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준비를 마치다
안화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으며 이글거리던 눈빛도 서서히 사라졌다.
“침착해! 이제 누가 네 아버지를 죽였는지 알게 되었으니. 남정 일족의 족장은 언젠가는 네 손에 죽을 테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석목이 안화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
안화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 안은 혼란에 빠졌는데 축하를 하러왔던 종족들은 전부 겁에 질린 모습이었으며 안일산의 생일이고 뭐고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안화처럼 영기 법보를 꺼내 미친 듯이 회색 안개를 공격했다.
여기저기서 빛이 번쩍이며 굉음이 울려 퍼졌지만 그들은 전부 괜한 힘만 빼고 있는 것이었다.
안일산은 기력이 조금 회복된 듯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진법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다시 안일산의 옆으로 다가가 진법을 뚫어달라고 부탁했다.
안일산은 애써 평정심을 찾는 듯했지만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누워있는 안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동공이 흐릿해졌으며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전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조금 전만 해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안도였는데 잠깐 사이에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도 안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안일산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비록 신경 강자였지만 회색 대진의 비범함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큰 부상을 당하여 실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할 터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남정 일족이 배신을 한건가요?”
대전의 입구에 서 있던 안화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석목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천정의 음모인 것 같아.”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안화가 깜짝 놀랐다.
“현음미천진은 천정의 대진이야. 천봉성에서 천정 놈들에게 똑같은 진법에 묶인 적이 있지. 천정이 남정 일족을 매수해서 덫을 놓아 염호 일족과 근처에 있는 몇몇 행성의 종족들을 한 번에 멸할 작정인 것 같아.”
석목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안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주변의 회색 안개가 들끓기 시작하더니 크고 작은 회색 소용돌이가 하나둘씩 나타났다. 소용돌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놀란 얼굴로 회색 안개를 바라봤다.
“어찌된 일입니까?”
안화도 당황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석목은 오히려 냉철해지며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전에 서하도에서 겪었던 상황과 똑같았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자 회색 구름 소용돌이에서 빛이 반짝였으며 소용돌이마다 회색 번개가 찢어지더니 맹렬하게 쏟아졌다.
석목은 금빛을 반짝이면서 구룡쇄금갑을 두르고, 여의빈철곤을 들었다.
그런데 석목의 안색이 다시 바뀌었다.
우르릉!
회색 번개가 전부 한 곳에 쏟아졌는데 줄줄이 안일산에게 향하고 있었다.
석목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안일산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에 붉은빛을 번쩍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 붉은색 옥새가 하나 나타났는데 조금 전에 남정 일족의 족장이 날린 옥새와 똑같이 생겼다.
붉은빛이 옥새에서 퍼져나가며 화려한 뚜껑을 만들어 안일산의 머리 위에 펼쳐졌다.
붉은 방패가 이제 막 펴졌을 때, 회색 번개가 방패 위로 쏟아졌다.
쾅!
붉은 방패는 한참 동안 흔들리다가 이내 멈추었다.
방패 아래에 서 있던 안일산은 안색이 붉게 부풀어 오르더니 참지 못하고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안일산 근처에 있던 이들 중에 수련 경지가 조금 높은 사람들과 빨리 도망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회색 번개를 맞아 소리도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몸이 부서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안일산과 멀리 떨어졌다.
쾅!
회색 구름은 계속해서 들끓었으며 소용돌이 속에 드리운 빛도 끊임없이 번쩍였다. 순간, 회색 번개가 또다시 훨씬 강력해진 기세로 쏟아졌다.
그러자 안일산이 큰소리를 지르더니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몸속에 깃든 진기를 전부 붉은 옥새에 불어넣으며 간신히 방패를 유지시켰다.
쾅!
붉은색 방패가 격하게 흔들리며 다시 한번 회색 번개를 받아냈다. 하지만 방패는 빛이 어두워지면서 기운이 절반이나 줄었다.
안일산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나왔으며 얼굴 또한 초췌해졌다.
소용돌이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점점 불어났으며 그 속에 회색 번개가 뱀처럼 꿀렁이더니 얽히고설키면서 일고여덟 장 정도 되는 번개 기둥으로 뭉쳐져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안일산의 눈에서 사나운 빛이 스쳤다. 이어서 그가 옥새에 정혈을 한 모금 뱉어내자 옥새의 문양이 더욱 밝아지면서 방패도 크게 부풀었다.
동시에 안일산은 한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단번에 법보를 일고여덟 개 날려 보냈다. 법보들이 날아 나와 화려한 빛을 뿜으며 방패를 감쌌다.
쾅!
붉은 뚜껑이 빠르게 돌아가며 빛을 크게 드리우더니 붉은 화염을 감싼 투명한 호랑이 허영을 만들었다.
붉은 화염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려 불기둥을 뿜어내며 쏟아지는 회색 기둥을 맞이했다.
이때, 회색 기둥이 흩어지면서 다시 회색 뱀으로 변하더니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떨어져 화염 호랑이와 호랑이가 뿜어낸 불기둥을 동시에 뚫어버렸다.
엄청난 위력을 풍기던 법보들로 만든 보호막마저 종잇장이 뚫리듯이 가볍게 부서지면서 안일산은 넓게 퍼진 번개 속에 묻혀버렸다.
법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색 번개의 파동이 흩어지자 검게 타버린 채 온전한 곳이 없는 시체 한 구가 나타났다. 시체는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았으며 붉은색 옥새만 한쪽에 떨어진 채 옅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옥새는 파손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자 다들 얼굴을 구기며 절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쾅!
조용해졌던 회색 안개가 다시 들끓기 시작하더니 번개가 또다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곳에 집중하여 쏟아지는 게 아니라 흩어져서 쏟아져 내리며 온 대전에 빈틈없이 드리웠다.
안일산을 격살하느라 많은 힘을 소모했는지 또다시 쏟아지는 회색 번개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그 위력도 많이 약해졌다.
다들 각자 지닌 수단으로 도망을 가거나 쏟아지는 번개를 막아 다행히 이번에는 죽은 사람이 없었다.
이때, 안일산의 시체 근처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나 붉은색 옥새와 안일산의 저장 반지를 가져갔는데 물건을 챙긴 이는 석목이었다.
안화는 몸을 날려 쏟아지는 번개들을 피해 다녔다.
석목이 번쩍이며 안화의 옆에 나타났다.
“공자님, 이제 어찌합니까?”
안화가 석목을 한번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석목은 차분한 얼굴로 대전 밖을 바라보았다.
* * *
이때, 염호 일족은 전쟁에 휘말렸다.
외족과 내족이 머무는 거처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으며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도처에 불길이 활활 번졌다.
염호족이 머무는 부지 안에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남정 일족과 천정 놈들이 힘을 합쳐 염호 일족에서 대학살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염호 일족의 족장과 장로들이 전부 주전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염호족은 마치 흩어진 모래알처럼 되어버려 온힘을 다해 외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밀렸다.
주전 밖의 하늘에서는 남정 일족의 족장인 남진과 금색 옷을 두른 중년 남자가 어깨 나란히 허공에 서있었다. 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금색 옷을 두른 남자는 입가에 짧은 수염이 자라나 있었는데 눈에선 어두운 금색이 뿜어져 나왔으며 기운이 매우 단단한 걸 보니 엄연한 신경 강자였다.
“남진 족장님, 오늘 큰 공을 세웠으니 윗선에서 그 공을 톡톡히 쳐줄 겁니다. 남정 일족은 새로이 천정에 속하게 될 것이며 부귀영화는 물론이거니와 부족의 지위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질 겁니다.”
금색 옷을 두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죠. 어휘(禦晖) 신장님 덕분에 이렇게 단번에 염호 일족들을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절대 그 공을 독차지 할 수 없지요. 이제 정정당당하게 천정에 귀속되었으니 앞으로 신장님께서 잘 돌봐주셔야 합니다.”
남진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말했다.
어휘라 불리는 신장의 입이 귀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니 아첨이 먹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죠. 귀속하려는 종족들에게 천정은 늘 후한 대접을 했습니다. 남정 일족은 진기와 진반을 제련하는데 뛰어나다면서요? 충분한 자원을 윗선에 바치기만 한다면, 고급 연기 비술을 얻는 건 시간문제겠죠. 이제 남정 일족은 확실히 천하 성역에서 제일가는 큰 종족으로 거듭날 겁니다!”
어휘 신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휘가 전하는 말을 듣자 남진은 얼굴에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 더 화려한 언변으로 어휘에게 알랑거렸다.
하지만 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대전의 서북쪽, 진법이 뿌리를 박은 곳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하나 빠져나왔는데 바로 석목의 분신이었다.
안화가 염호 일족의 방어 대진과 남정 일족의 상황을 석목에게 말했을 때, 석목은 괜히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분신을 밖으로 내보내 두었다. 비록 남정 일족이 음모의 주범이란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대비를 했던 것이었다.
분신이 대전의 서북쪽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는 아래를 내려다보자 땅에서 흙이 솟구치며 절반 정도 나온 검은 석상이 빛을 뿜고 있었다.
분신이 손목을 굽히자 붉은 단검이 분신의 손에 나타났다.
분신이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검신에서 마기가 들끓으며 붉은빛이 크게 번졌다. 그 모습은 마치 절세의 흉물 한 마리를 꺼내는 것만 같았다.
분신이 다시 검끝을 아래로 내리찍자 마기가 용솟음치더니 검은 석상으로 몰려갔다.
* * *
대전 속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었으며 염호족과 축하를 하러온 부속 종족들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대전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됐어?”
석목은 단번에 안화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네?”
안화는 석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안화가 말을 마치는 순간, 대전의 서북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먼지가 흩날리면서 커다란 구멍이 하나 찢어졌다.
“지금이야, 가자!”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안화를 끌어당기더니 찢어진 구멍을 통해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대전 속에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만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석목을 따라갔다.
남진이 내뱉는 꿀이 발린 말에 취해있던 어휘 신장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 시선을 대전으로 던졌으나 석목과 안화는 이미 대전에서 날아 나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진이 뚫린 겁니까?”
남진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저 녀석이야.”
어휘 신장은 손가락으로 석목의 분신을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놈은 염호족이 아니야!”
남진이 한참 동안 분신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누가됐든 내 계획을 망쳤으니 죽일 수밖에.”
어휘 신장이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와 석목의 분신을 공격했다.
석목의 분신은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어휘 신장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은 채 손에 든 붉은 단검을 들어 몸에 마기를 감으며 곧바로 어휘 신장이 날린 공격을 받아쳤다.
그 모습을 본 남진은 몸을 날려 어휘 신장을 따라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분신이 아닌 안화였다.
안화는 남정 일족에게 이미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남진이 그에게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곧바로 몸을 날려 남진과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서 누군가 안화를 끌어당겼다.
“자네는 지금 여기서 싸울 때가 아니지. 빨리 족인들을 거느리고 반격을 해. 여긴 나에게 맡기고.”
석목이 말했다.
“공자님……”
안화는 망설였다.
“빨리 가, 이제 염호 일족은 우두머리가 없어. 자네가 일족을 이끌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자를 죽인다고해도 염호 일족은 전부 살해를 당해 멸망해버릴 거야.”
석목이 재빠르게 설득을 했다.
“공자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