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고고한 쌍원(双猿)
석목이 끊임없이 포효하며 눈에 금빛을 드리우자 번천곤이 ‘윙윙’ 바람 소리를 찢어내며 ‘백원왕’을 공격했다.
‘백원왕’은 곤봉을 거꾸로 들고는 사선으로 내리치며 석목을 밀쳐냈다.
탱!
곤봉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둘 사이를 중심으로 주변 허공을 백 리까지 흔들었고, 잔잔한 물결은 계속해서 걷혀갔다.
석목과 ‘백원왕’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하얀색 기운 파동이 둘의 몸에서 흘러나가 끊임없이 사방팔방으로 밀려났다.
석목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전의(戰意)가 끝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짓누르고 있던 곤봉을 휙 돌려 곤봉 끝으로 백원왕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러자 ‘백원왕’은 두 손으로 곤봉을 꽉 쥐고는 곤봉을 가로로 치켜 올려 아래로 짓누르더니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백원왕’은 몸을 날려 석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석목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서 오히려 하늘로 날아올라 ‘백원왕’의 그림자와 얽히고설키면서 화려한 전투를 펼쳤다.
탱, 탱, 탱!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허공이 금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두터운 구름이 두 가지 색 화염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적금색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다시 흩어졌다.
흩날리는 곤봉 그림자들이 층층이 겹치며 공간을 촘촘하게 메워 구름이 타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늘마저 틈이 벌어졌다.
땅이 멈출 새도 없이 흔들리자 수많은 암석들이 쏟아져 내려 나무들을 묻어버렸으며 심지어 폭포의 쏟아지는 각도마저 일그러졌다.
* * *
비경 밖.
대장로는 같은 자리에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검은 비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둘째 장로 백장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선 석실 안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간간이 고개를 돌려 검은 비석을 바라봤다가 다시 대장로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석목이 비경에 들어간 지 한참이나 되었기에 둘은 안색이 매우 심각했다.
이때, ‘쩍!’ 소리와 함께 검은 비석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자 채아가 난리법석을 떨었다.
“빨리, 빨리. 비석이 부서지려 해!”
채아가 하는 말을 듣자 둘째 장로는 다급하게 앞으로 다가가 비석에 갈라진 균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석두가 왜 아직도 안 나와?”
채아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비경에 변고가 생긴 것 같군. 공간이 무너지려나?”
대장로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석두가 아직 안에 있잖아.”
그 말을 듣자 채아가 조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비경을 출입할 수 있는 열쇠는 석목이 가지고 있는 철원령 뿐이야.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
백장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가만히 있어?”
채아가 또 소리를 질렀다.
“놀랄 필요 없지. 석목을 믿어보자.”
대장로님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더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채아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때, 비경 속은 이미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맑게 갰던 하늘은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까맣게 드리운 천막에는 균열만이 가득했다.
무너지고 부서진 땅과 암석들은 강풍에 휘말려 모래 바람이 되어 흩날렸으며 비경 속에서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이 혼잡한 어둠 가운데는 석목과 ‘백원왕’이 있었다.
미천거원의 몸으로 번천곤을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많은 진기와 육신의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전투가 오랫동안 이어지자 석목은 계속 거친 숨만 몰아쉬었으며 뒷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석목은 두 눈이 여전히 맑게 빛났으며 흥분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석목이 다시 번천곤을 휘두르며 발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자 몸이 마치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곤봉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오르며 종횡으로 수많은 잔영을 그렸다.
흑, 백, 청, 황, 금, 적 여섯 갈래 빛이 동시에 나타나 마치 채색 태양처럼 석목을 안으로 묻혀버렸다.
쾅!
혼란한 천막을 찢어버릴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자 길이가 백 장이나 되는 검은 번개 여러 갈래가 동시에 허공에서 쏟아졌다. 그 모습은 마치 꿈틀거리는 교룡과도 같았으며 기세와 형태가 공포 그 자체였다.
검은 번개 교룡 속에서 여섯 갈래 채색 곤봉 그림자가 층층이 겹쳐져 일제히 ‘백원왕’에게로 향했다.
‘백원왕’이 있는 곳에도 이미 번개가 번쩍이며 광풍이 휘몰아쳐 그 기세는 조금도 석목에게 밀리지 않았다.
금색 곤봉이 수백 갈래 잔영을 그리며 마치 커다란 금색 깃발처럼 쏟아져 석목이 날린 번천곤과 부딪치려는 순간, 다시 합쳐졌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며 비경 속 천지가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대략 세 식을 주고받을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비경 속에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바람마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짧은 고요함이 지난 후에 천지를 휘몰아치는 진동이 미친 듯이 몰아쳤다.
바람이 휘말리더니 구름이 흩어졌으며 산들마저 무너져 땅이 갈라졌다.
산과 돌, 땅과 나무가 연달아 터지며 피어오른 연기와 흙먼지가 흩어졌다. 타오르던 불길도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는데 마치 쏟아지는 별똥별 같았다.
불비가 하늘에서 흩날리자 ‘백원왕’의 거대한 몸집에서 금빛이 되감겼으며 금빛 속에 부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가 반딧불처럼 점이 되어 흩어졌다.
텅텅 비어있던 두 눈은 단 한 순간이었지만 생기를 띠며 맑은 빛을 반짝였다.
석목은 ‘백원왕’의 거대한 몸집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는데 감격스러운 마음일 터였다.
이어서 석목은 흑백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라 화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석목은 이미 인족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불안정 했으며 날아가는 동작도 매끄럽지 못해 몇 번이나 화염에 맞을 뻔했다.
온 비경은 이미 혼돈스럽고 질서가 없는 상태에 놓였으며 쏟아지는 폭포가 자리한 산봉우리만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석목은 영력을 보충할 새도 없이 흑백 날개를 펄럭이며 쏟아지는 불덩이 속을 가로질러 심하게 기울어진 폭포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때, ‘백원왕’의 모습은 이미 흩어져버렸으며 투명한 빛만 흩날리더니 이내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또한 어둠의 천막에서 쏟아지던 번개도 조금씩 사라졌고, 끊이지 않고서 내릴 것만 같던 불비도 점차 줄어들었다.
기승부리던 광풍도 멈춰버렸으며 흩날리던 모래도 가라앉더니 하늘에 검게 찢어졌던 균열도 다시 붙어버렸다.
비경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비경 밖에 자리한 검은 비석에서 길게 뻗어 나가던 균열 또한 멈추었다. 그리고 빛을 반짝이며 매우 느린 속도로 돌아왔다.
비경 속은 매우 고요했다.
석목이 폭포를 뚫고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 비경에 왔을 때와 똑같은 광경이라 마치 폭포 밖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동굴 속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 조용했다.
석목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석대 위에는 금색 상자가 여전히 묵직하게 놓여있었으며 겉면에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석목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허공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금색과 하얀색이 섞인 반투명한 허영이 나타났다.
석목이 손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선조님께 인사 올립니다!”
백원왕이 미소를 지으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미 혈맥을 각성했군.”
“운이 좋았죠.”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시험을 통과했으니 안에 남은 보물들을 전부 가져가거라.”
백원왕이 손을 흔들자 금색 상자가 천천히 열렸다.
석목은 숨을 멈춘 채 상자가 완전히 열릴 때 까지 기다렸는데 상자 속엔 크기가 비슷한 옥합이 세 개 들어있었으며 각각 녹색, 파란색, 붉은색 옥합이었다.
석목이 의아한 눈빛을 백원왕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전부 네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전부 가져가거라.”
백원왕이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갑 세 개를 전부 가져왔다.
“녹색 옥합은 지금 딱 필요한 보물일 게다.”
백원왕이 말했다.
석목은 백원왕이 말한 대로 녹색 옥합을 꺼내 천천히 열어보았다. 그러자 푸른빛이 반짝이는 과일에서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다시 옥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옥합엔 푸른 과일이 여덟 알 들어있었으며 아이의 주먹만 한 과일들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이 빛은 마치 들끓는 안개처럼 옥합에서 흘러나와 허공에서 떠다녔다.
과일에서 풍기는 향을 맡은 석목은 정신이 희미해져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시 옥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일들은 여덟 개가 놓인 게 아니라 정확히 일곱 개 반이 놓여있었다.
여덟 번째 과일에 한 입을 깨문 자국이 남아 과일은 정확힌 삼분의 이 정도만 남아있었다.
석목이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선조님, 이건 무슨 과일인가요?”
“이건 월신과(月神果)라는 과일이란다. 신경에 진입할 때 큰 도움이 될 테지.”
백원왕이 말했다.
“이게 바로 삼천천지대도(三千天地大道) 중에 하나로 불리는 월신과군요! 성계 정상이 단 한 알만 먹어도 도를 깨우쳐 신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석목은 희색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월신과를 잘 알고 있었다.
미양 성역의 삼대 성지가 한껏 힘들여 창월 비경을 탐색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월신과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백원왕은 어째서 이 과일을 이토록 많이 지녔나? 그것도 일곱 개 반씩이 있다니?
“후후, 그렇게 신기한 과일은 아니란다. 월신과는 신경에 진입할 수 있는 확률을 높여줄 뿐이지. 단 한 알로 신경에 들어설 수 있게 하는 물건은 이 계(界)에는 존재하지 않아. 진정 강제로 신경에 진입할 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건 좋지 않을 게다.”
백원왕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단지 확률을 높여줄 뿐이라고요?”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 이 온전한 월신과 일곱 개를 삼키면 네가 화신(化神)의 도를 깨우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게다.”
백원왕이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손을 뻗어 월신과를 한 알 집었다.
“선조님, 이 월신과는 어떤 효험을 지녔나요? 몸속에 흐르는 진기와 배합해야 합니까?”
석목은 곧바로 삼키지 않고서 물었다.
“무슨 효험이 있는지는 먹어보면 알 게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망설이지 않고서 과일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과일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으며 시원한 기류가 빠르게 석목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어서 석목은 눈앞이 흐려져 마치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석목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신식의 힘으로 의식을 지키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희미한 느낌이 워낙 강렬했기에 정신력으로 통제하기 힘들어 단 몇 번 호흡을 하는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석목이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은 온통 파랬으며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석목은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석목은 반투명 상태가 되어 허공에 떠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넓은 바다 옆으로 허름한 통나무집이 몇 개 지어져 있었다.
여긴 작은 어촌 마을 같았다.
정오라 마을 사람들이 각자 일을 하느라 바삐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매우 낡았으며 오랫동안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검게 탄 피부에 붉은빛이 돌았다.
이때, 마을이 시끌벅적해졌으며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마차가 마을 입구에서 빠르게 다가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낡은 통나무집 밖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모였지만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려한 마차와 통나무집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여기까지 지켜본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이 어촌 마을은 너무나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외진 마을은 석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으며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전부 석목의 이웃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도 허공에 서 있는 석목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