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24화 (724/916)

724화. 함께 외적을 물리치다

석목은 날렵하게 걸음을 옮겨 번천곤을 뒤로 끌면서 앞으로 다가가 땅 위에 깊은 자국을 그렸다.

얼음 거인은 긴 창을 앞으로 들고 있었으며 얼음방패로 뒤를 가린 채 날카로운 얼음 기운을 풍기며 석목을 공격했다.

석목이 흑백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곁눈으로 등 뒤를 쳐다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곤봉을 앞으로 휘둘러 거인의 머리통을 강하게 내리쳤다.

훅!

방대한 금색 곤봉 그림자가 휘황찬란하게 번지자 하늘에 솟아오른 구름이 빙빙 돌면서 아래를 짓눌렀다.

쾅!

금색 곤봉 그림자가 스친 허공이 격하게 흔들렸으며 이어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파죽지세로 얼음창을 산산조각 내버렸고, 얼음 방패마저 조각이 나서 부서졌다.

금빛 곤봉 그림자가 우르르 쏟아지며 얼음 거인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리고는 몸통도 둘로 갈라버렸다.

우르르!

얼음 거인은 몸통이 부서져 버렸으며 주변 백 장을 뒤덮은 얼음과 함께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석목이 한쪽 손바닥에 금빛을 번쩍이며 번천곤을 몸속에 집어넣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선급 영석을 하나 쥐고서 빠르게 영력을 빨아들였다.

그런데 이때, 석목의 뒤에서 빛이 번득였다.

이어서 그림자 한 갈래가 빛 속에서 휙 튀어나왔는데 계속 숨어 다니던 어휘 신장이었다.

이번에는 얼음이 아닌 본체가 나타났다. 어휘의 안색은 조금 창백했지만 얼굴에는 이미 승리의 기쁨이 어렸으며 두 손으로 고드름을 쥐고서 석목의 등 뒤를 찔렀다.

거인으로 변신한 석목은 도망을 칠 수 없었다.

“넌 이제 끝이야!”

어휘 신장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뾰족한 고드름 끝으로 석목의 몸통을 겨누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석목의 등 뒤에서 갑자기 파동이 일렁이더니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어휘 신장은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어서 핏빛 단검이 검은 안개에서 튀어나와 흐릿한 부문을 휘감고는 거침없이 어휘 신장의 가슴께를 찔러 단검이 어휘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어휘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강력한 기운과 보물 갑옷은 마치 무용지물처럼 부서져버렸다!

분신이 손목을 돌리자, 붉은 단검이 어휘의 가슴께를 찌른 채 속살을 비비며 내장을 모두 휘저어 척추까지 한 덩어리로 뭉개버렸다.

갑작스러운 반격인데다가 어휘 신장 스스로도 워낙 급하게 찔러 들어왔기에 그는 미처 대처를 하지 못했다. 어휘는 눈이 흐릿해지며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어찌된 건가?”

“일부러 얼음 거인의 기운을 크게 부풀려 내가 본체라고 착각하게 만들 속셈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다시 긴장을 풀었을 때, 제대로 공격하려던 네 전략은 나쁘지 않았지. 다만 네가 간과한 건 네 상대가 나였다는 거야.”

석목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면서 천천히 말했다.

어휘는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쭈그러든 몸통에서 아무런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어휘의 머리 꼭대기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세 뼘 정도 되는 금색 사람이 나타나 빛을 번쩍이며 먼 곳으로 도망갔다.

석목의 분신이 어휘의 신혼에게 도망갈 기회를 줄 리는 없었으므로 단번에 신혼을 덥석 붙잡았다.

“다치게 하지 마.”

석목이 말했다.

“수혼을 해서 천정이 세운 계획을 엿보려는 속셈이냐? 꿈도 야무지군!”

금색 사람이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몸에 금빛을 번쩍이면서 점점 부풀었다.

석목이 움직이기도 전에 신혼은 ‘펑!’ 터져버렸다.

석목이 한숨을 내뱉고는 손을 흔들어 시체의 오른손에 낀 저장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던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옥도끼 두 자루가 땅에 박혀있었는데 균열이 여기저기 이어져 망가져 버렸다.

“아깝네.”

석목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염호 일족의 옥새 밑에 깔린 철편은 온전하여 석목은 철편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몸을 날려 염호 외족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날아가는 동안 도처에 염호족과 남정족의 시체가 널려있었는데 다들 매우 처참하게 죽은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갈수록 시체는 점점 줄어들었으며 먼 곳에서는 여전히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보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몸을 날려 격전이 펼쳐지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각 정도 지난 후에 석목은 드디어 허물어진 건물 옆에서 안화를 발견했다.

안화는 염호족을 백여 명 정도 거느리면서 남정족과 천정의 침입자들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석목이 안화의 옆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이미……”

석목을 본 안화는 눈빛을 반짝였다.

석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염호족의 옥새를 꺼내 안화에게 넘겼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안화의 눈에는 감격스러움이 가득했으며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옥새를 받아든 다음에 자세를 낮춰 석목에게 절을 하려고 했다.

석목은 다급하게 안화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직 정세를 안정시키지 못했으니 먼저 중요한 일부터 처리해. 다른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

안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동족 여러분! 역적 남정족의 족장이 죽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침범했던 천정의 신장도 죽었죠. 이제 저를 따라 나머지 적들을 전부 해치우고 호왕성의 안정을 되찾읍시다!”

안화가 옥새를 높이 치켜들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염호 일족 백여 명은 그 말을 듣자 힘이 솟구쳐 전부 소리를 지르며 남정족들을 향해 돌진했다.

반면에 남정족은 족장이 죽어버렸으며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천정의 신장마저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자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우르르 몰려드는 염호 일족에게 쫓겨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갔다.

염호 일족은 끝까지 적들을 추격했으며 점점 많은 종족 사람들이 모여들어 힘도 점점 거세졌다. 그러자 침략을 해온 적들을 물리치는 속도에 불이 붙었다.

안화는 성격이 침착하고 지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일몰이 가까워질 때 쯤, 이미 모든 남정족과 천정 놈들을 철저히 짓밟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적 하나까지 격살하고 나서야 염호 일족과 다른 부속 종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변고를 겪고 나니 사람들이 안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달라졌다.

방금 전에 치른 전투에서 안화는 안정된 지휘를 하면서도 앞장서서 공격을 하여 뛰어난 지도자의 역할과 힘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또한 그런 안화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천정과 남정족들을 물리쳐 호왕성이 입을 피해를 최소화했다. 안화가 아니었더라면 외적을 물리쳤다 해도 종족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터였다.

사람들이 안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서 안화의 옆에 있는 석목도 주목을 받았다.

석목이 천정의 신장인 어휘와 격전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절대 이렇게 빨리 마무리되지 못했을 터였다.

석목이 화려하게 전투를 치르는 광경을 바라보며 염호 일족과 부속 종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긴 했으나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막연하게 석목이 염호 일족의 아무개와 친하게 지내는 선배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석목이 지닌 실력의 깊이를 가늠할 겨를이 없었다. 어찌 됐던 아군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다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자세히 보니 석목은 매우 젊어 보였으며 안화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둘은 매우 가까운 사이 같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며 더욱 달라진 시선으로 안화를 바라보았다.

“화야, 이 도우님은 누구시더냐?”

안예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며 안화에게 물었다.

“숙부님, 이분은 석목 도우입니다. 팔황고족 중에 하나인 미천거원 일족의 넷째 장로이며 제 절친한 친구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전부 찬바람을 들이마시며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미천거원 일족이 예전에 무엇을 대표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얼굴에 감사와 경의를 넘은 존경스러운 기색까지 역력했다.

“미천거원 일족의 넷째 장로시라니. 정말 실례했군요! 오늘 석 도우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염호 일족은 아마 멸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이 큰 은혜는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그리고 도우님께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염호 일족은 최선을 다할 겁니다!”

안예가 진지한 얼굴로 손을 굽히며 말했다.

“안예 장로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정 놈들이 저지른 악랄한 행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죠.”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록 천정과 남정 일족을 격파했지만 돌발 상황이 일어났으니 염호 일족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뒷일을 처리하는 게 시급했기에 석목과 염호 일족 사람들은 간단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염호 일족의 대전에선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염호 일족에 남아있는 종족 사람들과 부속 종족들은 전부 대전으로 모였다.

염호 일족에 의탁했던 남정족이 갑자기 배신을 하여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이런 비극을 겪으며 염호 일족은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특히 잔치가 내족에서 열렸기에 내족이 입은 피해가 막중했다. 내족의 족장 안일산과 몇몇 장로들이 전부 죽어버려 성계 강자는 고작 열 명 남짓했다.

상대적으로 외족이 입은 피해는 덜한 편이었다.

게다가 안화가 이번 전투에서 뛰어나게 지휘를 도맡았으며 신경 강자를 격살해버린 미천거원 일족의 장로인 석목이 내족에 있었으니 인원수와 기세만으로도 충분히 내족을 억누를 수 있었다.

내족 사람들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실력이 확연히 뒤처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눈치껏 조용히 있었다.

안화와 안예는 가장 앞쪽에 서 있었으며 석목은 뒷짐을 쥐고는 한쪽에 서 있었다.

“여러분, 외적의 침입을 막으며 우리 염호 일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 염호 일족이 입은 재난이지만, 이 또한 염호 일족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안예가 말을 내뱉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안예가 한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옆에 있는 안화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여러분, 우리 호왕성은 속세를 벗어나 은둔 생활을 하며 바깥 세상에 대해 너무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안화가 돌아와 저에게 외부 상황을 말해주었죠. 지금 천하 성역은 이미 대이변을 겪고 있으며 온 성역에 천정의 그림자가 드리워 이미 강산을 절반이나 잃었답니다.”

안예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종족 사람들은 안색이 전부 어두워졌다.

이들 중에 일부는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설마 그러겠냐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삼대 종족이 알아서 대처하겠거니 가볍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씩씩거리기만 하던 내족 사람들도 얼굴이 많이 어두워졌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이변을 겪으며 느낀 바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염호 일족이 계속 은둔만 하며 세상과 동떨어져 산다면 이번 재난을 어찌어찌 넘겼다고 할지라도 다음번엔 결코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순망치한(*唇亡齿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라는 말은 다들 잘 알 것입니다. 우리 염호 일족이 계속 이렇게 손을 놓고서 가만히 있는 다면 천정이 다시 침입을 해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숨어살지 못해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할 겁니다.”

안예는 심각한 표정을 내비쳤으며 목소리는 우렁찼다.

안예가 그리 말하자 온 대전이 침묵에 빠져버렸다.

이런 대참사를 겪으면서 염호 일족의 마음은 거의 바닥까지 내려앉아 은둔을 고집하던 사람들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사실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천정과 남정 일족이 연합을 하여 천하 성역의 팔황고족 중에 하나로 불리던 염호 일족이 오늘 멸족을 당할 뻔했다. 만약 안화와 석목이 아니었더라면 염호 일족은 오늘부로 영원히 사라졌을 터였다.

이제 종족에 있던 유일한 신경 강자인 안일산마저 운명했는데 안일산은 비록 신경 초기에 불과했지만 염호 일족이 다시금 출세할 수 있던 기반이었다.

안일산이 죽어 염호 일족의 실력은 전반적으로 떨어졌으며 몇몇 중간 규모의 종족들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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