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33화 (733/916)

733화. 흑풍맹의 사악

십 년 뒤.

대제국 경성에 무겁고 검은 갑옷을 입은 무사 한 무리가 검은색 군마를 타고서 거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이 사람들은 표정이 용맹하고, 눈빛은 냉엄했으며 모두 오랫동안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던 호걸들이었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검은 용 모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이 반이나 가려져 있어 용모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청년 같았다.

청년은 허리춤에 칠흑 같은 마룡 전도를 차고 있었는데 평범한 전도보다 배나 길었으며 칼집도 용 모양이었다. 그는 아직 칼을 칼집에서 뽑아내지도 않았는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흑룡위다!”

“이번에 경성에서 나간 이유가 기련산(祁連山)을 들쑤시는 날강도 패거리인 흑풍맹(黑風盟)을 없애기 위해서라던데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모양이야!”

“그럼. 흑룡위의 대장은 우리 대제국에서도 가장 젊은 호국 무사인 ‘마룡도’ 석목 어르신이잖소. 황제께서 봉하신 일급 장군인데 고작 흑풍맹이 상대가 되겠나?”

주변에서는 분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전부 앞에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청년을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온통 존경과 동경을 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청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말을 타고서 앞으로 가고 있었다.

잠시 후에 흑룡위는 한 부저 밖에서 멈추었는데 부저에는 편액이 하나 걸려있었으며 ‘석부(石府)’라는 두 글자가 크게 새겨져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청년은 말에서 내려와 철모를 벗어 단단한 얼굴이 드러났는데 바로 석목이었다.

“우용(于勇), 흑룡위를 데리고 집결지로 가거라. 병부에도 네가 가서 보고를 올리고.”

청년 석목은 옆에 있던 민머리 남자를 향해 말했다.

“네, 어르신.”

민머리 남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석목은 걸음을 옮겨 부저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편청으로 가서 갑옷을 벗고는 품이 넓은 도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에 내당으로 걸어갔다.

“여보!”

푸른 옷을 입은 가냘픈 사람이 청년 석목의 품속으로 달려갔다.

청년 석목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려 달려오는 여인을 와락 안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부저에 있던 사람들은 알아서 물러났다.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으며 미간 사이에 여인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재기가 넘쳤다.

“환한 대낮에 너무 붙어 있는 게 아닙니까? 자아(紫兒) 언니, 언니는 조정에서 임명한 고명 부인이에요. 예의에 맞게 행동하셔야지요. 남사스러워서 정말.”

어딘가에서 놀리는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편청에서 걸어 나왔는데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외모도 어여쁜 이 여인은 석옥환이었다.

“옥환, 왔구나.”

석목은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을 내려놓고는 석옥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군?”

석옥환은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화난 척을 하며 말했다.

“제가 감히요. 현무종의 내문 제자이신데 우리 황제께서도 굽신굽신 할 판에 저 같은 일개 장군이 어찌 감히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석옥환은 석목을 향해 눈을 흘겼다.

“둘이 입씨름은 그만해. 여보, 오느라 힘들었죠? 따뜻한 물을 내오라고 할게요. 목욕하면 피곤이 풀릴 거예요.”

자아가 부드럽게 말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석목은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 현무종에 있었잖아? 왜 경성에 온 거야?”

석목이 앉으며 동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 종문의 임무를 받아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석옥환이 앉으며 씩 웃었다.

“음, 수련 경지가 많이 올라갔군. 이미 후천 정상에 이르렀어. 보아하니 곧 기부를 열어서 선천에 오르겠는 걸? 역시 현무종은 자원이 풍부한가 보네.”

석목은 여동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오라버니, 지금 날 놀리는 거예요? 오라버니가 금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는 제 실력이 더 뛰어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려 한 경지나 뒤떨어지고 있다고요.”

옥환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내가 선천에 진입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던 탓이야. 하지만 그동안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경지가 계속 제자리구나. 너는 언젠가는 나를 뛰어넘겠지.”

석목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자원이 부족해 수련 경지가 머물러 있는 거예요. 현무종에 들어오게 되면 오라버니가 갖춘 실력으로는 언젠가 장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종문의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도 있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전설 속에서만 듣던 지계 경지까지 갈 수도 있겠지요.”

석옥환이 말했다.

“지계? 지계는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냐.”

석목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갖춘 자질로 종문에 들어오게 되면 충분히 실력을 발휘 할 수 있을 텐데, 왜 평범한 세상에서 일개 조정의 장군이나 하고 있나요?”

석옥환이 담담하게 말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지. 내게는 자아가 있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잖니?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것도 행복한 거야. 종문에 들어가면 힘은 생기겠지만 목숨 또한 내 게 아니게 되지. 그렇다면 행복을 논할 수도 없겠지.”

석목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진부해!”

석옥환은 석목이 하는 말을 듣자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그리하여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서서 콧방귀를 뀌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짓더니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입 안 가득 번졌다.

대청 구석에서는 투명한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일평생 평안함만 추구한다면 과연 행복할까?”

그림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석옥환은 석부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그날부로 떠났다.

* * *

저녁.

석목과 자아는 얇은 잠옷을 입은 채 침상에서 서로를 껴안고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 명을 받고서 흑풍맹을 잡으러 갔었는데 순조로웠나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자아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부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주 순조로웠네. 흑풍맹의 세 맹주를 격살하고, 다른 유명한 도적놈들도 잡았지. 나머지 몇몇은 도망을 갔는데 큰 문제가 될 건 없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세 맹주요? 흑풍맹에는 명주가 네 명이라 들었는데 그래서 기련사악(祁連四惡)이라 불리잖아요. 어째서 한 명이 줄었어요?”

자아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자아는 청주의 한 무림 집안에서 태어나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악, 이악, 삼악 세 놈은 죽였는데 한 놈은 그곳에 없었소. 하지만 조정에서 이미 체포 문서를 뿌렸으니 잡히는 건 시간문제요.”

석목이 말했다.

자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할 말이 있어요.”

자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무슨 일?”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아기가 생겼어요.”

자아가 부끄러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석목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시 되물었다.

“당신의 아기를 가졌다고요.”

자아가 다시 말했다.

“정말? 언제?”

석목이 벌떡 일어나서 앉더니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물었다.

“바로 며칠 전이에요. 자꾸 속이 안 좋아서 의원을 찾아가 봤더니 희맥(喜脈)이라고 했어요.”

자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했어, 잘했어.”

석목은 너무나 흥분하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아를 꽉 껴안았다.

석목이 좋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련을 하는 건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라 수련의 길에 들어선다면 자식을 갖기 어려우며 수련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러했다.

자아도 석목을 안았는데 둘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오. 우리 내일 곧바로 성시 밖에 있는 천왕묘에 가서 예불을 드려야겠소.”

석목이 말했다.

자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밤은 조용히 깊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석목은 자아를 데리고 가벼운 몸으로 성시 밖에 자리한 비예산(比睿山)으로 갔다.

비예산은 경성 밖에 솟은 명산이었는데 많은 절들이 있었다. 절들마다 향을 왕성하게 피워 평범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경성의 귀족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천왕묘는 비예산에서 가장 큰 절이라 이른 아침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향을 올리러 왔으며 시끌벅적하게 줄을 서서는 무릎을 꿇고서 예불을 올렸다.

대전 안팎에는 사람들이 수천 명 있었으며 향냄새가 그윽했다.

석목과 자아도 사람들을 따라 대전으로 들어와서는 무릎을 꿇으며 평안과 행복을 빌었다.

예불을 드린 후에 둘은 붐비는 대전에서 나와 비예산에서 산책을 했다.

아직 초여름이라 나무 그늘이 드리웠으며 산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기분이 상쾌했다.

둘은 천천히 걸어 뒷산까지 걸어갔는데 시야가 확 터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근처는 외진 곳이라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걸으니 ‘솨아!’ 물소리가 들렸다. 한 갈래 폭포가 산골짜기에 걸려있었는데 물안개가 자욱하니 매우 아름다웠다.

“자아, 오래 걸어서 목이 마르지? 수질이 꽤 좋아 보이는데 조금 떠다 주겠소.”

석목이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네.”

자아가 미소를 지었다.

석목은 늘 들고 다니는 물주머니를 들고 빠르게 폭포로 다가가 시원한 물을 담고 돌아오려 했다.

이때, 폭포가 갑자기 부서지며 하얀 칼날이 날아 나와 석목의 허리를 찌르려했다.

습격한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으며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르고 있었는데 사납게 생긴 두 눈만 내놓고 있었다.

석목은 깜짝 놀라며 땅을 짚었고, 이때 발밑에 놓인 돌이 그대로 터져 버리자 몸을 빠르게 뒤로 날려 어렵게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석목의 얼굴에는 이미 칼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선천 고수!”

석목은 안색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얇은 도를 꺼냈다.

팔을 흔들자 도가 꼿꼿이 서며 검은색 도망(刀網)이 한 줄기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손에 든 도로 바람을 가르며 석목을 향해 공격했다.

석목이 낮게 소리를 지르고는 도를 휘둘러 공격을 받아냈다.

하얀 도가 반짝이며 사라져서는 귀신처럼 허공에서 번쩍였기에 그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석목은 안색이 굳으며 도로 열 몇 갈래 도영을 만들더니 하얀 도와 연이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귀영도법(鬼影刀法)! 흑풍맹의 사악인가!”

석목이 검은 도를 가로잡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웃고 있었는데 부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석목이 실눈을 떴다. 흑풍맹의 네 맹주는 모두 후천 정상이라 알고 있었는데 사악이 이미 선천 경지를 돌파했다니.

이때, 비명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는데 자아의 목소리였다.

석목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큭큭큭! 저 여자를 구하려고? 늦었어.”

사악은 마치 독수리처럼 뒤에서 덮쳐왔고, 손에 도광을 일으키며 석목의 머리를 자르려고 했다.

석목은 달려가던 중에 돌아서서 피하지 않고는 손에 도망을 크게 드리워 맹렬하게 휘둘렀다.

검은색 도망이 날아 나와 사악의 목덜미를 베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시도였다.

사악은 깜짝 놀라 공격을 멈추고는 도망을 피해냈다.

석목은 사악이 날린 공격을 피하며 온힘을 다해 자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자아가 서 있는 산길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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