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변고
안일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에는 감격스러움이 섞여있었다.
이번 잔치에서 안도는 마지막 승자가 될 터였다.
이제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안화에게로 눈길을 돌렸는데 아직 안화만 아무 선물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도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안화를 한번 쳐다보았으며 안화가 제대로 된 선물을 내놓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가를 살짝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크기가 몇 척 정도 되는 옥합을 하나 꺼냈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족장님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안화는 길게 말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옆에 있던 시종이 다가와 안일산 앞으로 옥합을 가져갔다.
안일산은 눈썹을 치켜뜨며 옥합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속에는 한 척 정도 되는 붉은색 여의(如意)가 들어있었다.
여의는 부드러운 빛에 싸여있었으며 붉은색 부문이 빛 속에서 튕겨져 나와 영성을 흘려보냈다. 마치 이 옥여의(玉如意)는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엄연히 영보가 내는 기운이었다!
“영보!”
안일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낮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식견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곧바로 타오르는 여의의 법보 등급을 알아보고는 전부 안일산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도와 남옥은 안색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 이건 말이 안돼요!”
안도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안화를 바라보았는데 온통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영보가 얼마나 귀한 보물이었나. 염호 일족만 놓고 봐도 족장의 신물 정도만 간신히 영보라 불릴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신물이 합쳐져야만 영보의 위력을 발산할 수 있었는데 안화가 어디서 영보를 구해왔겠나.
안화는 대전에 모인 사람들과 안일산의 표정을 살피며 확신이 들어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석목을 한번 쳐다봤다.
석목이 무려 영보를 축하 선물로 내놓을지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석목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에게는 꽤 많은 영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옥여의는 예전에 자양성에서 천정의 신경 강자를 죽인 후에 얻어낸 것이었다. 게다가 석목에게 이 영보는 아주 평범한 영보라 가지고 다녀도 별 쓸모가 없었다. 남의 꽃을 빌어 부처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석목은 이런 영보보단 황월 고정에 더 관심이 쏠렸다.
안일산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열망 가득한 눈빛은 여전히 눈 안에서 넘실거렸다.
“허허, 안화, 선물이 매우 마음에 드는구나.”
말을 마친 안일산은 천천히 앉아 다시 침묵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안도와 안화를 번갈아봤다.
안화는 안일산이 묘한 표정을 짓는 걸 살피더니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도와 안화가 올린 선물은 누가 봐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지만……
석목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도 전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일산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준 선물은 다 귀하네. 하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안일산이 할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조카 안도가 준 선물이네.”
안일산이 머뭇거리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안도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벌떡 일어서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안일산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숙부님, 감사합니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대전은 안도가 흥분하여 내는 소리 말고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석목도 미간을 찌푸린 채 안일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살면서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보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다 있을까?
안화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화,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안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일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족장 어르신, 제 선물과 안도가 준 선물 중에 어떤 것이 더 귀한지는 모두가 다 알 테죠. 저는 이 공평하지 않은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안화는 애써 분노를 짓누르며 이를 부들부들 갈았다.
만약 옥여의가 자신의 물건이었더라면 안화는 그냥 참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석목의 보물을 얼렁뚱땅 삼키려는 안일산의 태도를 안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석목에게 그 보물을 다시 돌려줘야만 했다.
“안화! 네가 지금 족장님께 뭐라 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안도가 일어서며 안화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보냈다.
“안화, 네 선물이 귀한 건 나도 잘 안다. 허나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은 안도가 준 선물이란다.”
안일산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안화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계속 말을 이어가려했지만 석목이 그를 가볍게 끌어내리며 전음으로 말렸다.
안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안화가 말없이 자리에 앉자 안일산은 그제야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비쳤다.
황월 고정은 백 년에 단 한 번만 열리니 안일산이 이렇게 흔하지 않은 기회를 외족 사람에게 내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안화는 전임 외족 족장의 아들이었다.
비록 공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안일산은 이미 염호 일족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라 사람들의 시선과 구설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안화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 다들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염호 일족의 외족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아쉬워했다. 비록 안화가 처한 처지가 마음이 아팠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안화가 탐탁지 않기도 했다.
대전의 양쪽에 있던 외족과 부속 종족 사람들은 워낙 안화를 업신여기고 있었던 터라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안화가 더욱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안화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일산이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때, 밖에서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석목도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파란 피풍의를 두른 중년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기세등등하게 대전 안으로 걸어왔다.
모두 이 중년 남자를 알고 있는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후후, 누가 왔나 했더니 남진(藍辰) 형이군요. 오랜만입니다. 오늘 어떻게 시간이 나셨나 봅니다?”
안일산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파란 피풍의를 두른 중년을 맞이했다.
석목은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의논하는 것을 듣고는 곧바로 중년 남자의 신분을 알아차렸는데 그는 남정족의 족장이었다.
“무려 팔황고족 중에 하나인 염호 일족 족장의 생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와야지요. 이건 제 선물입니다.”
중년이 웃는 얼굴로 소매에서 파란색 목합을 하나 꺼냈다.
“하하, 남진 형,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 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데 선물까지 준비하셨다니요!”
안일산은 염호 일족의 족장이라는 말을 듣자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제 성의입니다. 받아주시죠!”
남진이 말했다.
“자, 남 형, 어서 오세요……”
안일산은 목합을 건네받고는 파란 피풍의를 두른 중년을 자리로 안내했다. 하지만 안일산이 하던 말은 중간에 끊기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눈앞에 서있던 파란 피풍의를 두른 중년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순식간에 흉악한 얼굴로 바뀌었다.
이변이 일어났다.
안일산은 아랫배가 뜨거워지더니 붉고 네모난 불기둥이 그의 배를 뚫고서 나왔다.
아랫배에 작은 구멍이 뚫렸으며 입에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안일산의 몸은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날아가 무겁게 바닥에 떨어졌다.
웃고 있는 남진의 오른손에 언제인지 모르게 붉은색 옥새 법보가 나타났다. 옥새 끝에는 붉은 호랑이 조각상이 새겨져 있었으며 살아있는 듯이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옥새에서 붉은빛과 강렬한 영력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너……”
안일산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놀랍고도 화가 난 감정을 드러냈다.
“으아!”
거의 동시에 또 다시 비명소리가 들렸다.
몸통 하나가 안일산에게로 날아가 ‘쿵!’ 떨어졌는데 그는 안도였다.
안도도 가슴에 커다란 구명이 하나 뚫렸으며 허연 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안도가 앉아있던 자리에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짧은 파란 망치 법보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변에 경지가 신경인 안일산이 큰 부상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염호 일족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젊은이마저 큰 상처를 입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서 멍하니 남진과 남옥을 바라보았다.
“너…… 너희, 뭐하는 거야?”
안일산이 갈라진 목소리를 내더니 시선을 돌려 안도를 한번 쳐다보고는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석목은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시선을 돌려 안도를 바라보니 튀어나올 듯한 눈알로 남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폐부에 큰 부상을 당하여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하하하, 뭐하는 거냐고? 내가 암살을 한 거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남진이 하하 웃었다.
남옥이 남진에게로 다가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섰다.
안화는 남옥과 남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남진이 손에 쥔 붉은색 옥새로 시선을 던졌다.
“호왕새인(虎王玺印)! 맞네, 우리 아버지의 호왕새인! 왜 네 손에 있는 거냐?”
안화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으로 눈을 가득 채웠다.
이때, 또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대전 밖에서 함성이 울려 퍼지더니 회색 안개가 사방팔방에서 몰려와 대전을 까맣게 덮어놓았다.
음침하고 흉악한 기운이 풍기면서 대전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이건…… 현음미천진!”
석목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이 진법은 석목과 천봉 일족의 몇몇 신경 강자들을 서하도에 묶어두었던 진법이었다.
하지만 여기 드리운 진법은 서하도와 비교했을 때, 많이 허술했다.
“너희……”
안일산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워 복부에 난 상처에 붉은빛을 번쩍였으며 비술로 힘겹게 지혈을 했다. 때문에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예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안일산, 그동안 이 호왕성에서 패왕 행세를 하며 부귀영화를 실컷 누렸지? 그런데 이제 이런 좋은날은 오늘로 끝이 나버렸네? 그리고 네놈들도 전부 여기서 서서히 죽어갈 게다!”
남진이 경멸하는 눈으로 안일산과 대전 사람들을 훑어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남진이 하는 말을 듣자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남진은 회색빛을 날려 남옥을 감싸고는 대전 밖으로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둘은 회색 안개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거기 서!”
안화의 눈에서 핏기가 어리더니 몸을 날려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안화가 회색 안개에 강하게 부딪쳤다.
회색 안개는 보기에는 매우 얇아 보였지만 실은 매우 단단해 안화의 몸은 튕겨져 나와 되돌아왔으며 두어 걸음 밀려나서야 몸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안화가 분노에 겨워 소리를 지르며 붉은 화염을 크게 드리우더니 붉은색 전도를 꺼내들었다. 화염 전도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회색 안개에 강하게 부딪쳤다.
회색 안개는 미세하기 흔들리는 듯하더니 곧바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화가 분노에 겨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붉은색 전도에 빛을 번쩍이더니 화염 도광을 줄줄이 날려 놀라운 기세를 풍겼다.
하지만 화염 도광은 회색 안개에 닿는 순간, 깊은 바다 속에 빠져버리듯이 소리조차 나지 않았으며 회색 안개는 미세하게 흔들리기만할 뿐 찢어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진정해! 이것은 현음미천진이야. 힘으로는 절대 뚫고나갈 수 없어.”
석목이 옆으로 다가가 안화의 팔목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의 목소리는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