 눈에서 이채가 흘렀으며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숙부님, 조카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간 염호 일족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셨지요. 숙부님의 공적은 비석을 세워 후세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만년 화동석(火銅石)을 만들어 숙부님께 드리오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안도가 공손한 투로 말했다.

안일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눈빛을 거두어들였다. 안도가 준 선물보다 그가 내뱉는 번지르르한 말이 더 먹히는 것 같았다.

“그래, 선물이 마음에 드는구나.”

안일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도가 눈에 희색을 띠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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