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화. 어촌 마을의 소년
석목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미천거원 일족의 비경에 있어야할 텐데 왜 갑자기 어촌 마을에 나타났을까?
“월신과를 삼켜서 어떤 환경 속에 들어온 걸까?”
석목이 속으로 생각했다.
“…… 어르신께서 앓는 병이 위중해 어쩌면 이번엔 더는 버티기 힘들지도 몰라요. 하여 부인께서 이 노인네를 보내 석목 도련님을 모시고 오라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젠 정말 어르신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이때, 거친 목소리가 통나무집에서 흘러나왔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날려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광경이 당황스럽긴 했으나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통나무집에서 두 그림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는데 한 명은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었으며 또 한 명은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짙은 눈썹에 큰 눈이 돋보였으며 회색 옷을 입고 있어 강건한 근육도 어렴풋이 보였다.
“내…… 내가 옛날로 돌아온 건가……”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열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년은 바로 어린 석목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과 소년 석목은 마치 허공에 떠있는 석목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듯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년 석목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그 오랜 세월 내내 어머니를 방치하시더니 이제와 저를 아들로 인정하려 하신다고요?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과 금씨 가문으로 가지 않을 겁니다.”
“허! 아무래도 석목 도련님께서 어르신을 오해하시는 것 같군요. 어르신이 몇 년간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건 사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한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어요.”
석목은 싸늘하게 노인이 하는 말을 끊어버렸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아래에 있던 소년 석목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석목은 소년 석목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분노, 슬픔, 원망과 같은 정서가 끊임없이 석목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몹시 불편했다.
“왜 이러는 걸까?”
석목은 신혼의 힘으로 빠르게 정서 때문에 이는 파동을 짓눌렀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월신과는 왜 이런 환경을 만들었을까? 왜 예전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과거에 겪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하는 걸까? 혹시 이게 월신과가 지닌 효능인가?
석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흔들었다.
소년 석목과 노인이 나누는 대화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석목은 정신이 팔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놓쳐버렸다.
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소년 석목이 흘려보내는 원한의 감정은 이미 절반 정도 줄어들었다.
“석목 도련님, 도련님과 어르신 사이에 얽힌 일에 대해 이 노인네가 아는 게 많지 않아 뭐라고 더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지요. 다만 지금 어르신은 병세가 악화되어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소년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을 지켰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의문이 들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당시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도련님의 어머님도 아마 어르신과 마지막으로 만나길 원하실 거예요.”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소년 석목은 고개를 번쩍 들며 눈에서 불빛을 반짝였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의 눈빛은 물처럼 평온했는데 소년 석목에게 일말의 악의도 품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년 석목은 눈에서 빛이 점점 사라지더니 천천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허공에 서 있는 석목은 소년 석목이 하는 고민과 망설임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소년 석목은 입을 꾹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흘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도련님께서는 그때 다시 답변을 주십시오.”
노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가려고 했다.
“잠시만.”
소년 석목이 벌떡 일어섰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은 돌아서서 질문을 하는듯한 눈빛을 보냈다.
“함께 금씨 가문으로 가겠습니다.”
소년 석목이 말했다.
“네! 어르신이 석목 도련님을 보게 되신다면 매우 기뻐할 거예요.”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은 기뻐하며 다급하게 집에서 걸어 나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검은 옷을 입은 기사가 먼 곳에 세워두었던 마차를 끌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소년 석목은 노인을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구경을 하러 왔던 어촌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통나무집을 한번 쳐다보고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날렵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명을 내리자 기사들이 마차를 빼곡히 둘러싼 채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서 어촌 마을을 떠나 큰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전에 펼쳐진 광경을 떠올리자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석목이 겪었던 경험과 달랐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날려 어촌 마을을 벗어난 마차를 따라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는 푸른 옷을 입은 노인과 소년 석목 단 둘만 있었다.
소년 석목은 마차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평온한 표정을 보니 잠이든 것 같았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소년 석목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마차가 가볍게 흔들리며 계속 앞으로 달렸다.
* * *
마차는 멈추지 않고 달렸으며 족히 한 달이나 달려서야 몇몇 성시를 지나 드디어 풍성에 도착했다.
성시에 들어 왔지만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성시 안쪽에 자리한 한 정원 앞에서 멈춰 섰다.
석목은 마차 안에서 날아 나와 허공으로 올라간 후에 정원 안을 내다보았다.
이 드넓은 저택은 전부 금씨 가문이 머무는 부저였으며 눈앞에 보이는 작은 정원은 비교적 외진 곳에 있었다.
“석목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노인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소년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서 내려왔다.
금씨 가문에는 미리 언질을 주었는지 정원 밖에 몇몇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금색 옷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관사 같아 보였다.
“금 형, 어르신은 지금 어떠신가?”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다가와 물었다.
“병세가 그리 좋지 않아요. 마지막 남은 진기 한 줄기로 간신히 버티고 계셔요. 아마…… 오래 못 버티실 것 같습니다. 다행히 빨리 오셨네요.”
관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이 분이……”
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데리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 석목은 소매 속에 숨긴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으며 동공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도 천천히 따라가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세 사람은 두 정원을 지나 깨끗하고 운치 있는 정원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짙은 약냄새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다.
“석목 도련님, 어르신은 안에 계십니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소년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관사와 노인은 따라가지 않았다.
대청에 들어온 석목은 고개를 돌려 침실을 바라보았다. 침실에 놓인 침상에는 중년 남자가 누워있었으며 단아하게 생긴 부인 한 명이 중년 남자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단아한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소년 석목을 바라보았는데 그 부인은 진 이모였다.
“네가 석목이니?”
진 이모는 석목을 훑어보며 물었다.
소년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침상에 누운 중년 남자는 그 말을 듣고는 떨리는 몸을 일으켜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깜짝 놀라 침상에 누운 사람을 바라보았다.
중년 남자는 얼굴이 매우 수척했으며 볼이 움푹 파인 채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는데 노랗게 질린 눈망울에만 한 줄기 생기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소년 석목을 보자 눈망울이 어렴풋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목아……”
중년 남자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힘겹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진 이모는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방에서 걸어 나와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소년 석목의 눈에는 복잡한 기색이 어렸으며 잠깐 망설이더니 앞으로 다가갔다.
소년 석목을 본 중년 남자의 눈에서 다시 한번 빛이 반짝였다.
“너는 나를 닮지 않고, 네 어머니를 닮았구나.”
중년 남자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입에 올리자 소년 석목은 몸이 굳어버렸으며 눈에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중년 남자가 처한 처지를 떠올리고는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목아, 묻고 싶은 게 있거든 편히 묻거라. 망설일 필요 없단다.”
중년 남자는 소년 석목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왜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셨나요?”
소년 석목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중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애초에 그 어촌 마을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단다. 심지어 대제국의 사람도 아니었지. 어렸을 때 대제와 대염국이 맞닿은 작은 산골 마을에서 살았단다. 어릴 때부터 무도를 좋아하여 강인한 무인이 되기를 원했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산골 마을을 떠나 밖에서 떠돌아다니며……”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이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출신에 관하여 물었을 때, 어머니는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중년 남자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잠깐 멈추었는데 숨을 쉬기 버거운지 말하는 것조차 매우 힘겨워 보였다.
소년 석목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를 파르르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도의 길을 걷기 위해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단다. 그리고 수많은 고배를 마셨지만 수확을 많이 거두었지…… 내 자질도 뒤처지는 편이 아니니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선천 경계에 올랐단다.”
중년 남자는 잠깐 휴식을 취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남자가 뱉는 말엔 힘이 없었지만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소년 석목과 허공에 떠 있는 석목은 모두 놀라운 기색을 드러냈다.
“젊은 나이에 선천 경지에 도달했으니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지. 그리하여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선천 고수 한 명과 작은 갈등을 빚어 싸움을 벌였단다. 내 실력이 상대보다 조금 뛰어났기에 상대를 죽여 버릴 수 있었지.
하지만 상대의 숨이 넘어가던 마지막 순간에 그 녀석이 혼신의 반격을 해서 나는 큰 부상을 당해 바다에 빠져버렸단다. 그리고 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작은 어촌 마을로 떠밀려갔고, 네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서 구해서 마을로 데려갔단다.”
중년 남자가 바라보는 눈빛은 온화했다.
순간, 남자는 안색이 바뀌더니 가슴을 굽혀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소년 석목은 안색이 변하여 참지 못하고서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빛을 반짝이며 진 이모와 푸른 옷을 입은 노인과 관사 세 명이 동시에 문 앞에 나타났다.
“석랑(石郎)은 지금 아들과 단 둘이 있고 싶어 하네.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진 이모가 매우 안쓰러워하면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하지만……”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다. 조금 전에 청령단을 먹였으니 당분간은 별 일 없을 게야.”
진 이모가 말했다.
이때, 방에서 들려오던 기침 소리도 차차 줄어들었다.
밖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가볍게 숨을 뱉어냈다.
진 이모가 손을 흔들자 세 관사는 그 자리에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