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화. 돌아서지 않았더라면 (1)
반 시진 뒤, 둘은 화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서문설이 입은 하얀 옷은 완전히 몸에 달라붙어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
“오늘 사저와 대화를 나눠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역시 삼국칠종의 천재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 계시네요.”
청년 석목이 그리 말을 하며 서문설의 몸에서 시선을 돌렸다.
석목이 짓는 어색한 표정을 읽어버렸지만 서문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겸손하구나. 나는 네 나이 즈음에 지계 무인을 상대로 절대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허공에 떠 있는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설 사저, 이만 들어가세요. 사저가 빠른 시일 안에 천위 경지에 오르기를 바랄게요.”
청년 석목은 끝내 이 말을 내뱉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보자. 나와 약속한 일을 잊지 마.”
서문설은 아름답게 웃으면서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얼굴을 찌푸렸고, 웃고 있는 서문설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아렸다.
석목은 잘 알고 있었다. 승선대전은 애당초 철저한 음모였으며 서문설이 승선을 하게 되면 천정의 휘하에 들어갈 것이고, 또한 앞으로 두 사람은 실력과 경지가 점점 가까워져 불가피하게 만나겠지만 서로 어그러지고 갈수록 멀어질 거라는 사실을.
청년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메고 있던 도를 편안한 위치로 옮겨 놓고는 화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는데 걸음마다 땅에 깊은 발자국을 찍었으며 발을 들어 올릴 때마다 빗물이 첨벙거렸다.
울창한 숲을 에돌자 청년 석목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석목은 허공에 서서 서문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서문설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점점 깊어지는 석목의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문설은 돌아서서 소매로 볼을 훔치며 슬픈 표정으로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다시 돌아선 후에 왔던 길을 따라 달려갔다.
서문설의 하얀 두 발이 진흙탕을 밟자 빗물이 주변으로 튀어, 하얀 옷가지에 흙을 묻히면서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허공에 서 있던 석목은 짜증이 밀려왔다.
잠시 후에 석목의 눈에 결연한 빛이 스치더니 그는 청년 석목이 사라진 곳으로 쫓아갔다.
백 걸음 정도 쫓아가자 석목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데 청년 석목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승선대회는 음모야. 서문설에게 떠나지 말라고 해!”
석목은 허공에 서서 애간장을 태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석목의 목소리는 자신의 귓가에서만 울려 퍼질 뿐, 청년 석목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석목이 몸을 날려 청년 석목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석목의 손이 청년 석목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등 뒤로 뚫고 나왔다.
청년 석목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으며 석목의 투명한 몸을 뚫고 지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멈춰! 거기 멈추라고!”
석목이 목 놓아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청년 석목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년 석목이 서문설을 놓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이려던 찰나, 청년 석목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청년 석목은 한참 동안 빗속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돌아서서 숲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석목은 흠칫 놀라며 곧바로 청년 석목을 따라갔다.
툭, 툭, 툭!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청년 석목은 몸이 푹 젖어버린 채 비를 맞으며 달음질하여 정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굽이도는 순간 갑자기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가냘픈 몸이 비를 뚫고서 청년 석목의 품속으로 뛰어들어왔다.
서문설이었다.
청년 석목은 두 팔로 서문설을 품에 꽉 껴안았다.
서문설의 옷은 빗물에 푹 젖은 채 아리따운 몸에 딱 붙어있었으며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눈썹까지 늘어졌다. 또한 아름답고 맑은 눈에서 투명한 빛이 반짝였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석목을 올려다보았다.
맨발은 흙탕물에 담겨있었다.
청년 석목은 팔을 들어 서문설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두 발등 위에 서문설의 두 발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서문설의 키가 조금 커지면서 이마가 석목의 코끝에 닿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년 석목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문설의 정교한 코끝에 매달린 반짝이는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친 숨결을 느낀 청년 석목은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서문설과 입을 맞추었다.
서문설은 귀가 빨개졌으며 두 볼도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입술이 포근하고 따뜻해져 자신도 모르게 “음!”하고 소리를 냈다.
청년 석목은 서문설의 두 팔을 꽉 껴안았다.
서문설은 한참 동안 멍하다가 청년 석목의 등 뒤에 살포시 올려놓았던 두 손으로 등을 매만졌다.
석목이 허공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자 가슴이 따뜻하고 뭉클해졌으며 마치 스스로 청년 석목의 몸에 녹아들어 서문설을 껴안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밤새 가랑비가 내린 후, 천우성 하늘이 맑게 개었다.
해가 아직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천우성의 높은 성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몸을 날려 동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들은 청년 석목과 서문설이었다.
그들 뒤로 투명한 석목이 따라가고 있었다.
석목은 둘을 따라 국경을 넘어 대제국의 경내로 들어갔다.
대제국에 도착한 후에 청년 석목과 서문설은 곧바로 종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석목이 어렸을 때 자란 작은 어촌 마을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석목의 부모님께 제전을 치른 후에 대제국과 대진국이 인접한 변경에서 영력이 풍성한 산을 찾아 ‘목설각(牧雪閣)’이라는 동부를 짓고서 머물렀다.
석목도 둘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두 사람은 매일 함께 술법을 수련한 후에 함께 잠자리에 들었으며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이런 안정된 삶이 길어지자 석목은 무미건조해졌다. 하지만 지난 번에 월신과를 먹은 후에 겪은 경험을 떠올리며 환경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는 않았다.
* * *
일 년 후, 석 달간 눈에 뒤덮여있던 산에 드디어 맑은 날이 찾아왔다.
이때, ‘목설각’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른 옷을 입은 청년 석목이 품에 솜이불로 감싼 아기를 안고서 침상에 앉아 애틋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설아, 고생했어.”
청년 석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문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는데 땀으로 젖은 머리가 볼에 붙어있었으며 눈에 기쁨이 가득 어린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청년 석목은 한 손으로 아기를 안더니 다른 한 손으로 서문설을 부축했다.
서문설은 따뜻하고도 모성애가 넘치는 눈빛으로 청년 석목이 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동부의 천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석목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솜이불 속에 싸인 아이는 눈매가 석목과 매우 닮았는데 입술과 코는 서문설을 닮았으며 탱글탱글한 피부에 얼굴빛이 불그스름했다.
“나와 설아의 아기인가? 예쁘군……”
석목은 월신과를 삼키고서 월신과가 만들어낸 환경에 들어왔다는 것을 잊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석목은 아래로 내려와 아기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석목의 손은 허공에서만 허우적댔다.
석목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석목은 청년 석목의 몸속으로 들어가 청년 석목이 취하는 동작 그대로 아기를 안은 듯한 자세를 잡았다.
마치 지금 아기를 안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듯.
“우리 딸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서문설이 석목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흠칫했는데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년 석목은 애틋한 눈으로 서문설의 얼굴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큰 눈 때문에 산이 석 달 동안이나 묻혔다가 오늘에야 맑아졌으니 설청(雪晴)이라고 하자.”
“석설청, 좋아. 그럼 우리 아기는 설청이야.”
서문설이 아기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뇌어보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청년 석목이 웃는 얼굴로 딸의 작은 콧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설청아, 설청아……”
석목이 천천히 날아올라 다시 동굴의 천장으로 올라가 아무 말 없이 세 가족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삶을 살게 된다면 이번 생에 더는 여한이 없겠지……
설청이 태어난 후로 청년 석목은 시간을 대부분 딸과 함께 보냈다. 아기의 옹알이에 귀를 기울였으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면서 딸에게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 *
그렇게 시간은 십여 년이 흘렀다.
청년 석목이 일군 가정은 세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어났으며 목설각도 점점 넓어지면서 조용한 낙원이 되었다.
십 수 년이 흐르는 동안 청년 석목 부부는 수련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수련 경지가 점차 올라가 흑마문을 포함한 적잖은 종문 세력들이 두 사람을 종문의 장로로 모시려 했지만 둘은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두 사람은 이미 세상과 등진 삶에 적응했으며 세속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산 속에서 보내는 생활이 십여 년 간 이어지자 두 사람의 성향도 영향을 받아 과묵해졌으며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가부좌를 틀고서 수련을 하는 게 일상의 전부가 되었다.
물론 지금은 영체가 되어 구전현공이나 대범반무진경을 수련할 수는 없었지만 명상으로 의식 속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취하니 그간 수련하면서 알지 못했던 중요한 부분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석목은 막연할 때도 있었다. 채아, 종수, 연나와 같은 이름들이 간간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마음속이 허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은 너무 완벽했기에 석목은 가족들을 떠날 수 없었으며 어떻게 떠나야할 지도 몰랐다.
* * *
시간이 흘러 이미 이백 년이 지났다.
청년 석목은 더는 청년이 아니었으며 미간 사이는 세월의 흔적이 자글자글해 허공에 떠있는 석목보다 늙어보였다.
석목은 정원에 놓인 탁자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푸른색 서책을 읽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첫줄만 계속 읽고 있네?”
서문설이 밖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서문설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청춘 소녀의 분위기는 사라졌으며 깊숙이 빠져드는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설아, 언제 나왔어?”
석목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참 동안 서 있었는데. 왜?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서문설은 비난하듯이 말했다.
“별일 아니야. 요즘 시국이 혼란스러워 애들에게 돌아오라고 해야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었어.”
석목이 서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천위 정상에 올라서 여러 종족 세력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꽤나 알렸잖아. 아무도 우리 애들을 괴롭히지 못할 거야.”
서문설이 말했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잖아. 우리가 천위 정상에 오른 지 벌써 백 년이 넘었는데, 우린 여전히 경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요 근래에 꽤 많은 고민을 하며 생각해봤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
“뭘 알아냈는데?”
서문설이 석목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수십 년 전에 통천선교가 천마종을 삼켜버린 후, 영석 광산에서 무작위로 영석을 채굴하고 있어. 설아도 알겠지만 우리 목설각 근처에 깃들었던 천지 원기가 점점 희박해지고 있어.”
석목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설청이도 그래. 우리 애들은 자질이 다 뛰어난 편이라 진즉에 경지를 돌파 했어야하는데 아직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서문설이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위를 넘어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없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 거 같아.”
석목이 말했다.
투명한 석목은 정원에서 자식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가 서문설과 청년 석목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남해성의 영력으로는 절대 천위를 돌파할 수 없었으며 석목과 서문설이 천위 정상에 도달한 것 자체가 이미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투명한 석목은 혼이 되어 떠다녔기에 그간 남해성에서 일어난 변화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서문설과 석목이 나누는 대화를 듣자마자 마음이 답답해지더니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때, 하늘에서 ‘쿵!’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지가 격하게 흔들리며 땅이 파도처럼 꿀렁거렸다.
우르르!
도처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청년 석목의 동부를 둘러싼 벽에 균열이 생겨 와르르 무너졌다.
기이한 현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빛 수십 갈래가 정원에 내려왔다.
석목과 서문설의 자식들이 전부 그들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버지, 이건……”
잘생긴 청년 두 명이 석목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