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25화 (725/916)

725화. 족장 선발

“안예 장로님,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얀 수염을 드리운 내족 노인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와 침묵을 깼다.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염호 일족에겐 선택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살고 싶다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죠. 계속 호왕성에 숨어있을 수는 없어요.”

안예는 전혀 개의치 않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대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이 수군거렸는데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던진 질문이 다들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천 년 동안 염호 일족은 세속을 피해 은둔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변화를 시도하자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지금 천정의 공격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다들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죠. 그리고 천봉 일족을 비롯한 삼대 종족이 연합하면 천정과 싸울 수 있다고 믿고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양측의 실력은 엇비슷합니다. 심지어 삼대 종족 연합이 간신히 막아내고 있을 정도에요.

다들 생각해 보세요. 천정의 대군이 호왕성으로 침입하면 우리 염호 일족은 어떻게 대항하겠습니까? 오늘 같은 상황은 우리 모두가 겪은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천정은 아무에게도 살길을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

안화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안화는 이번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염호 일족과 부속 종족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았다. 안화가 입을 열자 망설이던 사람들도 안색이 심각해졌다.

“안예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은 일리가 있어요. 저도 우리 종족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족 장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또 다른 장로가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족 사람들은 전부 입장을 내세우며 안화와 안예를 지지했다.

하지만 내족 사람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리도 안예 장로님과 안화 소주님이 하신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정 놈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었죠. 그러니 우리와 천정 사이에 원한은 이미 맺힌 셈이며 염호 일족이 천정과 대항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부속 종족들은 한참 동안 논의를 하더니 화려한 복식을 입은 노인이 대표로 걸어 나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전(安田) 장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예는 하얀 수염을 드리운 내족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인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또한 별다른 이견은 없습니다.”

내족 중에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가 동의를 한데다가 족장의 신물이 안화의 손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 내족 중에서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전부 무엇이 정확한 결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옛것만 고집하다가는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네! 다들 생각이 일치하니 다행이군요! 오늘부터 우리 염호 일족은 다시 천하 성역으로 나가는 겁니다!”

안화가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전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으며 염호 일족에서 일부 뜻을 품은 사람들은 마음이 후련해져 눈가가 촉촉해졌다. 드디어 한없이 기다리던 이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려야 합니다.”

안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안예 장로님, 무슨 결정 말씀입니까?”

외족 장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 종족의 두 족장님이 앞뒤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소위 용은 머리가 없으면 안 된다고들 하지요. 염호 일족은 중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으니 우리를 이끌어 곤경을 헤쳐 나갈 강력하고 확고한 족장이 필요합니다.”

안예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내족 사람들은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안예가 말하는 족장은 누가 봐도 외족 족장이 아닌 염호 일족의 족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말에는 염호 일족의 내, 외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만약 안일산이 살아있었더라면 내, 외족을 합치는 일을 누구보다 앞서서 추진하려 했을 터였다. 왜냐하면 염호 일족에서 안일산은 유일한 신경 강자였으며 외족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밀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일산과 내족의 여러 장로들이 전부 죽어버리는 바람에 내, 외족을 합친다는 건 내족이 외족에게 먹히는 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족 사람들은 전부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인 안전 장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이미 암묵적으로 내족의 우두머리를 정한 것 같았다.

안전이 이제 막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안예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네요. 저는 안화 소주님을 추천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데다가 실력도 막강하니 가장 적합한 인물인 것 같군요.”

푸른 옷을 입은 장로가 말했다.

“안륙(安陸) 장로님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안화 소주님이 보여준 뛰어난 지혜와 용맹함은 예전 족장님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안화 소주님이 족장을 맡게 되면 다시 우리 종족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화 소주님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사람입니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안화를 바라보았다.

안전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는데 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내족이 정말 외족에게 먹힐 터였다.

안전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싸늘한 시선이 안전의 몸으로 떨어져 안전은 마치 순식간에 얼음 동굴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뼈를 에는 차가움이 안전의 몸에 드리우자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안전은 깜짝 놀라며 간신히 눈알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석목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반짝였다.

그제야 안전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석목이 막강한 실력을 지닌 천정의 신장을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소름이 끼쳐 등골에 식은땀만 줄줄 흘러내렸다.

안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외족에서 석목이라는 고수를 모셔왔으니 내족이 뭐라고 해도 염호 일족이 어찌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안화는 이런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염호 일족에서 그를 족장으로 추천하다니.

안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야, 우리 종족은 지금 재정비를 해야 하니 빨리 족장을 선발해야 한단다. 그런데 너 말고는 마땅한 사람이 없구나.”

안예가 눈빛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안화는 복잡한 얼굴로 한참 침묵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겠어요. 거부하는 건 종족이 처한 국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셈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좋군. 다들 같은 마음이니 오늘부터 안화는 우리 염호 일족의 신임 족장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전부 안화가 내리는 명을 따라야할 겁니다.”

안예가 큰소리로 말했다.

“족장님, 인사 올립니다!”

외족과 부속 종족들이 전부 안화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내족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안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족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안전은 두말없이 안화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내족들도 전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네. 여러분이 이렇게 저를 믿어주시니, 저도 절대 여러분들이 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염호 일족의 부활이라는 중임을 맡은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화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대전에서 환호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족장님,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족장님의 수임 축전을 열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일은 추후에 차차 해결하지요.”

안예는 안화의 숙부였지만 아랫사람으로서 예를 갖추었다.

“좋군요! 이 일은 안전 장로님이 가장 잘 하실 테니 안전 장로님께 맡기겠어요. 앞으로 종족 내부의 일은 안전 장로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화가 안전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네, 족장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안전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안전이 이제 막 자리를 떠나려 하자 안화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안전 장로님, 안일산 숙부님은 우리 염호 일족을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았습니다. 요 몇 년간 염호 일족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숙부님이 세운 공이죠. 천정이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 운명을 하셨으니 우리 젊은이들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안화가 어두워진 얼굴로 깊은 숨을 내뱉었다.

안화는 진심을 가득 담아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자 안전도 마음이 흔들렸으며 내족들도 전부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

“안전 장로님, 우리 염호 일족은 대대로 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 조상께 제사를 지냈죠. 장로님이 숙부님을 위해 동상을 하나 세워주신다면 축전이 열리는 날에 제가 직접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안화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내족 사람들은 전부 놀란 얼굴로 안화를 바라봤으며 외족 사람들 또한 어리둥절했다.

안예가 안화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안전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굽히고는 대전에서 물러갔다.

“안예 장로님, 남정 일족은 천정과 결탁하였으니 그 죄악을 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두머리를 제거했지만 그 족속들에게는 잔당이 남아있겠죠. 당장 사람을 보내 깨끗이 처리하여 일벌백계해야합니다.”

안화는 다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예는 손을 굽히며 답했다.

석목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탄을 자아냈다.

남정 일족의 우두머리는 이미 죽어버려 패잔병들만 남았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염호 일족은 큰 변고를 겪었으며 새로운 족장도 선발했다. 승리의 기운을 빌어 기운을 북돋아줄 필요도 있었으니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뭉치는 건 매우 뛰어난 전술이었다.

게다가 안일산의 악덕도 은혜로 갚는 모습을 보며 안화의 마음 씀씀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석목은 자신이 결국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큰 위로가 되었다.

안화는 이제 막 족장의 자리에 올랐기에 종족 내부에서 처리할 일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회의를 끝마쳤다.

* * *

대전 옆에 자리한 한 편전에서 석목과 안화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염호 일족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전부 공자님의 덕입니다.”

안화가 진지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별일 아니네. 이제 염호 일족의 족장이 되었으니 공자님이라고 부르지 말게. 앞으로 말도 편하게 하고.”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얻게 된 모든 건 모두 공자님 덕분인데……”

안화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목이 끊어버렸다.

“호칭이 뭐가 중요한가? 자네는 염호 일족의 족장이니 족장은 족장으로서 위엄을 지켜야 하지. 염호 일족은 무려 팔황고족 중에 하나였네. 오늘날 많이 쇠퇴해졌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자네에게 달렸네.”

석목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맨날 석두에게 공자님, 공자님이라 부르니 내가 다 불편해 죽겠어.”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서서 재잘거렸다.

“네, 석목 형.”

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호 일족은 재정비를 마치고서 새로운 출발을 결정했군. 내, 외족이 심하게 갈등을 하며 천정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와중에 오늘 정말 똑똑한 결정을 내렸네.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길 바라네.”

석목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 석목 형이 주신 가르침을 잘 새겨듣겠어요. 아, 저는 이미 족장이 되었으니 언제든 황월 고정을 열 수 있어요. 석목 형, 언제 들어가실 계획인가요?”

안화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물었다.

“최대한 빨리.”

석목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으로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네, 족장 수임 축전 후에 바로 들어가죠.”

안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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