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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32화 (732/916)

732화. 낯선 자신

중년 남자는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평정을 되찾았으며 얼굴에 붉은빛도 살짝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드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소년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야 하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기회가 없을 거야.”

중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보다 상태가 좋아보였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이건 회광반조(*回光返照: 해가 지기 직전에 잠깐 하늘이 밝아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 어머니는 세심하게 나를 보살펴줬단다. 나는 단 한 번도 네 어머니 같이 부드러운 여인을 본 적이 없었지. 네 어머니는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졌고, 혼인을 맺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 태어났지. 그 시절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란다.”

중년 남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으며 눈빛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왜 떠나신 건가요?”

소년 석목은 참지 못하고는 말을 하는 와중에 끼어들었다.

“온전한 가정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내 맘속에는 응어리처럼 자리 잡은 일이 있었단다.”

중년 남자는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큰 부상을 당한 뒤로 결국 다 나았지만 내 수련 경지는 후천 경지까지 떨어졌단다. 물론 너희 모자와 함께하는 나날은 내게 만족감을 주었지만 나는 계속 선천 경지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 생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그리하여 네가 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참지 못하고서 어촌 마을을 떠나야겠다고 말했단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허공에 있던 석목의 눈은 매우 복잡했다.

그해에 어버지가 고향을 떠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린 선택을 두고서 석목은 일말의 불만이나 원망을 품지 않았다. 같은 무인으로서 석목은 힘이 주는 유혹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 석목은 입가를 파르르 떨었으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실력으로 돌아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계속 방법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지. 그 뒤로 우연한 기회를 맞아 풍성의 금씨 가문에 오게 되었고 여기서 월진(月珍)을 만났단다. 나와 월진이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지. 오래 전에 나는 우연한 계기로 월진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단다.

월진은 선천 경지에 들어설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경지를 되찾도록 도와주느라 그녀는 그 기회를 포기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실력을 회복하지 못했단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며 나는 금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단다.”

중년 남자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소년 석목은 묵묵히 서 있었으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석목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와 소년인 자신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소년의 기분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는데 다양한 정서가 휘몰아치고 있었었으며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나는 무도의 길을 걷기 위해 너와 네 어머니를 냉철하게 버렸단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을 품었으니 나쁜 사람이지. 너와 이런 말을 하는 건 납득을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바라는 것도 아니란다. 내가 죽기 전에 이렇게 너를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아주 만족한단다……”

중년 남자의 안색은 점점 초췌해졌으며 말을 하는 게 다시 힘겨워졌다.

“이제…… 그만 하세요.”

소년 석목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중년 남자의 눈에서 흡족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으며 남자는 침상 옆에 놓인 궤를 바라보았다.

“저 궤를 열거라. 그리고 그 속에 든 물건을 꺼내거라……”

중년 남자가 말했다.

소년 석목은 망설이더니 천천히 걸어가 궤를 열어 하얀색 편지 봉투를 꺼냈다.

“그건 개원무원의 입문 추천서란다…… 내가 너에게 주는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하거라…… 꼭 열심히 수련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마……”

중년 남자가 내는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석랑……”

이때, 진 이모가 눈물을 흘리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진 이모의 옆에는 석목보다 조금 어린 계집애가 서 있었는데 그 아이는 석옥환이었다.

“월진…… 이번 생에 네게 너무 많은 빚을 졌군. 목이와 옥환이는 앞으로…… 네게 부탁할게……”

중년 남자는 진 이모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진 이모의 볼을 매만지려했다.

하지만 미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석랑……”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년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볼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석목은 허공에 서서 아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돌아섰는데 석목의 눈에서도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어서 석목은 몸을 날려 지붕을 뚫고는 밖으로 나왔다.

* * *

석목은 허공에 서서 먼 하늘을 한참 내다보다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기분을 가라앉혔다.

석목은 가볍게 가슴을 매만졌는데 텅텅 비어있던 곳이 메꾸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해에 석목은 고집과 분노 때문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사실 이 일은 석목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한이 되어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나니 드디어 그 아쉬움이 사라진 것 같았다.

석목은 눈앞에 펼치진 세계를 둘러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혹시 이것이야말로 월신과가 이 환경을 만들어낸 의도이지 않을까?

이 환경에 들어온 지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석목은 처음에 호기심이 들었다가 소년 석목이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을 겪은 후로는 이제 조금 지루해졌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썼지만 여전히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석목은 소년 석목과도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없었는데 대략 백 장 정도 떨어지면 형태가 없는 힘에 이끌려 다시 소년 석목의 곁으로 끌려갔다.

석목은 이 힘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보아하니 이 환경 속에서는 계속 소년인 자신을 따라 다녀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따라 다니지, 뭐.”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정원으로 내려왔다.

* * *

사흘 뒤에 금씨 가문은 석부의 장례를 치렀다.

석부는 그동안 금씨 가문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금씨 가문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전부 장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석목이 관찰해보니 찾아온 이들이 모두 좋은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었으며 적잖은 사람들이 석부가 남긴 유산을 탐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금월진은 모든 사람들이 내놓는 의견을 무시하고서 남겨진 유산을 전부 소년 석목에게 물려주었다. 그러자 소년 석목은 처음 보는 진 이모에게 품었던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 * *

석 달 뒤.

풍성 교외에 자리한 한 정원에서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연무대에서 소년 석목이 햇볕을 받으며 푸른색 도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소년 석목의 주변에서 하얀 도영이 흩날리며 삼엄하고도 차가운 기운과 바람 소리를 일으켰다.

순간, 소년 석목이 실눈을 뜨며 차가운 빛을 두 갈래 날렸다. 그리고 옆에 선 허수아비 몇 구를 잘라냈는데 도의 기운은 두 배 정도 강력해졌으며 찬란한 도에서 빛이 반짝였다.

쓱, 쓱!

한 줄로 선 허수아비들의 머리 여섯 개가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라 한쪽으로 떨어졌다.

“일식륙참(壹息六斬)! 석 오라버니, 질풍분뢰도법(疾風奔雷刀法)이 소성에 이르렀네요!”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석목의 옆에 나타나 손뼉을 치며 말했다.

소년 석목은 도를 거두어들이고는 맑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는데 얼굴에 찬란한 미소가 가득했다.

“옥환,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오라버니를 보러왔지요. 반 년 뒤면 개원무원 모집 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절대 떨어지면 안돼요.”

석옥환이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소년 석목이 자신 있게 웃었다.

석 달간 진 이모는 석목에게 귀한 연체 약제를 주었다. 그리고 무도 고수를 모셔다 석목을 수련시켰으며 소년 석목은 이미 쉬체 여덟 번째 단계 정상에 도달했다.

이제 반년만 더 지나면 소년 석목은 쉬체를 열 번째 단계까지 수련할 터였으며 그렇게 되면 개원무원에 들어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그렇다면 우리, 대결해보죠!”

석옥환이 눈썹을 치켜뜨며 손을 굽혀 푸른빛을 날리자 장검 하나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석옥환은 검광을 반짝이며 빠른 속도로 석목을 향해 날아왔으며 허공에 하얀 선을 그렸다.

소년 석목은 차분한 표정으로 도를 휘둘러 받아내며 대결을 펼쳤다.

허공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석목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 * *

반년 뒤.

개원무원 안에 자리한 푸른 석대에서 두 사람이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둘이 빠른 속도로 현란한 잔영을 한가득 그리자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 중 한 명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년 석목이었다.

소년 석목은 장도를 들고서 도광을 줄줄이 만들었는데 그건 바로 질풍분뢰도법이었다. 하지만 위력은 반 년 전 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도광은 몸 앞 몇 장 정도까지 드리웠는데 마치 하얀 번개와도 같았다.

소년 석목의 상대는 수수해 보이는 얼굴이 각진 청년이었다. 청년은 개원무원의 복식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 장검을 들고는 검법을 하나 시전했다.

이 검법은 보슬비처럼 부드러웠는데 검광은 몸과 세 치 이상을 떨어지지 않아서 보기에 매우 느릿느릿해 보였지만 소년 석목이 쓰는 도법을 전부 가볍게 받아냈다.

석대 근처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으며 전부 열 살 언저리인 소년들이었다. 석옥환도 그 사이에 서서 긴장한 눈으로 석대 위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석대 한편에는 개원무원의 복식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석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년 석목은 한참을 공격해도 효과가 없는 걸 보고는 조급해졌다.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소리 지르자 팔이 희미해지더니 하얀 도영 여덟 갈래가 나타나 앞에 있는 청년을 베었다.

“음! 일식팔참!”

눈이 얇고 길며 옅은 수염이 자라난 중년 남자가 석대 아래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또 다른 몇몇 중년 남자들도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대 위에 선 얼굴이 각진 청년의 눈에서도 의문스런 빛이 스치더니 그는 손목을 꺾으며 장검으로 검영을 여덟 갈래 만들어 공격을 받아쳤다.

쾅! 쾅! 쾅!

묵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며 도영과 검영이 동시에 흩어졌다.

소년 석목은 몸통이 크게 흔들려 뒤로 ‘쿵, 쿵!’ 밀려났다가 멈춰 섰다.

하지만 청년은 묵직하게 서 있었으며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때앵!

쟁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둘은 동시에 동작을 거두고는 뒤로 물러나 바른 자세로 섰다.

소년 석목이 긴장한 얼굴로 석대 아래에 선 몇몇 중년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시험 통과.”

중년 남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큰소리로 말했다.

소년 석목은 웃음을 드러냈으며 아래에 서 있던 석옥환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석목은 굵은 돌기둥 앞에 서서 조용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목은 익숙했던 자신이 점점 낯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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